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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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편지/전경린

봄편지/전경린 정인들이 서로 오래 살아라 하는 뜻을 올봄에는 알 것도 같습니다. 마음만 흘러갈 뿐, 가엾고 방법이 없어. 세울에 기대자고 하는 일인 것을요. 다행이 영 어긋나지는 않고 한 철의 끝이라도 붙들고 피어 짧은 한때나마 손 붙들어보고 관절을 부딪치고 얼굴을 익히고 지는 온갖 봄꽃들... 이리 무거운 얼굴을 이고 비에 젖고 햇볕에 타고 바람에 흔들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잎이 지니, 고마워요. 사람 사라진 자리의 어둠, 꽃 진 자리의 어둠, 이 창자 속 같은 봄밤의 어둠... 내 분별의 모서리로 잘못 건드리면 먹물이아프게 터질 것만 같아 난 혀를 숨기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어요.

좋은 수필 2021.07.07

참 좋은 날 /박경희

참 좋은 날 참 좋은 날 박경희( 은행잎이 11월 그늘을 끌어들이자 사그락사그락 햇살이 궁구르는 길 위로 진눈깨비 날렸다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내려앉은 구름이 웅덩이 속에서 흘렀고 서리 맞은 호박잎이 밭머리에 누렇게 스러져가는 바람을 흔들었다 발자국으로 내려놓은 이파리 위로 번진 노을 가슴에 담아놓고 가도 좋은 것을 벚나무 그늘이 깊어서 쓸쓸함이 박새 발가락으로 흔들렸다 나를 스치는 것들이 햇살에 부딪쳐 스러지던 날 아우, 저승길 걷기에 참 좋은 날 ―박경희(1974~ ) 기온이 내려갈 때마다 하관(下棺)을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몸뚱이 가진 모든 생은 땅 위에서 살다가 결국 혼(魂)은 날려 보내고 육신[魄]은 땅 아래로 스미게 마련이지요. 곡식들 다 익힌 햇볕도 이제 쉬어야 한다는 듯이 식어지는 ..

좋은 시 2021.07.07

끝순이/정재순

끝순이 / 정재순 세상에 모든 것에는 이름이 딸려 있다. 참하게 핀다고 진달래, 쓰디쓰다고 씀바귀, 상처를 내면 애기 똥처럼 노란 유액이 난다고 애기똥풀이다. 구석진 길모퉁이에 아무렇게 돋아난 작은 풀꽃도 이름을 가지면 하나의 의미가 된다. 끝순이는 내가 꼬맹이 때 이름이다. 형제들이 나를 놀려먹고 싶을 때면 끝순이라 불렀다. 어감부터 왠지 부끄러움을 일으켰다. 옥편을 찾아보고 뜻을 음미해봤는데, 성의도 없이 막 지은 것 같았다. 살아가는데 장애라도 되는 양 여겼다. 단 한 번도 툭 터놓고 말하지 않았으니 비밀이라 해도 될 성싶다. 호적에 올리는 이름과 불러주는 이름이 다른 아이가 꽤 있었다. 딸을 줄지어 낳은 경우 ‘딸 막이 이름’을 불러주면 후에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이름값을 톡톡히 했는지 남동생..

좋은 수필 2021.07.07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정희승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정희승 회사일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장기체류하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변두리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퍽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그때만큼 가족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불 꺼진 썰렁한 방이었다. 괴괴한 어둠 속에 꼭 닫혀 있는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왜 그렇게 낯설고 외롭게 느껴졌는지. 시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바동거리다 온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져버리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마다 가정이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늘 용서해주고 ..

좋은 수필 2021.07.04

긴 방황 / 전혜린

긴 방황 / 전혜린 금빛 햇빛이 가득 쪼이는 건조하고 맑디 맑은 한국의 가을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나에게 미칠 듯한 환희의 느낌을 준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전에는 욕망도 많았다. 중학교 때, 죽어도 평범한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껏 어느 마녀의 저주같이 따라다니고 있다. 나를 그렇게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은 얼마나 오만과 무지를 나타내고 있는가? 너무나 순수하게도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악의 없는 그러나 연민 섞인 미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보와 같은 어린 시절, 그리고 청춘 시절 ― 지금 나는 ‘서야 한다’는 ― 자기 자신을 사회 내에서 존재케 해야 한다는 나이에 들어섰다...

좋은 수필 2021.07.02

오래 사슈 / 임만빈

오래 사슈 / 임만빈 외래를 보다가 오래 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치료해주었던 할머니들로부터다. 오래 사는 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든다. “선상님이 오래 사셔야 돼. 선상님이 안 계시면 누가 내 병든 몸을 돌봐주지?” 여든을 훨씬 넘긴 할머니의 이야기다. 뇌동맥류를 수술 받은 환자인데 자식들은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자기는 절대로 자식들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혼자 산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아파. 괜찮을까? 겁이 나지. 자식들도 같이 살지 않는데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해. 선상님이 책임을 저야 혀. 죽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살아갈 동안 선상님은 살아 있어야 혀.” 그래, 할머니가 다른 병으로 돌아가시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좋은 수필 2021.07.02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전혜린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전혜린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밝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의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림(Riem)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날 오후의 첫 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행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

좋은 수필 2021.06.29

연근조림/전경린

연근조림/전경린 고등학교 3학년에 오르던 해였으니 대입시험 준비로 마음이 비장했던 때였다. 대문의 하숙생 구함이라는, 종이를 코팅한 푯말을 읽고 살짝 쪽문을 밀었더니, 뜻밖에 햇살이 깊게 고인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흙담을 따라 커다란 호두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안으로는 온통 동백나무들과 키 작은 철쭉이 심어져 있었는데 일월 마지막 주에 벌써 동백꽃이 희고 붉게 피어 있었다. 햇볕이 환한 마당 가운데는 우물과 수도 물탱크가 있는 세면장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쪽문으로 들어설 때, 왜간장을 졸이는 희미한 냄새가 났다. 육십 줄에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 골격이 큰 할머니가 옛날식 부엌문 앞에 놓인 화덕 곁에 앉아 들어서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쩐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할머니도 기별이라도 넣은 사람..

좋은 수필 2021.06.29

손택수 시 모음

옻닭 / 손택수 1 옻나무는 지독하다 나무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둘투둘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국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 ..

좋은 시 2021.06.29

달챙이 숟가락 / 정성수

달챙이 숟가락 / 정성수 어머니의 기일이다. 아내가 제사상을 차렸다. 제사상이라고 해야 제수진설법에 의해 차린 것이 아니다. 소반 위에 영정을 모셔놓고 양쪽으로 촛불을 켜 놓았다. 영정 앞에는 꽃바구니가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장미와 안개꽃을 장식한 꽃바구니다. 살아생전에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였다. 추석 성묘나 어머니의 묘소에 갈 일이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국화가 아닌 꽃다발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제사상에 놓은 가지가지 꽃들을 섞어 만든 꽃바구니를 내려다보는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웃으시며 걸어 나올 것 같다. 꽃바구니 앞, 하얀 접시에 놓은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어머니의 달챙이 숟가락이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울컥하더니 목구멍을 막았다. 오늘 낮에 찬장 속을 정리하다가 눈에 띄..

좋은 수필 2021.06.29

거미줄/손택수

거미줄 거미줄 ― 손택수(1970∼ )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들을 만나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아무리 화가 난대도 홧김에 “우리 헤어져!” 이런 말은 하지 말라고. 화가 났다는 표시로 ‘헤어지자’고 한 것뿐인데,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끼어들게 된다. 한 번도 이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연인은 이별을 상상해 보게 된다.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될..

좋은 시 2021.06.28

무화과가 익는 밤/박금아

무화과가 익는 밤 박금아 가을에 들면 달빛은 마방(馬房)에 들어와 앉았다. 어린 말이 벌레를 쫓느라 꼬리로 제 몸을 치는 소리가 적막하기만 하다. 잔등을 쓰다듬을 때면 말은 어미를 부르듯 큰 눈망울을 들어 저편 하늘로 “히힝!” 소리를 날려 보냈다. 그곳 말 울음소리가 닿는 곳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서면 푸르레한 공기 속으로 철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밤하늘을 날았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오래도록 울음이 남았다. 그 소리가 밤의 젖줄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유선(乳腺)이 탱탱해진 밤은 유두를 열었다. 태어나서부터 젖이 고팠다. 어머니는 집안일에 밭일에 어장까지 돌보느라 젖먹이에게 젖 물릴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다. 고픈 젖을 쌀죽과 원기소로 채우며 자랐다고 했다. 아기 입에는 증조할..

좋은 수필 2021.06.28

적자嫡子 /박금아

적자嫡子 박금아 아버지가 배 문서를 들고 집으로 오던 날의 기억이 선하다. 집안의 여인네들이 방 안 가득 어머니 곁에 둘러앉아 머릿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모습도 떠오른다. 문서가 담긴 싯누런 봉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어흥 11호’는 아버지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할아버지가 소유한 십여 척의 배 가운데 제일 낡고 작은 배였다. 아버지는 서자(庶子)였다.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가 씨받이로 맞아들인 여인의 몸에서 얻은 첫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낳은 후, 생모는 강보에 싸인 아들을 행랑채에 남겨 두고 새벽달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친할머니는 딸 하나를 더 낳았고, 이어 아들 형제를 내리 낳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다. 두 분 작은아버지가 서울 어느 대학에서, ..

좋은 수필 2021.06.28

검정, 색을 풀다 / 조미정

검정, 색을 풀다 / 조미정 마당이 바람을 탄다. 먹 염색을 하느라 오전 내내 고무 대야에서 텀벙거렸던 천들이 허공 속으로 말려 올라간다. 제 몸을 뒤집었다가 놓는다. 비바람 속 검정이 시나위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다. 검정은 흰색이나 회색과 더불어 무채색으로 뭉뚱그려진다. 색이 없다고 해서 맹물처럼 밍밍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유채색보다 강렬하면서도 함께 있으면 자신보다 다른 색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평소엔 과묵하고 진중해 보이더니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걸까.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라도 된 듯 세차게 펄럭거릴 때마다 묵향이 후드득거린다. 싸락눈이 흩뿌려지던 회색빛 오후, 엄마가 영면에 들었다. 돌아가시는 줄도 모르고 웃는 얼굴로 병실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지나..

좋은 수필 2021.06.28

막고 품다/정끝별

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메모를 휘갈겨 놓은 종이쪽이니 우편봉투니 ..

좋은 시 2021.06.25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강해림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강해림(1954∼ ) 산 입구 천막식당에 중년의 남녀가 들어선다 가만 보니 둘 다 장님이다 남자는 찬 없이 국수만 후루룩 말아 먹곤 연거푸 소주잔을 비워대는데 여자는 찬그릇을 더듬어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젓가락을 든다 그릇과 그릇 사이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푹푹 발목 빠지고 무릎 깨지게 했을까 좌충우돌 난감함으로 달아올랐을 손가락 끝 감각의 제국을 세웠을까 그곳은 해가 뜨지 않는 나라 빛이 없어 캄캄하여도 집 찾아 돌아오고 밤이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느라 가위로 피 묻은 탯줄을 잘랐을 테고 이윽고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는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여자 손잡고 제왕처럼 식당문을 나선다 꽃구경 간다 복사꽃 날리고 꽃향기에 어둠의 빛 알갱이가 톡톡, 꽃눈처럼 일제히 터져 나와 눈..

좋은 시 2021.06.25

장독 하나 묻어 두고/이연희

장독 하나 묻어 두고 ―이연희(1973∼ ) 앵두나무 그늘 아래 장독대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커다란 독 뚜껑을 다른 장독 위에 올려놓고 고추장 몇 숟가락 탁탁 소리 나게 퍼 담던 굵은 손마디 찬바람 속에서 한 해 먹을 고추장을 담그며 말하지 못한 속내를 어머니는 장독 속에 묻었다 새빨간 고추장에 싹싹 비빈 밥을 입속에 퍼 넣을 때 할머니와 아버지 언니와 나는 흔적 없이 잘 삭은 어머니 속내를 먹었다 더러는 짜고 더러는 매웠던 소리 내지 않는 한 시절을 온가족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푸른 잎 사이에서 소리 없이 앵두가 익어가던 장독대의 봄날처럼 베란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덜 삭은 마음들이 맵고 짠 맛을 내며 가슴에서 밀려올 때 붉고 따뜻한 몸 안의 길을 따라 늙은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다녀가신다 화자..

좋은 시 2021.06.25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길상호

구부러진 상처에게 듣다 ―길상호(1973∼ ) 삼성시장 골목 끝 지하도 너는 웅크리고 누워 있었지 장도리로 빼낸 못처럼 구부러진 등에 녹이 슬어도 가시지 않는 통증, 을 소주와 섞어 마시며 중얼거리던 누더기 사내, 네가 박혀 있던 벽은 꽃무늬가 퍽 아름다웠다고 했지 뽑히면서 흠집을 냈지만 시들지 않던 꽃, 거기 향기를 심어주는 게 너의 평생 꿈이었다고 깨진 시멘트벽처럼 웃을 때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하게 찍혀 있던 망치 자국, 지하도는 네가 뽑힌 구멍처럼 시큼한 녹 냄새가 났지 길상호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에서 옮겼다. 시집의 화자는 대도시 서울의 구석진 곳에서 죄 지은 듯 겁먹은 듯 몸을 사리고 있는 존재들을 ‘모르는 척’ 앓는다. 자기를 방기하거나 유기된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그 눈물겨운 허름..

좋은 시 2021.06.25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천서봉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1971∼)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

좋은 시 2021.06.25

잠시/박승자

잠시 /박승자(1958∼) 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 슬리퍼 끌고 슈퍼 가는 길 환하게 불 밝힌 슈퍼 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주인 백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고 발자국으로 보도블록 위에 꽃판을 만들고 있는데 잠시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많이도 버려 둔 것만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시절에 저 팻말을 잠시 빌려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으로 만들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잠시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발걸음을 한없이 머물게 하고 고개를 드니 슈퍼 안이 환했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다 지켜봤을 회화나무, 쉬지 않고 물을 퍼 날랐을 물관도 어느 나무 속의 아늑한 습기를 잠시라도 방문하고 싶었..

좋은 시 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