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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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 문숙

울돌목 / 문숙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가슴에 박혀 암초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이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좋은 시 2021.06.16

저녁의 악보 / 박금아

저녁의 악보 / 박금아 저녁은 살아 있는 것들의 귀착지. 무성했던 계획들을 접고 제집을 찾아드는 발걸음들로 저잣거리처럼 술렁인다. ​ 모두는 저녁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를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대낮, 새의 날갯짓이 먹이를 구할 비상飛翔이라면 저녁의 그것은 수고를 접는 안온함이다. 낮의 계곡물 소리가 먼 길을 재촉하는 느낌이라면, 저녁의 그것은 목적지에 무사히 안착해서 발을 푸는 평온함이다. 나무들도 광합성을 위해 온종일 햇볕을 좇던 가지들을 제 속으로 모아들인다. 저녁의 품은 더없이 넉넉해진다. 하늘은 넓어지고 길은 멀리에 뻗어 있다. 강가에 사는 이라면 더 넓어진 강폭을 만날 수 있고, 바닷가에서는 한층 깊어진 수심水深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맘때면 산 너머 사찰에서 들려오는 예불 소리, 저녁은 대웅..

좋은 수필 2021.06.16

버드나무 길/박용래

버드나무 길 박용래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紅顔의 少年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박용래(1925~1980) 꽃 한창 지나고 이제 연두가 밀립니다. 차례대로 오고 또 가는 빛깔들입니다. 겨우내 색이 그리웠던 산천의 부름을 받고 천천히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타나는 연두, 그다음은 초록의 무리가 좀 급한 듯 넘보겠지요. 버드나무의 치렁치렁한 자세에 돋아나는 연두는 단연 눈길을 끕니다. 바람이 지나면 휘어져서 부끄러운 고백의 자세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가셔졌던 연애의 감정을 불러냅니다. 그 질서를 그대로 따라가면 좋으..

좋은 시 2021.06.16

수염 / 주인석

수염 / 주인석 씨 없는 싹이며 거꾸로 자라는 줄기다. 여느 생물과는 달리 굴광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어도 멸종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길러도 꽃이 피거나 열매 맺지 않는 줄기다. 필요성은 없으나 세대를 이어 유전되어 내려오고 퇴화되지도 않는다. 성숙한 남자의 뺨이나 턱에 자리를 잡고 남성만의 관능미를 자랑하고 액세서리 역할까지 한다. 오후보다 오전에 더 잘 자라며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을 먹고 산다. 몸에 있는 털 중에서 가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수염이 아닐까. 눈썹이나 코털, 머리카락은 이물질이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사명을 다한다. 이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꺼번에 잘리거나 밀려 나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수염은 아침마다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남성 상징 액세서리..

좋은 수필 2021.06.16

비 설거지 / 류인혜

비 설거지 / 류인혜 현관을 닫으면 모든 필요한 것이 집안에 다 들어있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모든 것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는 생활 방식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일을 한다고 했는데 마당에 널어놓은 것들이 많을 때, 소나기가 내리면 집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밖에 일나갔던 식구들도 뛰어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열어놓은 장독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걷고, 땔감으로 쓰려고 늘어놓은 젖은 생나무를 한 아름씩 안아서 부엌에 들이고, 마당에 쌓아놓은 것들에는 비닐을 씌웠다. 어느 때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문득 비가 그쳐버려 들여놓은 것들을 다시 마당에 내다 놓아야 될지 어쩔지 난감하기도 했다. 소풍날에 비가 올까 걱정..

좋은 수필 2021.06.16

삼겹살 / 김상영

삼겹살 / 김상영 삼겹살은 좀 침침한 골방에서 먹어야 더 맛이 난다. 그 방은 좁아서 아늑해야 하고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기름때 낀 포마이카 상다리의 나사가 헐거워 꺼떡거려도 상관없다. 가스레인지는 군데군데 기름얼룩이 누리끼리하게 붙어있어야 좋다. 방바닥에 사려놓은 가스 줄을 궁둥이로 슬쩍 밀치고 앉은들 어떠랴. 누런 비닐 장판은 기름기가 덜 닦여져 눅진해야 정이 간다. 방석은 이 손님 저 손님 하도 깔고 앉아서 윤이 날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쩍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라야 편하다. 환풍기는 내미는 바람이니 묵은 먼지가 끼어 있은들 상관없고, 스위치 줄을 당기려 발돋움한들 뭐 그리 대수랴. 파리똥 듬성한 벽에 빌붙은 고장 난 시계는 언제나 어제 그 시각이며, 이 손님 저 환자에게 헤프게 나눠줬을 한의원..

좋은 수필 2021.06.16

새로운 오늘

새로운 오늘 해롤드 라미스 감독의 1993년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와 마음가짐의 힘에 대해 유쾌한 스토리로 교훈을 전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왕자병 중증의 기상 캐스터 필 코너스에게 한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투덜거리며 도착한 필은 서둘러 형식적으로 취재를 끝내지만, 폭설로 길이 막혀 다시 마을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다음 날 아침, 낡은 호텔에서 눈을 뜬 필은 어제와 똑같은 라디오 멘트를 듣게 되고, 축제가 끝났는데 또다시 축제 준비로 부산한 마을의 모습을 보고 경악합니다. 분명히 하루가 지났는데 내일로 넘어가지 않고 축제의 날이 반복되고 있던 것입니다. 황당한 일이 일어나자 필은 돈 가방 훔치기, 축제 망치..

향기로운 글 2021.06.15

밍밍함, 그 끌림 / 박성희

밍밍함, 그 끌림 / 박성희 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하지만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어시장에서 만난 개복치가 그랬다. 오래된 어물전 귀퉁이에 내걸린 개복치의 사진은 좀 유난스러웠다. 평범한 생선의 대가리를 뚝 잘라놓은 듯한 외형에 몸의 끝부분엔 아래위로 뾰족한 지느러미가 뿔처럼 돋았다. 배지느러미도 없어서 얼핏 보면 생선이라기보다는 꼬리가 떨어져 나간 연 같았다. 배는 잿빛이 간간이 섞인 흰색에다 등허리는 푸른색이었다. 거대한 몸에 이목구비는 어쩌면 그리 오종종한지 기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피부 만은 철갑처럼 견고해 보였다. 어설픈 생김새 때문에 개복치는 제대로 생선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름마저 귀한 대접과는 거리가 먼 물고기였다. 복어과 이면서 생선을 낮추어 부르는 치자를 단것도 서러운데 앞머..

좋은 수필 2021.06.15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마경덕

사진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 ​ 시집『그녀의 외로움은 B형』서두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것들은 슬픔의 협력자 서글픔에 기대어 시를 쓴다 막무가내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 외로움은 공격적이고 방어할 힘이 없는 나는 나를 방치했다. 저녁노을이 지고 서서히 번져오는 아릿한 어둠의 농도에 먼 산의 능선이 사라지고 마당의 분꽃이 어슴푸레 피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는 간절한 것들이 가슴에서 꿈틀거렸다. 조금은 저릿하고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설레는 그 정도의 통증을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해석했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은밀하게 키우고 있었다. 밤하늘을 홀로 날아가는 새, 우수수 마른 수수밭을 헤집는 갈바람소리, 뻘밭에 버려진 폐선, 파도에 밀려온 구두 한 짝, 밭둑에 우두..

좋은 시 2021.06.14

앉은뱅이 밥상/정영선

앉은뱅이 밥상 ​ 정영선 ​ 오늘은 식탁을 놔두고 낡은 상에 밥을 차려 먹는다 청암동 비탈진 곳 구멍가게 뒷집 문간방과 가난해도 좋았던 나의 신혼과 함께 먹는다 연탄불에 갓 지은 냄비 밥과 석유곤로에 끓인 국과 소찬 몇 가지 정갈하게 앉히고 서른 살 신랑 앞에 다소곳이 내놓았던 작은 밥상 밥은 설고 국은 짜고 반찬은 싱거웠지만 밥상 앞에 마주 앉은 신혼 입맛은 딱, 두 가지여서 고소하거나 달콤했다 탱탱했던 내 얼굴이 늘어지고 골이 생겼듯, 옻칠 발라 반질거렸던 상 얼굴도 찰과상에 다리 관절은 삐걱거린다 우린 사이좋게 나란히 늙어간다 훤칠한 6인용 식탁에 곳간 열쇠 다 내주고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난 그는 알고 보면 집안 내력 다 꿰는 우리 집 상床 노인이다

좋은 시 2021.06.14

신호등 / 고두현

신호등 / 고두현 너 두고/돌아가는 저녁/마음이 백짓장 같다./신호등 기다리다/길 위에/그냥 흰 종이 띠로/드러눕는다. ―고두현(1963∼ ) 몸이 괴로우면 푹 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괴로울 때, 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황망할 때, 슬플 때, 화가 치밀 때는 오히려 걸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 감정은 좀 가라앉는다. 빠른 걸음에 집중해서 괴로움을 잊어보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이럴 때 마주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결코 이롭지 않다. 그것들은 억지로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발길이 붙잡히면 마음도 붙잡히는 법, 괴로움은 이때다 싶어 다시 돌아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겨우 참았던 눈물은 터져 나오고, 겨우 멈췄던 생각도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

좋은 시 2021.06.14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새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기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편편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물을 받아 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편안해 보인다. 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이끼 낀..

좋은 수필 2021.06.14

하늘 天 / 김응숙

하늘 天 / 김응숙 늦깎이 공부를 하다 보니 새삼스레 천자문를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뜻으로 보나 차례로 보나 하늘 天이 으뜸이다. 세상 만물이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 또한 하늘 아래에 있다. 天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늘 아래 있는 人자가 보인다. 한자가 상형문자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사람 人은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문자화 한 것이라 한다. 긴 획이 짧은 획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짧은 획이 긴 획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획 하나만으로는 글자가 될 수 없으니 일견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담아낸 것으로도 보인다. 휘어져서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두 획에서 삶의 탄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사람 人 위..

좋은 수필 2021.06.14

빗살무늬/김용주

빗살무늬 ㅡ김용주(1964~) 오래된 LP판 위로 햇살이 앉아있다 쉰 소리로 돌아가는 그대 낡은 봄빛 갈라진 발뒤꿈치 사이 꽃물 드는 저물녘 가등 켜진 골목길 한 짐 시름 부려놓고 바람 풍금 마디마다 풀어 가는 봄날이여 촘촘히 파고든 허물 마냥 투명하다 빗살무늬'는 참빗의 고운 결을 담고 있다. 섬세한 올을 지닌 명주바람의 문양을 담은 것도 같다. 그보다 많이 겹치는 전통 토기 덕에 빗살무늬 기억은 각별하다. 그런데 '오래된 LP판 위'에 앉아 있는 햇살과 그 안팎을 '쉰 소리로 돌아가는 그대 낡은 봄빛'이 얹힌다면 그 빗살무늬야말로 애틋하기 짝이 없겠다. 그것도 '갈라진 / 발뒤꿈치 사이 / 꽃물 드는 저물녘'이니! 사라져가는 것들을 따라가는 눈빛 그늘이 길게 잡힌다. ' 바람 풍금'도 마디마디 봄날을..

좋은 시 2021.06.11

수필의 문맥 / 윤오영

수필의 문맥 / 윤오영 다른 예술은 모두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서 전달되지만 문학은 기록된 언어가 의미로 바뀌어져서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전달된다. 그래서 문학은 번역이 가능하다. 원문의 언어에서 오는 뉘앙스나 시각적 운율적 정서를 여실히 옮겨 놓지는 못한다 해도, 번역문을 통해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의 줄기를 불러일으키면 그 줄기를 따라, 그 테두리 안에서 상상적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의 줄기가 문맥(文脈)이다. 따라서 글에서는 문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문장에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이니, 대소문단(大小 文段)이니, 조응(照應)이니 하는 것도 이것을 규격화한 형식론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런 형식적..

수필 이론 2021.06.11

어떤 표정/배종팔

어떤 표정 / 배종팔 스산한 가을날 오후, 짙은 가을빛에 이끌려 비탈진 돌계단을 오른다. 아내와 보름 만에 나선 산행길이다. 돌계단 양옆 단풍나무 잎사귀에 가을 햇살이 뛰논다. 산의 형상이 물고기라면 눈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암자를 지나 몇 발짝 오르면 화강암으로 된 돌부처가 토굴 속에 광배를 끼고 앉아 있다. 가슴 한켠에 불심이 자리한 건 아닌데도 그의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에 매번 발목이 잡혀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도 두려움 반, 경건함 반으로 그를 쳐다본다. 삶의 행적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가 서늘하여 매번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무뎌질 만도 한데 표정이 깊고 무거워 도무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 보름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손톱달처럼 눈을 내려뜨..

좋은 수필 2021.06.11

트랙을 돌며/황진숙

트랙을 돌며/황진숙 트랙을 돈다. 어슴푸레한 빛이 발등에 내려앉는다. 하루를 완성하기엔 아직 몇 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다. 한낮의 소요를 다독이며 뒤덮는 땅거미가 아늑하다. 새벽녘이 돋쳐 오르며 부산하다면 잦아드는 저물녘은 느슨하다. 등을 떠밀며 채근하는 대신, 소리 없이 깃들어 탕진한 하루를 쓸어준다. 땅이 풀리는 춘삼월이어서일까. 코끝에 흘러드는 냇내가 삽상하다. 조금 있으면 당도할 봄기운이 만연체로 파고든다. 쇠락하는 겨울과 솟아나는 봄이 걸쳐 놓은 적요 속으로 걷는다. 들릴 듯 말 듯 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른다. 앞으로 옆으로 뒤로 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무중력 상태다. 혼자 걸어도 둘이 걸어도 좋을,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평지가 가뿐하다. 어스름이 깊어지자 경기장을 둘러싼 조명에 불이 ..

발표작 2021.06.10

알밤/최민자

알밤/ 최 민 자 ‘밤을 깐다’라고 썼다가 ‘밤 껍질을 벗긴다’라고 고친다. ‘깐다’라는 말이 주는 동물적 어감이 낯설어서다. 이 쓸 데 없는 까탈. 요즘의 나는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 있다. 생체리듬이 저조해졌는지 행동은 게을러지고 생각은 과민해졌다.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저 밤톨들처럼. 복숭아나 사과 같은 과일은 향기와 빛깔로 사람을 유혹하고 상큼한 속살을 베어 먹히면서까지 씨를 퍼뜨리는 전략을 쓴다. 알밤은 아니다. 열매이면서 씨앗인 그들은 먹혔다 하면 끝장이어서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내어 줄 여지가 없다. 그 절박함이 자기보호 의지 같은, 견고한 고독을 강요하는가. 야물고 또랑또랑한 이 결실들은 헤프게 농익어 향기를 발산하지도, 풍만한 살빛으로 식..

좋은 수필 2021.06.10

돌매/류영택

돌매 / 류영택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

좋은 수필 2021.06.09

또랑광대 / 김순경

또랑광대 / 김순경 광대는 연극이나 곡예, 판소리를 업으로 하는 예술인을 말한다. 소리광대는 창을 위주로 하는 소리광대, 아니리와 재담을 위주로 하는 아니리광대, 용모와 발림 등 연극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화초광대 등으로 나눈다. 그중에서 소리광대를 단연 으뜸으로 치고 아니리광대를 가장 낮게 평가한다. 소리광대는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 신재효 선생은 광대가廣大歌에서 인물, 사설, 득음과 너름새를 들었다. 많은 관객을 상대하려면 무엇보다 인품부터 갖추어야 하고, 사설 내용을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충분한 성량으로 막힘없는 소리를 자유롭게 내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시각적인 효과도 낼 수 있어야 진정한 광대라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소리꾼의 필수 요건으로 지켜지고 있다. 역량이 조금 부..

좋은 수필 2021.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