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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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전남용

찬밥 ―전남용(1966∼)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 찬밥이 있다 즐거움이 끝나고 더는 즐거움이 없을 때 찾는 ― 찬밥이 있다 뜨거운 시간을 홀로 식혀온 ― 찬밥이 있다 안방에서 친구들과 법석을 떨며 놀다 보면 아랫목 이불 속에 묻혀 있던 밥주발이 나동그라지곤 했다. 어머니가 알세라 찔끔해서 혀를 날름 내밀며 황급히 수습했던,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의 한겨울. 삼시 세끼 식구들에게 더운밥을 먹이고 싶은 게 어머니 마음이다. 그래서 식은 밥은 쌓여 어머니 차지가 된다. 간혹 다른 식구들 앞에는 갓 지은 밥이, 내 앞에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묵은 밥이 놓일 때면 열등한 식구 취급을 받은 듯 서러운 기분에 발끈하기도 했다. ‘밥’에는 ‘차별’에 대한 원초적 감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운밥이 넘쳐나..

좋은 시 2021.06.25

백전백패 / 노정애

백전백패 / 노정애 결혼 22년이 넘었다. 부부간의 전쟁을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승리한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진 기억만 있다고 했더니 시간 있으니 싸워서 이기고 쓰면 되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승리는 무슨 비기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부전승(不戰勝)이 손자병법의 중심사상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나는 그의 상대가 못된다. 살면서 그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낸 적은 없다. 반면 나는 두 번 이혼이라는 말을 했다가 대패했다. 결혼 6년차가 되었을 즈음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댁이 있었다. 시아주버님의 사업실패는 시댁 집이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다른 형제들에게 엄청난 금전적 피해를 주는 등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편은 부도내고 해외로 도피중인 형에게 ..

좋은 수필 2021.06.25

아버지의 지게 / 정성수

아버지의 지게 / 정성수 나팔꽃, 논냉이, 개별꽃, 자운영, 벚꽃 등 사월의 꽃이 떨어지면서 오월의 꽃이 핀다. 영산홍, 클로버, 씀바귀, 탱자나무꽃, 아카시아, 이팝나무꽃, 꽃과 꽃들이 앞을 다투어 오월이 왔다고 아우성이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사람들은 산뜻하다. 무논에는 개구리 가족이 네 활개를 저으며 꽈리를 불어대는 것을 보니 이래서 오월은 가정의 달인가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시골집을 찾아가는 걸음이 뜸해졌다. 그것은 어머니가 없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조차 계시지 않는 집은 더욱 썰렁하다. 헛청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지게. 주인 잃은 지게가 봄이 온 지가 벌써 언제인데 나를 여기에 처박아..

좋은 수필 2021.06.25

안과 밖/최민자

안과 밖/최민자 진열장 안에 소주병들이 도열해 있다. 순하리, 처음처럼, 좋은 데이, 참이슬…… 징발을 앞둔 처자들처럼 술병들이 긴장감으로 다소곳하다. 아래 칸에는 막걸리와 음료수병도 보인다. 참살이, 배다리, 대포, 느린 마을……. 계통 없는 말들이 중구난방 오가는 사내들 사이로 앞치마를 두른 이모님들이 진열장을 여닫으며 술병을 나른다. 몸 안에 부어져 마음을 교란시킬 투명한 물불들이 이 상 저 상으로 왁자하게 흩어진다. 옆 테이블에도 막걸리병이 대기 중이다. 목청이 큰 중년 사내가 목을 비틀자 기울어진 병이 크르렁 콸콸 안의 것들을 쏟는다. 반투명의 뿌연 피가 양재기에 담겨 이 사람 저 사람 목 안으로 흘러든다. 양재기들이 자리를 찾아 앉는다. 안을 비워내 병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구석 자리에 물러..

좋은 수필 2021.06.24

마당/김만년

마 당 김만년 고택마당이 윷놀이 판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낙들이 장작만한 윷을 던지며 덩실덩실 마당춤을 춘다. 좌판이 명절 도드리음식들로 푸짐하다. 인절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툇마루에 앉으니 어느새 고향마당에 온 것처럼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생각해보면 마당을 잊고 산지 오래된 것 같다. 어릴 적 마당의 풍경은 계절마다 달랐다. ​ 겨울마당은 빈 마당이다. 농한기로 접어들면서 어른들은 새끼를 꼬거나 화투를 치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마당도 무료한 듯 잔설을 담거나 살창바람을 흘러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볕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닥나무껍질을 삶아서 말렸다. 여우햇살 꼬리 내리는 마당 볕에 앉아서 매운 시집살이 시름을 벗기듯이, 한 올 한 올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삼동 볕에 걸어두곤 하셨다. 마당이..

좋은 수필 2021.06.24

마당/김해남

마 당 김해남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자 푸석하던 흙 마당이 촉촉하게 젖었다. 한 구석에는 늘 가릉대는 늙은 개의 웅크린 모습과 찌그러진 양재기에 불어터진 밥알, 그리고 헛간 담벼락에 바짝 붙여 매 놓은 낡은 멍석, 장독대위에 내려앉은 햇살과 수돗가 빈 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달그락거린다. 비 긋고 지나간 마당에 잡초가 파랗다. 거름 한 줌 뿌려 준 적 없고, 갈증날 때 물 한 모금 먹인 적 없어도 어쩜 이리도 잘 자라는지,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사정없이 모가지를 비틀어 내팽개쳐도. 녀석들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만 내리면 고개를 바짝 쳐든다. 잡초를 뽑아내고 비질을 한다. 바지랑대에 미끄러지는 한낮의 햇살이 오지다. 오똑하니 앉아 남상거리던 깃 젖은 콩새 한 마리가 포르르 마..

좋은 수필 2021.06.24

외꽃이 피었다/전성옥

외꽃이 피었다 / 전성옥 천변에 외꽃이 피었다. 물외인지 참외인지 모르겠다. 개나리만 한 노란 꽃이 땅바닥에 붙어 피었다. 가느다란 넝쿨손이 조심스레 땅을 붙잡고 간다. 다문다문 달려 있는 진초록 이파리, 보송한 솜털, 어찌 여기 터를 잡았는지, 위태하고 아슬하다. 한 발만 저편으로 넘어가면 개천에 빠졌을 것이요, 반대편으로 한 발을 나갔다면 사람에게 밟혔을 것이다. 그 아슬한 경계에 엎드려, 서걱대는 마른 갈대를 움 삼아 철을 잊은 채 피어 있다. 늦은 가을과 이른 겨울이 겹치는 즈음이다. 저 작은 외꽃은 아마도 두벌살이를 하는 중이리라. 한여름, 외가 제철일 때 누군가 먹고 버린 껍질 속에서 가만히 숨어 나오 흙을 만났을 것이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느끼고는 본능처럼 움을 틔웠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수필 2021.06.24

꽃게백정/전성옥

꽃게백정 / 전성옥 나는 백정이다. 꽃게백정이다. 삶아 죽이고, 얼려 죽이고, 절여 죽인다. 그러고도 모자라 또다시 부관참시, 능지처참의 형을 더한다. 무쇠연장으로 자르고 베어낸다. 참으로 유능하다. 초보주부 때이다. 요리상식에 귀를 빠끔히 열 즈음이다. 들은 대로 게를 살아있는 채로 사왔다. 염수 생물인 그들은 담수에 닿자 숨이 막혀 반쯤 넋을 놓는다. 늘어진 그를 도마에 올리고 칼을 든다. 그가 몸을 움직인다. 비척비척 열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도망을 간다. 다시 끌어다 놓고 칼을 든다. 소리, 다각…… 다각…… 그들의 집게발이 칼에 닿는 소리. 내려치려는 칼을 두드린다. 멈추세요, 멈추어 주세요. 스윽, 칼금이 그어진다. 칼금은 그들의 등이 아닌 내 가슴에 그어진다. 가슴을 베인 나는 칼을 내려놓는..

좋은 수필 2021.06.24

지리산 팔랑 마을에는 채옥이 할매가 산다/윤영

지리산 팔랑 마을에는 채옥이 할매가 산다/윤영 아이들이 집을 얻어 나가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공허감 탓일까. 두어 가지 반찬과 밥을 쟁반에 담아 텔레비전을 친구삼아 마주 보며 먹는 버릇이 생겼다. 딱히 즐겨보는 프로도 없지만 리모컨은 언제나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 오늘도 늦은 점심을 먹다 보니 인간극장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먹은 밥그릇까지 밀쳐두고 팔랑마을의 채옥이 할머니 연가와 지리산의 사계에 넋을 뺐다. 채옥이 할머니는 올해로 75살이다. 꽃다운 열여덟에 지리산 골짜기로 시집와 4년 만에 갑작스레 남편을 떠나보냈다. 네 살배기 어린 아들과 먹고살기 위해 무작정 남원 시내로 나갔다. 이집 저집 식모살이로 전전하다가 자그마한 식당을 차렸지만 건물주가 자꾸 집세를 올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

좋은 수필 2021.06.23

점/전미경

점 / 전미경 있어야 할 것과 있어서는 안 될 것의 모호한 경계가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오히려 아니함만 못할 때 오는 후회, 나는 그 쓰린 경험을 반갑지 않은 훈장을 달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사이, 마음자리에 들앉은 불편이 미뤄오던 시간을 끌어당겼다. 수십 번을 망설이다 찾은 피부과, 왼쪽 손등 위에 돋아난 일광흑자를 제거하기 위해 두꺼운 병원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손등 한가운데 생긴 검은 점이 마음 한 곳을 실시간으로 조여왔다. 책장을 넘길 때나 키보드를 두드릴 때면 두 눈이 내리꽂히는 지점, 익숙지 않은 불편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시간이 갈수록 짙게 침착되어 가던 검은 점은 나를 자유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점..

좋은 수필 2021.06.23

늙어, 그래도 봄날이다 / 허석

늙어, 그래도 봄날이다 / 허석 “투투투투”, 사는 곳이 시골이어서인지 한여름에는 방역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목길을 누빈다. 뽀얀 연기 속을 두 팔 휘저으며 신나게 달음박질하던 어린 시절 그 아이를 먼 풍경처럼 읽는다.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익숙해 시간보다 빠르게 살았던 나이였다. 시간이 동무하며 걷던 꿈 많은 청춘도, 앞서만 가던 시간을 쫓고 쫓기며 바쁘게 살던 장년의 나이도 지났다. 노년에 한발 다가선 이제는 세월을 앓는 통증만이 덜컹덜컹 걸음마다 소리 지르며 가는 봄날 붙들고 있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다. 걷는 것도 조심스럽고 행동도 민첩하지 못하다. 지각능력도 떨어져 실수도 잦아지고, 감각기관이 낡았는지 위험에 적극 반응하지도 못한다. 가벼운 산책에도 쉽게 지치고, 무거운 물건 앞에서는 근..

좋은 수필 2021.06.22

무죄無罪 / 김애자

무죄無罪 / 김애자 훅훅 달아오른 지열이 턱에 닿는다. 푸르스름한 새벽너울을 쓰고 전답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촌부들은, 점심 끝에 감겨오는 나른함에 만사 제쳐놓고 오수에 든다. 진도견도 헐떡거리며 내려감기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겠는지 꾸벅 고개를 떨군다. 풀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도 없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산촌의 고즈넉함을 깨는 것은 오로지 팔풍받이 느티나무 가지에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울어쌓는 매미들과, 개울 건너 돌무지를 둘러싼 두충나무 숲에서 '홀딱자빠졌다. 홀딱자빠졌다. 쪽박바꿔줘' 두견새의 별쭝스러운 애원가 뿐이다. 평화스럽다 못해 권태롭기조차 한, 이 한낮의 풍경은 겉모습만 이러할 뿐이다. 안으로 눈길을 돌리면 쫓기고 쫓고 먹히는 싸움이 치열하다. 지금도 백로 두 마리가 시루봉 ..

좋은 수필 2021.06.21

시간의 빛깔 / 박월수

시간의 빛깔 / 박월수 산골의 가을은 목덜미에서부터 온다. 스산한 기운이 뒷목을 파고들어 등뼈로 스미면 보랏빛 바람 닮은 가을 들꽃은 핀다. 시린 등을 핑계 삼아 화덕 앞에 앉았다. 화르르 타는 장작위에 지난여름 말려둔 인진쑥 몇 가닥을 올린다. 온기 사이로 그윽함이 밀려든다.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보인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를 옆에 끼고 쇠죽솥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어린이 연속극은 끝난 지 오래다. 골목에선 꼬맹이들 노는 소리가 뒷덜미를 끌어당긴다. 계집아이의 골난 입술이 십 리 밖까지 튀어 나간다. 땔감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솥뚜껑을 뚫어져라 노려봐도 김이 날 생각을 않는다. 굵은 장작이라도 있다면 넣어두고 달아날 텐데 불쏘시게 같은 짚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집으로..

좋은 수필 2021.06.20

빗방울이 석종을 치고/김정화

빗방울이 석종을 치고 / 김정화 다시 한 번 와보고 싶었다. 한가로운 시골 마을 길모퉁이 위에 제법 편편한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돌에 빗방울 자국이 새겨진 곳, 찰나의 순간이 그대로 멈춘 영원의 세계, 일억 년 전에 만들어진 빗방울 화석지이다. 여리고 둥근 몸이 천길 벼랑으로 떨어져 내린 바닥이다. 수만 명이 다녀갔을 이곳. 자세히 보니 바위 곳곳에 콩알만 한 물방울 자국이 오목오목 파여 있다. 멈춘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탱탱하게 몸을 일으킬 것처럼 널부러졌다. 극심한 가뭄 뒤에 내렸던 빗줄기가 진흙 위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자국이다. 그 위에 퇴적물이 쌓이고 지층이 굳어지면서 마침내 빗방울 화석으로 재탄생된 것이라 한다. 중생대 백악기의 어느 하루, 지상에 내디딘 물의 발자국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

좋은 수필 2021.06.18

손이 말하다/염귀순

손이 말하다 / 염귀순 손은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다. 숨길 수 없는 온도를 담아 타자와 교감하고 세상과 교류한다. 손을 잡고 놓고 오므리고 펴고 엎는다. 악수는 우호의 표시이고 박수는 환영과 응원, 찬사를 표하는 것이며 ‘손에 손잡고’는 마음과 힘을 합한다는 뜻이다. 세상 밖 어떤 힘이 간절할 적에는 두 손부터 모은다. 조용히 합장하고 비손하는 자세엔 신에게로 향한 혼신의 염원이 담겨있다. 호미곶 ‘상생의 손’은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 모든 국민이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의미를 담았다. 동해안 해돋이 명소와 ‘손’, 생각해 보니 썩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청동상(靑銅像)의 손이 하나가 아니다. 육지의 해맞이광장엔 왼손이, 바다엔 오른손이, 그리 멀지 않은 사이를 두고 마주 보며 있다..

좋은 수필 2021.06.18

돌의 활동/박지웅

돌의 활동 마침내 한줌이 되었다 얼마 만인가 이렇게 날아본 날이 돌멩이가 날아가고 있다 돌은 한동안 큰 돌 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다 버리고 손 일부만 남겨 우리를 불러 세운다 한 방 먹이려고 우리가 집어든 것이 아니다 물수제비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물론 우리가 아니다 돌이 내 손을 붙잡은 것이다 솔숲 낮달 지나 밑도 끝도 없는 넓이를 지나 눈 부릅뜨고 펄럭펄럭 날아가는 돌 왜가리가 수면을 딛고 날아오르듯 돌멩이는 긴 다리를 꺼내어 물의 이마를 탕, 탕 힘껏, 밟는다 이 비상을 돕기 위해 수면은 바싹 엎드린다 납작하게 엎드리면 비로소 돌의 물갈퀴가 보인다 수만 년에 걸쳐 띄엄띄엄 행성을 도는 돌의 지동설을 믿게 되는 것이다 돌멩이라는 최초의 조류(鳥類)​를 발견하는 것이다 돌 속은 돌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다..

좋은 시 2021.06.16

30cm / 박지웅

30cm / 박지웅 ​ ​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눈시울을 만나는 최초의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30cm 안에 들어온다면 그곳을 고스란히 내어준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시 2021.06.16

삼나무 떼 / 이영옥

삼나무 떼 /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

좋은 시 2021.06.16

빈집 / 이영옥

빈집 / 이영옥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 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 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 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 정지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집게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 홑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 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를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 나간 독 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

좋은 시 2021.06.1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수필 202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