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86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이웃집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릴 하시지 않는 분인데 단단히 벼르고 오신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도 적잖이 놀랐다. 시골살이를 하러 오기 전부터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마음 준비를 많이 했었다. 이사 와서는 집집이 떡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가져다 드렸다. 어르신을 뵈면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인사성 바르다고 좋아들 하셨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받게 되었다. 청송으로 귀농을 결정하고 암수 강아지 한 쌍을 분양받았다. 오래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청이와 송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중 송이는 잘 생긴 수컷이다. 송이가 어느새 자라 어엿한 총각이 되었다. 애교라..

좋은 수필 2021.06.07

소금 / 김원순

소금 / 김원순 간수가 모조리 빠져나간 소금자루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언젠가 세면장 바닥을 바르고 남은 시멘트 포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처럼. 국산 천일염 100%라고 쓰인 붉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것이 소금자루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며가며 나는, 바윗덩이 같은 소금자루를 발로 툭툭 차거나 옆구리를 쿡쿡 쑤시곤 한다. 조금씩 부숴 놓아야지 배추나 생선을 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틈 하나 없이 엉겨붙은 소금들이 은근히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바닷물에 여태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소금처럼 한데 엉겨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 삶의 간수들이 나를 가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대했던 일이며, 남의 불행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

좋은 수필 2021.06.06

호위무사 / 황진숙

호위무사/황진숙 낮달이 이울자 그림자가 물러갔다. 호위하던 무사들이 하나둘 처소에 든다. 내걸린 문패도 알전구도 없는 칸막이 거처에 발걸음을 부린다. 길 위를 점령한 된바람이 따라 들어와 무사들을 사열한다. 양털에 뒤덮인 어그 부츠가 회상에 젖어 있다. 폭설이 내린 지난겨울, 눈 속을 뒹굴며 만끽했던 환희의 순간을 되새김질 중이다. 동면에 들었던 샌들이 슬며시 눈을 뜬다. 서늘한 기운이 달려들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는 듯 몸을 웅크린다. 하루를 견뎌온 흔적들은 어둠을 타고 밀려온다. 접힌 시간으로 뒤축이 무너진 운동화는 뻣뻣한 힘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끈까지 풀어 헤친 채 맥을 못 춘다. 쉰내 나도록 길을 누빈 구두는 연신 잠꼬대다. 돌부리에 걷어차인 비애로 꿈속을 헤매나 보다...

발표작 2021.06.05

덤 / 윤 영

덤 / 윤 영 여름 일요일 저녁이었다. 한 며칠 드난살이 떠나는 계집아이가 보따리 싸듯 짐을 챙겼다. 낯선 곳에선 어둠도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놋쇠물 같은 불빛들이 질펀한 창밖을 한참 본다. 풋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매미 울음이 호텔을 무너뜨릴 기세다. 이 땅의 여름도 어지간하다. 연꽃으로 흐드러진 길을 달릴 때만 해도 천국인가 싶더니 웬걸. 아침부터 뛰고 달리고 줄서기에 지쳤다. 관광지가 아닌 선계로 가는 길이라더니 고생깨나 하겠다 싶어 맥이 풀린다. 풀린 맥을 다시 거두어들인 곳은 귀곡잔도와 유리잔도를 만난 후였다. 벼랑 끝에 선반을 매달아 뉜 길이 잔도다. 귀신도 곡소리를 하며 지나간다는 길.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린다. 깍아지른 절벽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때쯤 가이드가 턱 하니 질문 하나를 던졌다..

좋은 수필 2021.06.05

춘천에 가면/최지안

춘천에 가면 ​ 최지안 ​ 봄이 오는 춘천, 소양강에 가리라. 4월 어느 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달리리라. 가지마다 탐스런 소양강댐 벚꽃을 보러. 봄바람에 꽃잎은 흩날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가리라. 겨울이 오면 소양강에 가리라. 물보다 찬 공기가 습기를 머금은 나무에 입김을 불면 하얗게 꽃이 피는 상고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점점 커나가는 얼음 꽃. 겨울 아침, 전설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상고대를 보러 새벽잠 털고 졸린 눈 비벼가며 가리라. 강을 낀 조그만 마을. 그런 마을이 보인다면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리라. 강변 어디쯤에 낡은 나룻배가 있는지, 바위가 모여 있는 곳에 다닥다닥 고둥이 살고 있는지 찾아 볼 것이다. 마을은 강을 허리에 끼고 낮은 언덕과 교회를 껴안고 있을 ..

좋은 수필 2021.06.04

기적의 하나님/마경덕

기적의 하나님 마경덕 초등학교 때 윗집 아줌마가 내게 전해준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한 알의 씨, 돌밭 같은 내 가슴에 떨어졌어도 죽지 않고 시나브로 자라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이라 무속신앙이 성행하고 무당들의 징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대나무에 깃발을 매달아둔 점집도 많았다. 미신을 믿던 어머니는 가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곤 했는데 밤새 무당의 주술에 맞춰 반복되는 징소리 장단을 자장가로 들으며 잠이 들었다. 무언가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이 잠을 덮치고 그런 날은 가위에 눌린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렸다. 태풍이 불면 머리를 산발한 바람이 집채만한 파도를 들어올렸다. 요동치는 바다를 보며 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천둥이 치면 ..

좋은 수필 2021.06.04

빗물 사발/길상호

빗물 사발 -길상호(1973~ )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조용조용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 마당 한구석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사발은 위가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고 줄금이 나 있다. 그 그릇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빗방울이 똑, 똑, 똑, 떨어지자 사발이둥근 입을 벌려 그것을 받는다. 빗방울을 받아 다시 ..

좋은 시 2021.06.04

나물 파는 보살 할매/전인식

나물 파는 보살 할매 전인식 얇은 봄 햇살도 머리에 이면 무거운가 보다 시끌벅적 사람들 소리 요란한 시장 어귀 한 보따리 봄나물 펼쳐 놓고 고갯방아를 찧는 할머니 나물 팔 생각은 아예 잊어버리고 꿈속 극락 미리 다녀오시는 모양이다 할머니 대신 파릇파릇 눈을 뜨고 있는 저 봄나물 다 팔고 나면 늙은 영감 저녁상에 간고등어 한 마리 올릴 수 있을까 냉이 달래 쑥 사이소 사이소 외치지도 않고 마음 다 아는 듯 눈 감고 앉은 모습이 왠지 경주 남산 바위 속 보살님 걸어 나온 것만 같다 ―전인식(1964~ ) 봄나물 꺾어 장에 나온 할머니. 졸음에 겨운 할머니 머리 위에 햇빛은 하얗기만 합니다. '봄 햇살도 머리에 이면 무거운가' 봅니다. 그럴 리가요. 모든 짐을 머리에 이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풍습을 환기한 거지..

좋은 시 2021.06.04

사막에서 버티기 / 허창옥

사막에서 버티기 / 허창옥 그 여자는 키가 작다. 150cm나 될까한 작은 키에 오동통하다.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지만 맑고 큰 눈이 빛나고 있어 예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사시사철 입고 있는 짙은 녹색 앞치마에는 노란 몸과 까만 눈, 갈색 귀를 가진 헝겊 곰이 아플리케로 붙어있다. 곰도 예쁘다 여자와 곰은 닮았다. 그 여자는 동구시장 한 모퉁이에서 야채노점을 하고 있다. 이불가게, 양품점, 그릇가게 등 불빛 환한 점포들 앞에서 길게 좌판을 늘어놓고 야채를 다듬고 있는 그 여자의 이름은 그냥 ‘훈’이네이다. 얼핏 거칠어 보이지만 함빡 웃으며 물건을 팔 때 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다. 그의 꿈은 버젓한 점포하나 마련해서 이불가게 주인처럼 수북이 쌓인 불건들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앉는 ..

좋은 수필 2021.06.03

나막신/이병철

나막신 ― 이병철(1921∼1995)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우리 집 둘째 꼬마는 귀신이 나올까 봐 화장실에 혼자 못 간다. 귀신이 무섭다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무서운 것투성이인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 나는 귀신보다 마음이 무섭다. 때때로 마음이 나를 지옥에 내려놓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터져 마음이 쑥대밭이 됐다. ‘해결할 수 없으면 놓아야 한다.’ 머리에서는 이렇게 지시가 내려오는데 마음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쩌지, 어쩌지.’ 마음은 이 난장판..

좋은 시 2021.06.03

밀물/정끝별

밀물 ―정끝별(1964∼) 가까스로 저녁에서야/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나란히 누워/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응, 바다가 잠잠해서 오늘은 정끝별 시인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처음 이 시를 읽고 나서 한참을 잊을 수 없었다. 제목처럼 밀려오는 감동을 여러분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은 ‘밀물’인데 막상 시를 읽어보면 ‘밀물’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안 나온다. 자연현상, 달의 힘, 해변과 썰물…. 밀물에 응당 따라오는 이런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시는 바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은유의 힘을 빌려 시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우리, 나, 너의 이야기다...

좋은 시 2021.06.03

꽃 춤 / 권남희

꽃 춤 / 권남희 단골에게서 점을 치고 온 게 분명한 어머니의 말투는 강하기까지 하다. 이미 이모부 잔치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아버지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대꾸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아버지는 들뜨고 흥분까지 한 얼굴빛으로 이모부 회갑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월평리로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떠난다. 휙 바람이 일었을까. 아버지가 심어 둔 백목련 꽃송이가 투둑 떨어진다. 두고 온 부모형제 보고 싶은 마음에 때마다 얼마나 섧겠냐는 해설까지 덧붙이곤 한다. ​ 어머니와 함께 도착한 저녁나절의 월평리는 동구밖까지 잔치분위기가 넘실거리고 있다.​ 너른 마당에는 목련꽃 핀 나무 사이로 천막이 몇 개 쳐져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빛과 함께 덩실거리고 있다. 백일이 막 지난 아들을 안고 있는 나까지도 어깨짓에..

카테고리 없음 2021.06.01

냄비받침/남구택

책은 베개도 되고 가끔 냄비받침도 된다. 책에 火印으로 남은 자국을 보고, 시인은 시가 불도장이라 생각들었을까. 詩는 저마다의 마음에 남은 화상자국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무엇을 남기는 것은 뜨겁다. 詩는 뜨겁고 전하는 마음도 뜨겁지만, 가끔은 전하고자 하는 말이 허공으로 달아나버리기도 한다.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데,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둥글게 둥글게 큰 파문으로 닿고 싶은데...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모든 시인의 염원이다. 냄비자국도 흔적이므로 퍽 괜찮은 시를 썼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좋은 시 2021.05.31

냄비받침 변천사 / 안도현

냄비받침 변천사 / 안도현 밥그릇에다 국을 담을 수도 있고 국그릇에다 밥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나 냄비받침에는 냄비만 올릴 수 있다. 사과를 깎아 올려놓을 수도 없고 과자를 담을 수도 없다. 그것이 냄비받침의 비애다. 주방용품 중에 제일 비천한 역할을 맡은 게 냄비받침이다. 평소에는 싱크대 구석에 웅크리거나 틈에 끼여 있다가 뜨거운 임자를 만날 때만 호출된다. 그것도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냄비만 말이다. 불기에 덴 자국은 그래서 필수다. 검은 상처를 문신처럼 몸에 새기고 산다. 어떤 냄비받침은 생김새가 험상궂기 그지없다. 조폭인가 싶은데 알고 보면 냄비의 똘마니다. 냄비받침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든 견디는 게 그의 삶이다.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콜라병 뚜껑을 철사로 꿰어 만든 냄비받침이 있었다. 강아..

좋은 수필 2021.05.31

발 도장/황미연

발 도장 / 황미연 무심코 보던 책 속의 한 문장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종일 그 생각에 발목이 흥건해질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이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여든네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시간의 두께가 내려앉은 늙고 앙상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 입으로 뭔가를 주억거리는 표정이며 몸짓, 피아노 건반 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주름진 손은 참으로 아름답다. 보헤미안 출신인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열두 살에 독주를 할 만큼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든여덟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음악에 헌신한 순순한 영혼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

좋은 수필 2021.05.31

이별 연습 / 정재순

이별 연습 / 정재순 말간 햇살에 익어가는 들판을 달린다. 휘감아 도는 바람에도 오어사로 향하는 길에서도 가을은 물들어간다. 이 계절이 이울 즈음이면 딸은 내 곁을 떠나갈 것이다. 바로 앞에 널따란 연못이 이채롭다. 당대의 고승들이 수도하며 머무른 절집이어서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원효와 혜공선사가 죽어가는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 내기를 하다가 한 마리가 헤엄쳐 가는 것을 보고 서로 내 고기라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못 쪽으로 걸린 사찰 현판이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인다. 내겐 친구 같은 더 없는 딸이다. 나이에 비해 사리판단이 재바르고 명쾌해 의지가 많이 된다. 동생들이 말썽을 부려 힘겨워 할 때면 제 경험을 들려주면서 나를 다독여주곤 한다. 딸은 저만 생각지 않고 동생들의 장래를 염려 ..

좋은 수필 2021.05.31

가정/박선희

가정 박선희 열무 썰어 소금 뿌리자 숨이 죽었다 한길을 흐르는 물관과 체관 뻣뻣한 아빠의 티격을 태격으로 되받는 엄마의 말끝처럼 소금은 단단한 쪽과 부드러운 쪽을 오가고 있었다 삐죽삐죽 고개 드는 열무는 다독여 재우고 햇살을 팽팽하게 당겨 질겨진 잎은 흔들어주고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서 건너와 한국말 익히며 김치라는 발음을 섞어 만든 김치를 익히는 여자들 그들의 어둔한 말투만큼 싱거워진 김치맛에 주고받는 눈빛은 짜다 소금을 머금고 뱉으면서 수위 조절하며 단단한 성질 절여질 때를 기다리는 엄마 펄펄 뛰던 숨 부드러움에 절여지는 아빠 기세 조금씩 역전되고 소금은 열무를 통째로 뒤집게 만든다 이국땅서 온 저들도 곧 이렇게 버무려질까 풀 죽은 아빠의 등 뒤, 물속으로 녹아들지 못해 오소소한 소금들 갓 취직한 나는..

좋은 시 2021.05.29

감잎에 쓰다/이해리

감잎에 쓰다 이해리 물든 감잎을 시엽지(枾葉紙)라 부른 사람이 있었다 감잎이 종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적겠는가 외딴 뒤란 저녁연기 금빛 사장을 둥실 떠나는 나룻배 막차가 떠난 뒤 홀로 헤매는 바람도 좋겠지만 나는 적겠다 벌레 먹힌 잎이 왜 지극한지 상처 많은 단풍이 왜 마음 당기는지 그런 물음 적어 파란 하늘 아래 달아놓고 기다리겠다 수 만 잎의 답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집『감잎에 쓰다』(시와사람, 2010) -사진 : 다음 이미지 ----------------------------------------------- 순간을 바라보기 그리고 시가 되기까지 기다리기 대단한 고집이고 욕심이다 이런 거 없으면 시인 하지 말아야 한다 묻는다는 것 그게 삶이고 詩다 ‘지극함’과 ‘당김’은 시에 있어 숙명 같은 것이다..

좋은 시 2021.05.28

봉평 장날/이영춘

봉평 장날 이영춘 올챙이국수를 파는 노점상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올챙이국수를 자시고 있는 노모를 본다 정지깐˚ 세간사 뒤로 하고 한 세기를 건너와 앉은 푸른 등걸의 배후, 저문 산 그림자 결무늬로 국수 올들이 꿈틀꿈틀 노모의 깊은 주름살로 겹치는 허공,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앉는 한낮. ˚부엌의 영동지방 사투리 -시집『봉평 장날』(서정시학, 2011) -사진 : 다음 이미지 ------------------------------------------------ 어머니를 회상하는 어느 봉평 장날의 풍경이다 시인은 이제 나이 들어 어머니가 경험한 세계로 직접 여행을 떠나본다 어머니를 떡 허니 시 속에 불러들여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고감의 차이가 시간의 연속이듯 삶과 죽음은..

좋은 시 202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