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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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궁핍/마경덕

가장 낮은 궁핍/마경덕 텅 빈 잔고를 보듯 쓸쓸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만지면 까맣게 묻어나는 내 삶의 그을음이었다. 바닥 중에도 가장 낮은 밑바닥이 있듯이 궁핍 중에서도 가장 낮은 궁핍이었다. 가난에 익숙했으므로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늘 만나는 저녁노을 같은 것이었다.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가난, 철없어서 오히려 가벼웠던 가난, 하지만 잠시 사라진 가난은 노을처럼 다시 찾아왔다. 침몰하는 하루, 추락이 빤한 내일, 노을의 끝은 어둠이었다. 그 막막한 시간을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자식들, 끼니마다 아귀처럼 먹어치우던 그 식욕을 어머니가 다 감당하셨다. 상자에 보관한 고구마가 싹을 내밀었다. 참을 수 있는 시간은 다 써버린 것이다. 자줏빛 잎은 고사리처럼 말..

좋은 수필 2021.05.18

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마경덕

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다 늦은 저녁답에 새 한 마리가 캄캄한 하늘을 날아가는 걸 보면 울컥, 슬픔이 치민다. 모르겠다. 왜 그리 가슴이 아리는지 모르겠다. 깃들 곳이 없는지. 짝을 잃었는지 새는 혼자고. 날은 저물었고 새의 날갯짓이 무척 지쳐 보인다. 걱정을 하는 사이 새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서러움만 남는다. 내 슬픔은 대개 이런 식이다.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쓸데없이 심각하고 정작 걱정해야 할 일은 한없이 관대하고 게으르다. 내 가슴을 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 두 달 전,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의정부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의자에 앉아있는 어느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행색이 초라한 늙은 남자였다. 까만 윗도리를 걸쳐 입은 그 남자의 어깨에 비듬이 허옇게 떨어져 있었..

좋은 수필 2021.05.18

요양원 가는 길/허정진

요양원 가는 길/ 허정진 도심지를 벗어나 늦가을 들녘을 가로지른다. 분주함 속에 풍요가 거쳐 간 논밭에는 허허로움과 적막으로 가득하다. 그루갈이를 하려는지 곱게 가다룬 논이랑이 소멸과 생성의 끝없는 순환 고리를 엮어내고 있다. 갈잎 같은 작은 새떼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지나간다. 길섶에 열병처럼 늘어선 풀꽃들이 새삼 알짝지근하다. 세상 밖이어서인지 친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산중 작은 요양원이다. 2층의 단아한 주택에 넓은 정원을 가졌다. 각종 꽃나무들이 앞뜰을 이루고 뒤뜰에는 여러 유실수들이 실하게 열매를 맺었다. 시득부득 말라가는 꽃잎마다 지난밤 청아하게 빛나던 달빛냄새가 스며들었다. 바닥에 수북한 낙엽들이 흙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오체투지 중이다...

좋은 수필 2021.05.18

도래샘 / 윤희순

도래샘 / 윤희순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이 있다 거친 흙길을 돌아 돌아서 물길을 놓치지 않고 샘이라는 이름을 얻어낸 도래샘,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온전히 길을 찾아낸 작은 샘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모진 과정을 겪고 새로 태어난 샘의 안정된 모습은 얼굴을 들이대지 않아도 물 내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며 샘의 모습만 감상했던 나였다. 언제부터 샘이 이루어진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해탈의 과정을 겪은 듯하다. 안온한 얼굴에 깊숙이 자애로운 웃음 짓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돌고 돌아서 맑은 물줄기 샘솟는 도래샘 같은 모습으로 평온한 웃음을 전하던 그녀의 정연한 움직임을 기억하게 된다. 낮은 계곡 물 소리가 안내해주는 산길에 들어섰다. 처음 그 길을 들어섰을 때와는 사..

좋은 수필 2021.05.18

환하면 끝이라더니 / 황미연

환하면 끝이라더니 / 황미연 적막한 빈 집에 석류꽃이 피었다. 주인이 없으니 햇볕을 받아 안을 힘조차 없어졌는지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았다.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며 혼자 살던 할머니를 기억이나 하듯 마루에 방치된 자그마한 냉장고를 본다. 잡초만 무성한 마당을 지나 한 열댓 걸음 걸어가면 별채에 달린 작은 방이 나온다. 그 방안에는 주인이 보다만 책들이 널브러졌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한번은 꼭 온다던 노모의 마음이 담긴 방이다. 낮게 쌓아놓은 담장 곁에 오래된 석류나무가 유난히 붉은 꽃등을 내걸었다. 고요하던 몸이 뜨겁게 들끓는다. 아무리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땀을 흘리지 않던 몸인데 갑자기 더워지면서 목덜미가 흥건해진다. 남들은 추운데 나는 덥고, 남들이 더울 땐 또 춥다...

좋은 수필 2021.05.18

조용한 일/김사인

조용한 일 ― 김사인(1956∼)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하늘에 왜 불이 났어?” 어린 아들이 묻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다. 붉은 노을을 상상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드디어 노을이 짙어지고 하늘이 깊어지는 시절이 왔구나 싶다. 색의 계절, 가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을이 온다는 말은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농경사회의 유전자가 남아서일까. 이제 추수가 시작되니까 덜 배고플 거라고, 우리의 조상이 속삭이는 것일까. 아니, 현대사회의 지친 유전자는 가을을 다르게 듣는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는구나.’ 여름과 가을 사이의 시간..

좋은 시 2021.05.17

비의 발자국/마경덕

비의 발자국 마경덕 밤새 창문으로 스미는 빗소리, 깊은 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비를 소리로 읽는다. 홀로 내리는 비의 발자국소리. 지금쯤 옥상에 심은 토마토의 발목이 흠뻑 젖고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도 자다 깨어 빗물에 얼굴을 닦고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까마득한 허공에서 낙하를 결심하기까지 몇 번을 망설였을까? 투둑투둑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비의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 뒤란 차양에서 빗물 튀는 소리, 빈틈없이 포장된 도시로 속수무책 뛰어내리는 저 빗소리를 나는 비명으로 읽는다. 비명… 그러니까, 나는 지금 간절한 울음을 듣고 있다. 거대한 콘크리트城인 도시로 내리는 비는 목이 꺾이고 팔이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고…… 여리고성처럼 단단한 문명 앞에 비는 지금 산산이 흩어진다. 언젠가 비 ..

좋은 수필 2021.05.17

빈집/마경덕

빈집 마경덕 비 냄새 질펀한 들머리판, 나락냄새 풋풋합니다. 가도 가도 초록뿐, 모곡리 들녘이 몸을 뒤척입니다. 길은 어디론가 구불구불 기어가고 길섶엔 살진 호박이 배꼽을 내놓고 누웠습니다. 호젓한 아침, 길이 일러주는 대로 한서초등학교를 지나 밤벌 유원지를 돌아 나올 때 물안개는 산허리를 자르고 서서히 마을을 삼키고 있었지요. 간간이 만나는 빈집, 얼마나 적막한지요. 빈집 앞에 똘배 한 그루 어깨가 축 늘어져 있습니다. 꾀죄죄한 몰골로 예닐곱 개 남은 똘배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돌덩이처럼 식은 똘배가 발아래 어지럽습니다. 거뭇거뭇 낙과가 비에 타들어갑니다. 가도 가도 빈집, 빈집입니다. 흙벽이 무너지고, 앞마당 녹슨 자전거가 외롭습니다. 우물이 마르고 문짝이 기울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

좋은 시 2021.05.17

거리에서/이원

거리에서 ―이원(1968∼ )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둥둥 떠다닌다 ‘거리’라는 단어는 쉽고도 어렵다. 일상에서는 네거리, 사거리처럼 쉽게 쓰이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거리를 걸을 때를 생각해 보자. 나는 고작 군중 속에 파묻힌 한 명의 무명인이다. 이름도 뭣도 중요치 않은 ‘지나가는 행인 1’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거리에서 나는 나 외의 다른 군중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다. 거리 속의 나는 그저 그..

좋은 시 2021.05.17

담에 빗자루 기대며/신현정

담에 빗자루 기대며―신현정(1948∼2009)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얼마만이냐/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마당 쓸고 나서/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묵은해가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새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정해 놓은 약속일 뿐이라고 해도, 약속의 의미가 참 약해졌다고 해도 달력의 1월 1일은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올해 1월 1일은 좀 어색했다. 새해 인사를 벅차게 하..

좋은 시 2021.05.17

곤드레밥/김지헌

곤드레밥 김지헌 봄에 갈무리해놓았던/곤드레나물을 꺼내 해동시킨 후/들기름에 무쳐 밥을 안치고/달래간장에 쓱쓱 한 끼 때운다/강원도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나의 위장을 거친 곤드레는/비로소 흐물흐물해진 제 삭신을/내려놓는다/반찬이 마땅찮을 때 생각나는 곤드레나/톳나물,/아무리 애를 써도/조연일 수밖에 없는/그런 삶도 있다 ―김지헌(1956∼) 만나고 돌아섰을 때 두고두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다. 시집도 비슷하다. 덮었을 때 두고두고 생각나는 시가 있다. 사람이나 사람이 낳은 시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중에도 생각나는 시가 나에게 좋은 시다. 김지헌 시인의 ‘곤드레밥’이 바로 그런 시다. 왜 좋으냐를 따지자면 첫 번째는 ‘그냥’이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좋은 시 2021.05.17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어 자취를 감춘 단어 중에 '조선'이란 말이 있다. 어떤 단어 앞에 이 '조선'이란 말이 붙으면, 마냥 소박한 것, 가장 우리 것다운 것으로 쑥 다가왔고 얼마쯤은 진국이라는 다소 예스런 의미의 어떤 향수까지 묻혀와 단박 유년기 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었는데, 가령 '조선 참외' 하면 개구리참외나 작고 동글반반하고 샛노란 참외를, '조선무' 하면 짤막하고 통통하고 속이 단단해서 날것으로 먹기는 맵고 빡빡하지만 일단 김치류로 갈무리되면 긴 겨울을 나고도 다음해 한여름까지 생생하니 든든한 밑반찬으로 버텨주는 무를 일컬었던 것이다. 조선간장은 어떤가. 햇콩을 오래 삶아 빚어 띄운 메주로 역시 제 입맛에 간 맞춰 담근 재래식 장, 이곳에 '조선..

좋은 수필 2021.05.17

젓갈 예찬 / 정호경

젓갈 예찬 / 정호경 ‘젖’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애가 꼬막손으로 미래의 꿈을 주무르며 빨아먹는 사랑의 밥인가 하면, ‘젓’은 나이가 든 어른들이 밥숟가락에 얹거나 걸쳐서 먹는, 짜고 고소한 감동의 반찬이다. 이와 같이 ‘젖’과 ‘젓’은 맞춤법과 뜻과 정서가 각각 다른데도 우리는 일상의 글에서 우리말을 조심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마구 써버리니 글의 문의파악에 잠깐이나마 혼동이 일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젖’이나 ‘젓’이나 둘 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먹는 얼굴표정은 비슷하지만, 각각 맛의 깊이와 색깔이 다르니 하는 말이다. 속담사전에 보면 ‘젓갈가게에 중이라’,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는다’,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는 등 젓갈에 관계되는 속담이 더러 올라 있는..

좋은 수필 2021.05.17

길/김아인

-길/김아인- 평사리 문학대상 요즈음 내 취미는 산을 오르는 일이다. 생각이 많을 때나 온몸으로 나이를 느낄 때 즐겨 찾는 길이 있다. 길 위에서 땀범벅이 되다 보면 속에 있던 잡생각 뭉치들이 빠져나간 듯이 홀가분해진다. 언젠가부터 남녀노소 없이 걷는 게 유행처럼 됐다. 수직상승을 향해 달려온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수평적 삶의 안정을 누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한다. 그에 발맞추듯 올레길, 둘레길, 슬로길 하면서 새 이름의 길들이 많이 조성됐다. 그렇다 보니 걷기에 편안한 기능성 신발이나 등산용품이 인기인데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홈쇼핑에서도 등산복 판매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무이자 할부 조건이 솔깃해서 몇 벌 샀다. 고가품 못지않게 ..

좋은 수필 2021.05.17

아버지를 팔다 / 김아인

아버지를 팔다 / 김아인 가수 유지나 씨와 MC 겸 코미디언인 송해 씨가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제목이다. 처음 듣는데도 리듬을 만난 가사가 찡한 울림을 준다. 여기서 훌쩍, 저기서 훌쩍, 아침부터 방청객들이 눈물바람을 한다.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 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 그 이름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 대중가요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일까? 노랫말을 들을수록 마치 내 사연을 모델 삼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진짜 부녀지간보다 더 살갑고 다정해 보인다. 세상에 엄마를 주제 삼은 노래는 많아도 아버지를 주제 삼은 노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 유지나 씨의 부연설명이 명치끝에 와서 머문다. 본인도 녹음할 때 눈물이 하도 흘러서 중간에 몇 차례나 쉬..

좋은 수필 2021.05.17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

좋은 수필 2021.05.17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나는 처녀 적에 마음이 여리고 곱다는 소리를 들었다. 상스런 소리도 할 줄 몰랐고 거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볼 때 보호해주고 싶은 그런 모습으로 몸도 왜소하고 연약했다. 키 158센티에 몸무게 45킬로그램으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남자는 다름 아닌 나의 남편이었다. 뱃살이 디룩디룩 붙으면서 그 뱃살만큼 뱃장이 두둑해지고 강심장이 된 것도 물론 남편 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의 공을 치하하자면 끝이 없다. 어쩌면 남편은 나를 새로운 여성으로 이 세상에 재탄생시켜준 은인이라고나 할까. 나를 낳은 분은 생모였고 나를 키운 분은 고모였지만, 나를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남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서..

좋은 수필 2021.05.17

스물과 쉰/장 영 희

스물과 쉰/장 영 희 오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때는 인정받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친구는 오륙 년 전에 소위 '명퇴'를 당하고 그냥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아직도 일하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디 가나 무용지물에 퇴물 취급이나....봉사 나가는 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살아서 모를 꺼야. 난 젊은애들 앞에서 주눅 들어"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얘, 주눅은 무슨 주눅! 죽자 사자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 지었어?" 친구가 간 후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배가 고파지자 식품 매장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층을 가로질러 가는데 얼핏 화장품 진열대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좋은 수필 2021.05.17

단어의 무게 / 민명자

단어의 무게 / 민명자 # 고프다 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주었지만, 음식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 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명..

좋은 수필 2021.05.17

커튼콜 / 김희정

커튼콜 / 김희정 “소나기,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시처럼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 남의 얘기 말고 너를 말해 봐/ 급한 간결체 말고 지루한 만연체로 자세히 말해 봐” -소나기에게- ​ 번개가 기척하며 갈라진 천장이 급한 물줄기를 쏟는다. 프롤로그다. 하늘이 온통 세로 줄무늬다. 소나기다. 비에 긁힌 허공 가득 느낌표다. 비의 언어기호는 말줄임표다. 단락을 끊을 수 없는 연속 문장이다. 간격은 불문율에 부친다. 화면은 세로로 장치된다. 비 오는 풍경을 가로로 자르면 한 폭 그림이 되지 않는다. 비의 간격마다 세로로 잘려야 풍경이 된다. 그래서 다음 장면을 보려면 옆으로 넘기지 않고 위아래로 넘긴다. 비의 온도는 계절마다 달라서 체온으로 느낀다. 비의 정서는 넘치게 미학적이다. 테마는 판타지다..

좋은 수필 2021.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