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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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서/김영미

​ ​ ​ 믹서 ​ ​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 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 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꿈결 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 원심분리 되지 않는 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 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 ​ ​ 여름철 주방기구의 주인공은 단연 믹서! ..

좋은 시 2021.05.09

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해가 중천에 떴는데 기척이 없다. 빼꼼히 방문을 열고 안의 동태를 재빨리 살핀다. 이불이 규칙적으로 들썩거린다. 휴~ 다행이다. 살아 있네! 다음은 무관심이다. 무얼 하든, 어딜 가든, 밤늦게라도 잊지 않고 집에만 들어오면 된다. 난 아침형인간이고 그는 올빼미족이라 아침은 각자 해결이다. 난 내 방에서 소리로 그의 행동반경을 감지한다. 저녁이 되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은 보지 않고 밥 먹는 일에만 전력을 다한다. 밥에 돌이라도 들어갔는지, 반찬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며. 그는 문간방에서, 난 거실을 독차지하고 TV를 본다. 어차피 선호하는 채널이 달라 같이 볼 수 없다. 예전엔 보고 싶지 않은 프로도 무심히 정답게 같이 보았지만, 거실 스탠드를 켜놓고 내가..

카테고리 없음 2021.05.08

왕뚜껑전/김지영

왕뚜껑전/김지영 나하고 같은 교무실을 쓰는 종익이 형은 별명이 왕뚜껑이다. 그는 키가 160센티를 겨우 넘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는데, 그나마 남은 머리털마저도 희끗희끗하다. 배는 볼록 튀어나오고, 눈은 왕방울처럼 크고 부리부리하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기의 얼굴을 내 얼굴에 맞닿을 듯 대고 심각한 말이라도 하듯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에 침이 튀어 죽을 맛이다. 말을 할 때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침까지 튀겨,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듣는데도 그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할말을 다한다. 그가 왕뚜껑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느닷없이 화를 잘 내기 때문인데 한 번 화를 내면 아무도 못 말린다. 언젠간 수업을 하다가 문이 부서져라. 열고, 복도로 달려 나와 씩씩거렸다. 마침 나는..

좋은 수필 2021.05.08

주먹/정진희

주먹 정진희 손목뼈에 금이 가 한 달 넘게 석고붕대를 하고 나니 손가락이 굳었다. “이러다간 평생 주먹을 못 쥐어요.” 의사가 으름장을 놓는다. 물리치료와 운동을 한 지 석 달 째인데도 여전히 주먹은 쥘 수가 없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다. 뼈는 천천히 붙어도 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손을 못 쥐면 영영 주먹을 쥘 수가 없다고 한다. 잠시라도 손을 펴고 있으면 편대로, 쥐고 있으면 쥔대로 굳어져 움직일 때 마다 뼈 마다마디와 근육이 아프다. 손가락 접기와 펴기 운동을 하다가 안 다친 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봤다. 날렵하고 가뿐히 손바닥에 손가락 끝이 파묻히도록 쥐어 진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뭘 했을까를 생각하니 기억나는 것이 가위바위보 놀이 밖에 없다. 더구나 왼 손으로 한 일은 하..

좋은 수필 2021.05.08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나약한 제 모습 보는 게 두려워 참았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양동이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참고 참아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면 속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견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본능적 속심이 이성적인 현실을 이길 경우, 꼼짝 없이 봇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볼까 민망하여, 아니 누구에게 못난 모습 들키기 싫어 빈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 한쪽 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목을 놓았습니다. 제3자가 말릴 엄두를 못 내게끔 이불자락으로 온몸을 돌돌 싸서 틀어쥐고 앙금이 죄다 토해지도록 용을 썼습니다. 울 장소..

좋은 수필 2021.05.08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춘설 분분한 가운데 연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 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볼록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세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 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

좋은 수필 2021.05.08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평범한 작물, 콩은 참으로 절실한 곡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위대한 생각으로 보면 궁전이지만 별것 아닌 삶으로 보면 하나의 꼬투리, 콩깍지 같은 데서 태어나 콩콩 뛰놀다가, 비바람에 콩 이파리로 퍼렇게 뒤집어지며 쓰러지고 마는 것 아닌가. 몸이 작아서 콩각시 같았다는 할머니가 콩 팔러 가시는 바람에, 열두 살 비릿하게 자라던 아버지는 콩꽃이 이우는 밭두렁을 안고 앵댕그라지며 울었다고 한다. 주야장천 콩밭 매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며 아버지도 별 수 없이 콩 농사를 지었다. 콕, 콕, 콕, 이랑을 점찍어 콩씨를 넣고 김을 매고, 잎에 노랑단풍이 들고 꼬투리가 벌어져 튀기 시작하면 거두어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그것으로 해마다 메주 쑤고 간장을 담궈 ..

좋은 수필 2021.05.08

멸치, 명태에 대한 시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좋은 시 2021.05.08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 최광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 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의 느낌과 타월로 제 몸의 때를 밀 때의 퍽퍽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 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 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 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

좋은 시 2021.05.08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좋은 수필 2021.05.08

손빨래하기 / 정해경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

좋은 수필 2021.05.08

저수지/권정우

저수지 권정우 자기 안에 발 담그는 것들을 물에 젖게 하는 법이 없다 모난 돌멩이라고 모난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검은 돌멩이라고 검은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산이고 구름이고 물가에 늘어선 나무며 나는 새까지 겹쳐서 들어가도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바람은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수면 위의 줄글을 다 읽기는 하는 건지 하늘이 들어와도 넘치지 않는다 바닥이 깊고도 높다 ―권정우(1964∼) 매년 5월이 되면 정신이 확 든다. 벌써 2021년도 이만큼이나 갔구나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인간관계도 돌아보게 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챙길 일이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애틋한 건 어버이날이다. 부모님과 몇 해나 더 함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5월의 찬란함은 좀 서럽다. 부모님 없이 맞는 어..

좋은 시 2021.05.08

연 필/ 모임득

연 필/ 모임득 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보자기 둘러메고 십 리 길 뛰어 학교에 가다 보면 필통 안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나곤 했었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연필도 요즘은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뜨면 들로 산으로 다니시며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밭 갈고 쟁기질하던 거친 손으로 입학하는 딸을 위해 연필을 깎아주셨던 아버지.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 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

좋은 수필 2021.05.07

낙타표 문화연필/정희승

낙타표 문화연필 Ⅰ.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 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버린 부질없는 독백과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

좋은 수필 2021.05.06

연필을 소재로 한 시

* 몽당연필 -이해인- ​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 * 몽당연필의 꿈 ​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이 되어도 좋다 침 발라 쓰다가 쓰다가 쓸 수 없을 때 버려도 좋을 한 자루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시커먼 흑연빛이 아니라 5월의 푸른 하늘같이만 될 수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같이만 될 수 있다면 나는 너희들의 몽당연필로 살아도 좋다 (김경..

좋은 시 2021.05.06

홍조/황진숙

홍조/황진숙 반란이다. 소리소문 없이 출몰한다. 가끔 기별은 있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예고도 없이 야밤에 들이닥쳤다. 붉어지는 얼굴을 보며 자고 나면 괜찮겠지. 며칠 있으면 가라앉으려니 했다.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한다. 얼굴에서 가슴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벌겋게 데운다. 따갑고 화끈거린다. 내 숨통을 틀어쥐고 숨 쉴 적마다 콧구멍으로 입으로 뜨거운 김을 쏟아낸다. 작정하고 열을 내며 달려드니 속수무책이다. 물기란 물기는 모조리 빨아들이며 사막화시킨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균열을 일으킨다. 내 천(川) 자 주름, 팔자주름, 삼 주름 등 고인 주름은 모두 저리 가라며 새로운 골을 긋는다. 턱에 볼에 이마에 뾰루지를 올리며 철퍼덕 자리 깔고 누워 버린다. 오만 성깔을 부리는 홍조를 달래기 위해 진정팩으로..

발표작 2021.05.06

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아버지와 자전거/황진숙 “아버지, 내일 제가 모시러 갈게요.” “됐다. 번거롭다. 오지 마라.” 입원 중이던 아버지가 퇴원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전화했다. 통화는 늘 단답형이다. 짧게 끝난다. 자식들이 걱정할까 싶어 당신 말씀만 하고 끊는다. 다음날, 직장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차를 주차하고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이미 짐을 꾸려 휠체어를 타고 나와 있었다. 이제 일흔인데 아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굽은 등이 눈에 띄었다. 고된 농사일과 삶의 이런저런 굴곡으로 꼿꼿하던 허리는 구부정해졌다. 백발의 머리가 수척..

발표작 2021.05.06

나무 도마/황진숙

나무 도마/황진숙 동토의 찬기로 단단하게 자랐을까. 산비탈의 바람으로 광활하게 커 나갔을까. 직선으로 흐르다가 곡선으로 물결치는 나뭇결이 옹골지다. 쇄골만 남은 노거수의 심지마냥 공고하다. 세상을 돌아 나온 듯 붉은 빛깔이 묵직하다. 한 생을 그어놓은 목리 위에 또 다른 생을 써 내려가는 도마. 솔수펑이에서 건너왔을 터이다. 운명선처럼 뻗은 결 따라가면 흙속에 파묻힌 홀씨 하나 만날 것만 같다. 수없이 오가는 계절 속에서 어딘가에 박혀 있었을 씨앗이 눈을 뜬다. 봄볕 한줄기에 깨금발 들고 꽃바람에 고개를 내민다. 파고드는 바람의 귀엣말에 움싹을 틔운다. 소쩍새 우는 소리로 허공이 낭창거리면 흥에 겨워 키를 늘린다. 초록길을 따라 이파리를 달고 꽃을 피우며 도란거린다. 세월이 가고 덩치를 키우며 흔들리기 ..

발표작 2021.05.06

서정의 사회적 기능과 최민자 수필

서정의 사회적 기능과 최민자 수필 정희승(dukechung@hanmail.net) 흔히 서정은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애정 어린 권고도 자주 접한다. 서정적인 글을 쓰는 작가들은 그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사설과 같은 글이라면 몰라도,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전언을 담기가 마땅치 않아서다. 사회와 정치 현실은 분석과 비판, 설득 등이 요구되는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반면, 서정은 정을 바탕으로 한 감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성적인 글과는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정적인 글은 일차적으로 미적 감동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서정은 본질적으로 정치성과 무관한 것일까? 참여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물음에 대한 ..

수필 이론 2021.05.06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지금은 봄이다. 대지는 신생하는 것들의 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강가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랑져 흐르는 물결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결이 다함없다. 강변에 깔린 마름 갈대들의 음률도 들을만하다. 그 어떤 악기가 겨우내 살을 깎아내고 육탈한 뼈들끼리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조곡弔哭을 연주 할 수 있었던가. 강물이 뒤척이는 에로틱한 신음까지를. 청둥오리와 도요새들이 끼리끼리 모여 부리로 제 깃을 다듬는다. 더러는 머리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조는 놈도 있다. 이제 저 새들은 곧 남한강을 떠날 것이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강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내가 보인다. 자신을 자연 속에 밀어..

좋은 수필 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