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이재무 간절 - 이재무(1958~ )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좋은 시 2021.05.02
무의탁 못/이경옥 무의탁 못 ―이경옥(1959~ ) 땔감으로 부려놓은 폐자재 서까래에 뒤틀린 대못 하나 불편하게 박혀 있다 녹슬은 시간에 기대어 항변도 변명도 않고 대들보 깊숙이 박혀 안착하지 못하고 한데로 내쳐진 채 노숙으로 뒤척이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잿불 속에 파묻힐 의탁은 못의 운명이다. 어딘가에 박혀야 제 노릇을 하는 못. 무기처럼 단련된 채 박히길 기다린다. 뾰족한 끝과 망치를 받아낼 머리도 못질 끝에 거듭나는 것이다. 그 럴 때는 대못이나 나무못보다 쇠못이 제격이다. '무의탁 못'이 우리 주변의 '무의탁' 삶들을 일깨운다. '폐자재 서까래'속의 못도 의탁이 끝나고 버려진 생. 한때 누군가의 집을 어엿이 받든 '대못'도 다 쓰이고 나니 '잿불 속에 파묻힐' 일만 남은 게다. '수습할 식구도 없이 ' 내쳐진 땔감.. 좋은 시 2021.05.02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호박찬가(琥珀讚歌)/우종률 이보시오 벗님네들 저기 물건(物件) 형색(行色) 보소 앉은키는 자그만데 배는 저리 처졌는가 대장(隊長) 짓을 시키자니 내세우기 부끄럽고 말단(末端)으로 보내자니 얼굴보기 창피하네 시골버스 올랐더니 뒷자리로 밀어 내네 기사양반(技士兩班) 브레이크 눈치 없이 굴러 가네 어린 것은 멍이 들고 늙은 것은 골병(骨病)드네 가를 박고 모를 차며 빙글빙글 굴러가네 꽃 중에는 너를 두고 꽃 아니라 이르거늘 장미(薔薇)처럼 하나하나 향기(香氣)조차 못 맡겠고 국화(菊花)의 암향(暗香)처럼 눈치조차 못 채누나 벌 잡기 놀이할까 자랑 못할 통꽃이여 없는 듯이 가시 돋은 이파리는 또 어떤가 새색시의 섬섬옥수(纖纖玉手) 흠이 날까 겁이 나네 장만하기 번거로워 먹기조차 귀찮다네 게으른 이 무용지물(無用.. 좋은 시 2021.05.02
잎새달 / 권현숙 잎새달 / 권현숙 아파트 그림자에 갇혀 웅크렸던 누옥이 기지개를 켠다. 잎샘 꽃샘 다 물러가도록 쉬지 못한 내복들 채 헹궈지지 않는 독거의 냄새를 풍기며 사월의 볕살 아래 나른하게 흔들린다. 급변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기가 어디 쉬울까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 숲으로 떠나버리고 외딴 섬으로 남은 누옥의 주인장 끓여댔을 가슴속 켜켜이 쌓인 외로움을, 재롱스런 푸성귀들이 얼마쯤은 달래주기도 하려나. 빛이 밝을수록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남루 새것과 낡은 것의 극명한 대비 도드라지는 경계를 지우려 텃밭은 점점 더 푸르러진다. 좋은 시 2021.05.02
압화/설성제 압화 불 꺼진 창문 앞을 오랜 시간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압화 접시를 꺼내든다. 어딘가에서 눈비 맞으며 피었던 꽃잎들인가, 아니면 어느 길가에서 철없이 피어 원도 한도 없이 향기를 뿜어왔던 꽃들인가. 하얀 접시 위에 다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춘다. 물관으로 들이마시는 숨을 내뱉기가 힘이 들었다. 아마 심장이 짓눌리고 숨통이 조여들어, 마신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통과할 때 여리디 여린 몸피는 이미 이 새상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힘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누군가 모로 뉘어주어 바늘구멍 같은 숨통이라도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다는 절규의 시간도 이미 사그라졌다. 이대로 눌려야 한다. 산에서 들에서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지.. 좋은 수필 2021.05.02
정미소 풍경/구활 정미소 풍경 /구활 폐허의 성처럼 버티고 서있는 낡은 정미소.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정미소 앞을 지나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찡해 온다. 헛간을 덮고 있던 지붕 한쪽은 날아가 비바람이 그냥 들어오고 다른 한쪽 지붕은 임시방편으로 색깔 다른 함석으로 덧땜질해 두었지만 미풍에도 소리를 내는 박자가 제 멋대로인 타악기로 변한지 오래다. 두고 떠나온 고향이 못내 그리워 시골여행을 할 때마다 정미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차를 세워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생동감 있는 기계음은 들리지 않는다. 낱알을 주워먹던 참새떼도, 나락 가마니 속을 들락거리던 쥐들도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이사를 갔는지 사위는 적요롭기 그지없다. 그래도 햇볕만은 떨어져 나간 천정의 빈 공간을 타고 들어 와 그늘이 범접할 수 없.. 좋은 수필 2021.05.02
무/황진숙 무/황 진 숙 보이지 않는 마음 한 자락을 꽃 피운다. 잡다함을 지우고 민낯으로 몰입되어 있는 진지함이다. 마음자리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단단한 몸을 뚫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몰두해 있었던 걸까. 결가부좌를 튼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무가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무는 낯을 틀 새도 없이 베란다 구석에 방치됐다. 침묵이 살에 스며들고 적막이 몸피를 감싸자 무는 새순을 틔웠다. 한 모금의 햇볕도 없는 곳에서 무는 제 몸을 뿌리 삼아 싹을 밀어 올렸다. 관심 가져주는 이 없이 홀로 핀 싹은 여기가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낭창한 기운을 내비쳤다. 너른 밭의 배경이 됐던 지난날의 평화로움이나 계절의 기운을 새기며 열매 맺기를 기대했던 간절함이 연둣빛 줄기가 되어 한 잎 한 잎 잎사귀를 돋았다. 얼마 후 베란다에서 연보.. 발표작 2021.05.02
반죽/황진숙 반죽/황 진 숙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희망에 부풀고 절망에 주저앉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인연의 고리 만들기가 어디 쉽더냐. 뭉치고 치대고 끊어지며 나름의 결을 만들어 가는 것, 하나의 숨구멍으로 호흡하는 살갗을 만들어가는 것. 이해관계를 셈하지 않고 온 가슴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함이다. 풀어질 수 없는 끈끈함과 퍼질 수 없는 찰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일 테다. 온전히 하나 됨만이 농익은 맛을 낼 수 있다. 웃자란 풀이 풋내를 풍기듯 미숙함은 풋맛을 주고 지나침은 신맛을 낸다. 수백 겹의 인내심으로 이루어진 파이의 결들이 내뱉는 향에 환호하고 촉촉한 식빵이 주는 담백함에 젖어 들지니.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겹겹의 밀푀유를 만들듯이 치열하게 치댄 시간만이 우리가 지닌 오묘한 매력을 발산.. 발표작 2021.05.02
종이컵/황진숙 종이컵/황 진 숙 내 입술과 네 입술이 맞닿는다.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네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촉촉함에 가슴 속이 차오르고,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전해오는 온기에 따스해진다. 네 도톰한 입술과 밍밍한 몸이 너와 나를 잇대어준다. 스며드는 커피의 향긋함과 달달함은 세상사에 부딪친 모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손끝을 감도는 가벼움은 버거운 일상의 무거움을 어루만진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밀도는 성찰의 결과인가. 원형의 심상인가. 알량한 자존심으로 움켜쥐고 패대기치려 할 때 여리지만 탄탄함으로 버티는 너. 습기에 휘둘려 눅눅해지고 구겨질지언정 감내하는 깜냥은 우직하다. 손안에 밀착되는 찬기와 온기의 생생함에 무기력한 순간들은 환기되고 격정의 소용돌이는 가라앉는다. 무수한 사고.. 발표작 2021.05.02
낙죽장도(烙竹長刀)/황진숙 낙죽장도(烙竹長刀) 황 진 숙 적열의 무게를 견딘다. 인두 끝의 불꽃이 마디의 몸피를 뚫는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날카로움이 온 몸을 관통한다. 그을리며 타들어가는 고통을 그 누가 알랴.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대나무는 미동도 없이 제 몸을 내어준다. 낙죽장도는 손잡이와 칼집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 거죽 위에 사상이나 신념을 새겨 넣은 칼이다.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도금을 입힌 칼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바이킹의 울프베르흐트검, 사무라이들의 대도, 징기스칸의 만도 등 세상의 칼들이 밖을 향해 날을 세웠다면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장도는 나를 향해 날을 벼린다. 책을 가까이 한 옛 선비들이 몸을 지키기 위해 마음결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자기성찰의 칼이다.. 발표작 2021.05.01
식빵/황진숙 식빵/황 진 숙 “타닥, 타다닥” 크러스트가 터진다. 파열음이 경쾌하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충분히 부풀어 올라서일까. 오븐에서 나와 세상을 만나는 소리가 선선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과 결대로 찢어지는 속결이 부드럽다. 단련된 시간에서 나오는 유연함으로 말랑거린다. 온몸으로 받아낸 소용돌이 끝에 찾아온 구수함이 사방으로 풀어진다. 그 내음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 덩이의 빵이 머금은 평온에 푸근해진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지만 모든 게 담긴 빵이 식빵이다. 앙금을 들이거나 토핑을 두르지 않아 담백하다. 무명옷을 걸친 듯 수수하다. 가장자리는 떼어지고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개명당해도 속없이 하얗기만 하다. 빵가루가 되어 형체 없이 날려도 매인 데 없이 맑다. 달달하거나 농밀하지도 않다. 맹물같이 .. 발표작 2021.05.01
열애 중/황진숙 열애 중/황진숙 엊저녁에는 새벽 3시까지 같이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이불 속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그를 말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필시 내일 다크서클이 턱 밑에까지 내려와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 들어 그의 앙탈이 늘었다. 당신 체면이 있지, 왜 이리 야단이냐고 짜증을 부려도 나밖에 없다며 속닥거린다. 한 옥타브 올려 다그쳐도 끔벅끔벅 앉아 있기만 하니 되레 미안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행복에 겨운 소리라고. 물론, 일 년에 한 번 은하수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우리는 행복일 수 있다. 번잡스러운 하루에 지쳤거나 관계가 주는 피로에 우울이 바닥을 치면 슬며시 그가 내 옆으로 온다. 모과 향기 그득한 .. 발표작 2021.05.01
숯2/황진숙 숯2/황 진 숙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 발표작 2021.05.01
숯/황진숙 숯/황진숙 짙은 녹음의 싱그러움도 없다. 타는 듯 붉은 낙엽의 열정도 없다. 꽃숭어리의 향기로움은 더더욱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묵직함이 있다. 운명을 절감한 생생함이 있다. 온 세상을 품은 담대함이다. 질박한 옹기 수반 위에 우뚝 서 있는 숯. 그의 자태는 현란한 언어보다 내재돼 있는 언어의 표현으로 완성된다. 제 살이 잘려 나간 아픔이여서일까. 절단된 단면 위로 내비치는 깜장의 숨결이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태고시절 나무들의 어우러지는 소리가 벌어진 결 사이로 들려온다.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산천초목의 화음을 들으며 나날이 무르익어가는 미래를 꿈꿨을 참나무의 소망. 평범한 나이테를 가지고 무탈한 생의 소원을 빌었을 나무들의 노래. 불시에 가마에 들어가 숯의 운명이 된 그는 앵돌아진 맘을 자신의 .. 발표작 2021.05.01
풀무/황진숙 풀무/황 진 숙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 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으로 가려.. 발표작 2021.05.01
구두/조일희 구두 조일희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한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 좋은 수필 2021.05.01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나도 더러는 질펀하게 무너지고 싶다 윤영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건 오전 10시쯤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여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구룡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조개를 잡고 볼락회에 소주 한잔 마시다 죽은 듯 자야겠다고 먹은 마음을 포기하기에는 마음한테 미안해졌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여행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이판사판으로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며 나는 도시락을 싸고 남편은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는 일이잖은가. 호미곶을 지나 구룡포항에 닿을 즈음이면 파도가 지쳐 있을 거라는 희망은 출발할 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파도는 천년 묵은 한을 토해 해안반도 둘레길을 덮쳤다. 긴 목덜미를 자랑하듯 제철소 수십만 개의 불.. 좋은 수필 2021.05.01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다산 정약용(丁若鏞)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온 집안에 가득 차고, 바글바글 번식하여 산이나 골이나 쉬파리로 득실거렸다. 높다란 누각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 않더니, 술집과 떡집에 구름처럼 몰려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 하고, 소년들은 떨쳐 일어나 한바탕 때려잡을 궁리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 통발을 놓아서 거기에 걸려 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파리약을 놓아서 그 약 기운에 어질어질할 때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는 말했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구한 삶이었던가?.. 좋은 수필 2021.05.01
신문/유종인 신문 신문 ―유종인(1968∼ )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 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대보는.. 좋은 시 2021.05.01
집/박시윤 집 박 시 윤 결혼한 동창이 집들이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친구는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늦은 결혼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명 상표의 혼수들로 속을 꽉 채운 집은 보기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시댁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의 달콤한 신혼 자랑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했다. 환한 달빛이 앞을 비춰 줄 것이라는 생각과 늦은 밤 남편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쥐죽은 듯 고요한 공기가 나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늦은 귀가에 면죄 받지 못할 죄인처럼 뒤꿈치를 .. 좋은 수필 2021.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