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81

외도의 추억/최민자

​ ​ ​ ​ ​ 외도의 추억/최 민 자 ​ ​시詩도 공산품이라는 사실을 제작공정을 보고서야 알았다. 문화센터 한구석 큼큼한 가내공장에서 숙련된 도제와 견습공들이 시의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누군가 앙상한 시의 뼈대를 내밀었다. 곰 인형이나 조각보를 마름하듯 깁고 꿰매고 잘라 내고 덧붙이며 간간이 웃음과 농담도 섞으며 정성스레 매만지는 손길들이 골똘하고 따스했다. 시는 머릿속에서 튕겨 나오는 게 아니고 몸속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손끝으로 감실감실 새어 나오거나 앞 문장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절름절름 걸어 나오는 거라고, 스티치 위에 인두질을 하고 반짝이 가루를 도포하던 장인匠人이 말했다. 얼추 완성된 시제품 위에 그가 냉큼 새 라벨을 붙인다. 털도 안 뽑힌 살덩어리에서 비계를 발라내고 근육과 뼈가 ..

좋은 수필 2021.05.03

육탁/배한봉

육탁/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

좋은 시 2021.05.03

슬리퍼/이재무

슬리퍼/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재무 시집 중에서

좋은 시 2021.05.03

초록에 들다/황진숙

초록에 들다/황 진 숙 더는 갈 수 없고 더 이상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목을 끌어 압도하지도 뒤쳐져 순종하지도 않는다. 황과 청의 따스함과 차가움을 동등하게 품어 온화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미완을 완성시키고 충만에 도달하는 색, 초록이다. 바닥을 기는 이끼에서부터 치솟은 나무의 잎사귀까지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에서 숲이 되고 편안한 보법을 위해 잔디가 되어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비상구의 불빛이 되어준다. 사람의 몸에도 초록이 들어 있다. 푸른 혈액이라 불리는 엽록소는 인체에 들어와 혈색소를 만든다. 엽록소의 마그네슘이 철분으로 바뀌어 혈액이 된다. 온몸을 돌고 돌게 만드는 귀한 색이 초록이다. 초록을 거닐다 보면 고요해져 마음이 열린다. 수피를 뚫고 나오는 새순의 연..

발표작 2021.05.02

조피볼락/황진숙

조피볼락/황진숙 고동치는 심장으로 튀어 올라 허공을 후려칠 기세다. 날카롭게 세워진 등지느러미에 찔린 듯 아려온다. 부릅뜬 눈은 소멸한 시간을 타고 되돌아온 듯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어탁이 되어 쏟아내는 어기찬 기운이 액자가 걸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꺼운 입술과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우직한 영혼이 내 안을 들이민다. 조피볼락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다. 갈치의 은빛처럼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아귀나 물메기처럼 못생김의 끝판왕은 아니고 쑤기미와 삼세기보단 준수하다. 우럭 똥새기 우레기라 불리는 촌스러운 별칭이 생김새를 낮잡아 보이게까지 한다. 수박 향이 감도는 은어의 귀티나 가슴지느러미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날치의 영민함에 비해 내세울 게 없다. 닮은꼴로 통하는 꺽지가 수시..

발표작 2021.05.02

참을인(忍) 자의 비밀

참을인(忍) 자의 비밀 참을 인(忍)자는 칼날 인(刃)자 밑에 마음심(心)자가 놓여있습니다. 이대로 참을 인(忍)자를 해석하자면 가슴에 칼을 얹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시퍼런 칼이 내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가슴 위에 놓인 칼에 찔릴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누가 와서 짜증나게 건드린다고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움직여봤자 나만 상하게 됩니다. 화나는 일이 생겨도, 감정이 밀어닥쳐도 죽은 듯이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렇듯 참을 인(忍)자는 참지 못하는 자에게 가장 먼저 피해가 일어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평정을 잘 유지할 줄 아는 것이 인내입니다. 참을 인(忍)자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

향기로운 글 2021.05.02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그것은 바람이었다/황진숙 천만년을 돌고 돌아 불어오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하늘빛 달빛 별빛에 부비고 구름을 덮으며 바람이 온다. 숲을 나는 새들의 날갯죽지에 붙어 산등성이를 에돌아 바위 위의 이끼를 훑는다. 개울가를 따라 찰방거리는 조약돌과 뒹굴고 나무구멍을 드나들며 저 너머 세상사를 실어 나른다. 물빛 젖은 몽돌에 스치고 갯벌에 엎드려 사는 식물을 들추며 파도를 넘나든다. 옹달샘의 탱자나무 가시에도, 넝쿨에 꿰어져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에도, 축담 한 켠의 청둥호박에도 바람이 파고든다. 기다리는 이에게 다가서고 흘러드는, 그것은 바람이었다. 들판에 핀 억새가 기대어 울 바람을 기다리듯, 바람꽃이 흔들리며 맞서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듯. 거미에게 거미줄을 날려줄 실바람이, 염부에게 소금꽃을 피워줄 갯바람..

발표작 2021.05.02

자코메티의 계절/문경희

자코메티의 계절 문경희 겨울 연밭은 폐사지 같다. 스산하다 못해 괴괴하다. 여며 싸고 친친 감아도 몸보다 마음이 체감하는 기온으로 뼈마디가 시려온다. 이따금 얼어붙은 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철새들의 따뜻한 인기척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 냉기를 견딜까. 대궁만 남은 연, 아니, 대궁조차도 말라 비틀어져 버린 연이 얼음 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중발레를 하듯 겅중겅중 허공을 찍고 있는 저 무념의 발자국들. 물을 딛고 서 있지만 그들의 몸에서 물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 곡기를 끊으시던 어머님처럼, 한 모금 물로 입을 다시는 일마저 부질없는 것일까. 어머님은 결국 인생의 겨울을 넘지 못하셨지만 저들은 분명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잠시 휴면기에 들었을 뿐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깡..

좋은 수필 2021.05.02

울릉도사람들 /박시윤

울릉도사람들 /박시윤 배가 돌아온다. 행남등대, 그 길고도 먼 불빛을 따라 멀리서, 저 멀리서 고운 물결 위에 출렁대며 돌아온다. 만선을 기다리는 섬어미의 바람처럼, 깜깜하게 어둠이 들어앉은 저동 어판장을 향해 섬아비들이 힘차게 내달린다. 밤새 바다에 기댄 시간, 아비의 배는 만선의 꿈을 이루었을까. 항을 향해 내달리는 아비들을 쫓아 어느새 새벽이 물러가고 해가 달려와 왈칵 업힌다. 이제 바다의 시간은 고스란히 바다에 남겨두어야 한다. 헐빈한 배가 못내 아쉬워, 바다에 더 머문다 한들 무엇을 얻을까. 오늘 욕심을 접을 줄 알아야 내일 희망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섬아비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 아비는 밤새 바다가 내어준 것들을 상자 째 어판장 바닥에 내어놓는다. 경매가 붙을 것은 크기별로 분류되었고, 활어..

좋은 수필 2021.05.02

항아리 / 조현미

항아리 / 조현미 소나기가 그었다. 빗물이 일필휘지한 뒤란 풍경은 동적動的이다. 옥수수 잎이, 호박 넝쿨이, 흰 보라 도라지꽃이 빗물체로 살아 꿈틀거린다. 갓 목욕을 마친 장독들의 때깔도 육덕지다. 반지레하지만 두루뭉술한 태가 꼭 촌부의 뒷모습 같아 관능과는 멀면서도 볼수록 정이 간다.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가리가 좁고 배는 불룩한 데다 굽도 없는 항아리들이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꼭 닮은 탓이다. 얼굴의 윤곽은 철저하게 무시한 반면 가슴과 배, 엉덩이는 지나칠 정도로 풍만한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란다. 크기에 관계없이 펑퍼짐한 복부가 영락없는 여성상의 추상이다. 당시의 크로마뇽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항아리 형태의 몸매는 다산의 기원을..

좋은 수필 2021.05.02

바퀴/장미숙

바퀴/장미숙 자전거가 푹 주저앉아 버렸다. 공사현장 옆 도로를 구르고 난 뒤였다. 뒷바퀴 타이어에서 쉭쉭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자전거가 묵직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땅을 숫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날카로운 뭔가 바퀴에 구멍을 낸 게 분명했다. 타이어는 벌써 바람이 다 빠져 버렸는지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굴러갈 때는 한없이 가볍던 바퀴가 끌고 가려니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수리점 아저씨는 손쉽게 자전거에서 바퀴를 분리했다. 바퀴가 분리되자 자전거는 순간 기능을 잃고 기우뚱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바퀴를 보고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아따, 요놈도 엔간히 힘들게 살아왔네. 너덜너덜한 게 어지간히 굴러 다녔는갑소. 웬만하면..

좋은 수필 2021.05.02

소금/김원순

소금 / 김원순 간수가 모조리 빠져나간 소금자루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언젠가 세면장 바닥을 바르고 남은 시멘트 포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처럼. 국산 천일염 100%라고 쓰인 붉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것이 소금자루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며가며 나는, 바윗덩이 같은 소금자루를 발로 툭툭 차거나 옆구리를 쿡쿡 쑤시곤 한다. 조금씩 부숴 놓아야지 배추나 생선을 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틈 하나 없이 엉겨붙은 소금들이 은근히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바닷물에 여태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소금처럼 한데 엉겨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 삶의 간수들이 나를 가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대했던 일이며, 남의 불행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

좋은 수필 2021.05.02

감/황진숙

감/황 진 숙 어둠을 드리운 장막을 들춘다. 음습한 기운이 끼쳐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지 못한 억울함에 신열로 들끓고 있는 걸까. 떫은 맛 뱉어낼 때까지 아무도 건져주지 않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좌정한 독 안에 들어앉아 밑바닥의 시간을 세고 있는 감이 있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잎사귀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다. 낮달과 밤달 아래 한 줌의 볕살 들이고 한 모숨의 바람 모아둔 몸이다. 시푸르뎅뎅할 때부터 주황빛 물들 때까지 온몸으로 껴안고 있던 탄닌이었다. 다녀간 천둥과 번개로 속에서 불길이 일고 후려치는 소낙비에 두들겨 맞을 때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던 억센 기운이었다. 떫은맛 빼자고 소금물에 몸을 담근 절박함이 까슬하다. 하루 분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침몰했지만 해가 지는지 동이 트는지 알 ..

발표작 2021.05.02

케이크/황진숙

케이크/황진숙 초콜릿처럼 단단하게 코팅된 달콤함이 아니다. 흑당처럼 질척거리며 흘러내리는 달달함도 아니다.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단맛도 아니다. 한 스푼 한 조각으로도 겹겹이 쌓아 놓은 다디단 맛을 전한다. 바람을 타듯 폭신하게 넘어오는 감촉은 순하다. 보드라운 식감이 마음을 달뜨게 한다. 단조롭고 느슨한 일상을 감미롭게 끌어들인다. 크래커처럼 물기 없이 바삭거리는 날, 파이처럼 결 따라 부서지는 날엔 혀끝에서 녹는 생크림이 제격이다. 살포시 밀려드는 첫입이 마음을 달래준다. 행복에 감응하기 위해 고요한 섬 하나를 쌓기로 한다. 케이크는 켜를 쌓는 일이다. 시트와 생크림이 허물없이 층을 이루고 토핑이 얹어지는 앙상블이다. 아다지오의 선율로 부드럽게 어우러지지만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다..

발표작 2021.05.02

칼날/황진숙

칼날/황진숙 칼날은 자신의 날카로움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오직 날을 쥐고 있는 자이다. 날은 자신의 호흡을 따르지 않는 휘두름에 가차 없이 생채기를 낸다. 어눌한 손놀림에 베인 상처를 붙잡고 쓰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날의 냉정함을 깨닫곤 한다. 차가운 감촉, 부러지지 않는 냉철함, 섬뜩하리만치 내리쳐대는 휘두름. 칼날로 말할 것 같으면 비정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날은 늘 서 있어야만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갈고 닦아 날을 세워놔야 한다. 내비치는 은빛 아우라가 있어야 세상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건 가면을 쓴 칼날의 모습이다. 숨겨진 모습은 온통 허점투성이다. 그리도 빛나는 날로 제 모습을 무장했지만 날은 홀로 설 수 없다는 치명적..

발표작 2021.05.02

돌절구/황진숙

돌절구/황진숙 달빛이 들어온다. 동그랗게 모아진 빛이 온 우주의 기운을 담은 듯 고아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수천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기물의 자취가 시간을 물들인다. 달빛에 풍덩 빠진 집게벌레만이 고즈넉한 여운에 잠긴다. 장독대 옆에서 긴 세월을 이고 앉은 돌절구. 포효하며 요동치는 암장의 담금질로 얻은 돌의 단단함 때문인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고행을 통해 얻은 태초의 생명력이어서일까. 과거와 현재를 품고 미래를 이어가는 돌의 영속성이 절구의 침묵을 깨운다. 불어오는 명주바람에 노구의 심장소리가 실린다. 구슬땀을 흘리며 돌을 쪼아대던 이름 모를 석수장이의 숨소리도 들려온다. 억겁의 세월을 새긴 채 잠들어 있던 화강석은 석공의 발자국 소리에 눈을 뜬다. 땅 속에 파묻혀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무한한 ..

발표작 2021.05.02

볍씨/황진숙

볍씨/황진숙 한 톨의 낟알이 숨을 고르고 있다. 수천 년이 응축된 깊고 고요한 숨이다. 숨 속에서 담지된 여러 겹의 시간이 허공을 감싸며 일렁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난 탓일까. 묵연한 자태가 풀어놓은 절대고요에 사방이 말간 빛깔로 물들어간다. 저토록 작디작은 몸 안에 생명을 궁굴려 문명을 잉태했다니. 거친 수피를 몸에 두른 것도 아니고 질긴 뿌리도 없이 세상을 읽어낸 씨앗의 몸짓이 담담하다. 타원체에 깃든 볍씨의 생명살이가 웅숭깊기만 하다. 씨앗의 희망을 찾아 나선 길이다. 신석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고양가와지볍씨 박물관이다. 오천 년 전에 태동한 볍씨의 체온이 살아 있는 곳. 가녀린 껍질에 햇살과 바람의 숨을 들여 맥박을 일으킨 알곡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영혼 가진 모든 이에게 충만함을 주..

발표작 2021.05.02

옷핀/황진숙

옷핀/황진숙 청빈한 빈자다. 덮개 하나 둘러쓰고 처처를 유랑한다. 바깥세상에서 득세하는 실과 바늘을 비껴나다 보니 거처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잡동사니 가득한 서랍에 세 들어 살거나 토굴같이 캄캄한 곳에 칩거한다. 머지않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들과 엉켜 굴러다니기도 한다. 곁방살이라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외따로이 있다 보니 겹겹이 쌓아놓은 클립이나 압정 무더기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삼베 홑청처럼 가벼워 기억의 회로에서 곧잘 이탈한다. 세상사에 무심하게 돌아앉아 있는 옷핀이 초연하다. 실과 바늘처럼 이룰 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추와 단춧구멍처럼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색찬란하게 피워낼 꽃도 야무지게 잠가놓을 한 자락 꿈도 없다. 걸쇠에 눌러둔 침으로 흐트러진 세상을 평정한다. 엿..

발표작 2021.05.02

옹기시루/황진숙

옹기 시루/황 진 숙 저라고 그리 생긴 게 좋기나 할까. 편평한 바닥과 넓은 아가리로 마냥 품고 싶었겠지. 동이 안의 물이 탐이 나 빗물을 받아 보기도 하였다. 가둬 둘 새 없이 빠져 나가버리는 물이 허허로웠다. 가려주는 뚜껑 없이 구멍 난 바닥은 매나니의 삶이었다. 장독처럼 맛을 품는 건 언강생심이다. 술을 담아 논과 밭을 돌며 유유자적하는 자라병이 부럽기도 했을 터이다. 등에 업혀 다니는 허벅의 팔자는 단연 상팔자다. 여인네의 손길로 말간 얼굴을 되찾는 항아리를 바라만 봐야 했다. 함치르르 윤기 흐르는 단지들의 진열로 시루는 댕그라니 구석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장독대에 옹기 시루가 하나 있다. 땅을 향해 엎어져서 붙박이가 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시루에는 가랑잎과 거미줄이 한가로이 바람을 타..

발표작 2021.05.02

감자/황진숙

감자 /황 진 숙 빗줄기가 긋고 간 뒤란은 흥성스럽다. 넝쿨에 매달린 호박에 살이 오르고 발밑에 달개비와 제비꽃의 수다가 왁자하다. 한나절 한가했던 감나무는 빗물을 한 움큼 떨구며 기지개를 켠다. 불어오는 바람은 작달비가 뿌리고 간 내음을 코끝에 묻혀 놓고 달아난다. 풀냄새, 이끼냄새, 흙냄새가 뒤뜰을 들썩거리며 생동한다. 삽상한 기운과 달리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물가 한 쪽 구석에 있는 항아리가 눈에 뜬다. 해마다 하지 끝에 어머니가 녹말을 길어 올리기 위해 감자들을 모아놓은 독이다. 수확한 감자들 중에 불량감자를 골라 썩히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는 무엇이든 버리는 법이 없다. 호미 날에 찍힌 감자, 굼벵이가 파먹은 감자, 빗물에 옆구리가 곯은 감자, 돌에 치여 찌그러진..

발표작 202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