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여인숙 / 김영식
여인숙이 많은 시절을 건너왔다. 지금은 여관이나 모텔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내가 살던 항구도시에는 여인숙이 즐비했다. 삶에 대해 고뇌하던 이십대의 한때 외딴 바닷가 여인숙에 잠시 투숙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삶에 대해 진지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시간을 떠올리며 쓴 시가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인 `소라 여인숙'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여인숙에 한 번도 들지 못한 사람과는 生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채송화며 봉선화 핀 마당을 지날 때면 발자국마다 따라오던 둥근 파도 소리. 등 굽은 여주인이 시큰둥하게 내미는 숙박계에 세상에 없는 주소를 꾹꾹 눌러 적을 땐 낡은 페이지마다 푸드득! 수천 마리 괭이부리갈매기떼가 날아올랐다.
삐걱거리며 노 젓는 소릴 내던 목조 계단과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만조의 바다와 가끔씩 베니어합판 두른 건너편 방에서 새어 나오던 낮은 흐느낌. 방파제 쪽에선 이제 막 뱃길을 부려놓은 어부들이 돌아오고. 타지에서 온 선원들이며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를 기대고 앉았을 바람벽엔 참방참방 숭어떼 같은 얼룩들이 헤엄쳐 가곤 했다. 그때쯤이면 어스름의 갈피로 뱃고동 소리가 길고 짧게 밀려오기도 했던가?
소라는 집을 등에 지고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이동한다. 누군들 집을 짊어지지 않은 생이 있으랴! 여인숙에 누우면 우린 모두 삶이라는 집을 지고 사막 같은 바위 위를 걸어가는 긴 발가락 집게가 되는 것이다. 내일은 또 이 고단한 상처를 들고 어느 심해를 건너가야 하는 것일까? 두려움과 불안함을 베고 잠든 머리맡에 내려와 토닥토닥 젖은 어깰 두드려주던 달빛.
여인숙은 실재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우린 삶의 어느 순간에 잠시 캄캄하게 머물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통과의례로서의 또 다른 이름의 여인숙일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쓸쓸하고 고독한 여인숙에 한 번쯤 투숙하지 않은 사람이 또 누가 있으랴! 여인숙은 그러므로 절망이면서 희망이고 불화이면서 화해이고 저녁이면서 다시 눈부신 아침인 것이다. 홑이불 같은 수평선을 당겨 방황하던 내 스무 몇 살의 시린 발을 포근히 덮어주던 그 여인숙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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