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 김영식
바람을 독법 하는 저 수직의 삶이라니. 표표한 공중의 벼랑에 뜨거운 심장을 걸어놓고 제 삶의 중심을 응시하는 고독한 아나키스트. 거인처럼 우뚝 솟아 수평선 너머를 예지하는 수도승의 모습으로.
바람의 시원始原이자 바람의 완결자인 그는 바람이 머무는 육체이자 바람의 정신을 이루는 뇌다. 찰나 속에서 영원을 꿈꾸며 영원 속에서 찰나를 완성하는 은둔의 철학자이다.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과 강하고 약함과 생성과 소멸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시간의 아메바다.
빛나는 비굴절의 이마를 가진 그는 한 번도 삶을 등지거나 회피하거나 우회한 적이 없다. 직립의 우직함은 언제나 정공법을 선택한다. 변화지향주의자인 구름은 그런 그를 보고 평면적이라거나 비타협적이라며 비판하지만 그건 천성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제 자신에 대해 혹은 타인에 대해 일평생 정직함을 견지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세상의 모든 바람은 그를 통과한다. 그때 그는 바람의 스펙트럼이다. 천차만별인 바람의 표정들, 갈바람, 건들바람, 고추바람, 날파람, 높새바람, 도리깨바람, 마파람, 소소리바람, 윗바람, 흘레바람…….
바람은 비로소 그에게 도착하여 의미를 발견하고 그를 떠나면서 존재를 획득한다. 그때 풍차는 바람을 담금질하는 모루, 불후의 연금술사이다. 가끔씩 그의 벼랑에서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해변 위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바다쇠오리의 날갯짓에 섞여, 그럴 때 그는 정말 한 마리 새가 되어 허공을 날아간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저어 태양의 흑점까지 솟아오르는 이카로스의 비상. 부조리한 빛들이 어둠의 세력들이 그를 추락케 할지라도 불면의 산맥을 넘어, 은하를 넘어, 낡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는 그런 그를 망각할 때가 많다. 바람이라는 외형 때문에 정작 중요한 내면을 간과하기 때문이리라. 사실 바람만큼 변화무쌍한 것이 있겠는가. 바람은 조급하며, 조삼모사하고 표리부동하며 불규칙하고 태생적으로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 바람을 위한 풍차의 고단하고도 부단한 치풍治風.
지금은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황량한 들녘의 시간. 바람을 견디는 불멸 하나 호주머니에 넣고 걸어간다. 바람 때문에 흔들리지 않기, 바람 때문에 절망하지 않기, 바람 때문에 무릎 꿇지 않기, 오직 풍차의 이름으로.
오늘도 풍차는 불굴의 자세로 심해를 바라보고 있다. 억새 휘날리는 언덕위에서 그가 기다리는 단 하나의 풍경이란 피골상접한 말을 타고 무딘 창을 꼬나 잡고, “자, 가자! 나의 로시난테여!” 쉰 목소리로, 녹슨 갑옷을 철렁거리며 그를 향해 덤벼들던 눈빛 형형한 어느 기사의 기억. 이젠 아무도 풍차를 향해 달려들지 않는 세기의 나약한 슬픔을 견디며 조금은 쓸쓸하게.
*이카로스(그리스어: Ἴκαρος) 또는 이카루스(라틴어, 영어: Icaru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이달로스 아들이다. 아버지가 만든 날개를 달고 크레타 섬을 탈출할 때 떨어져 죽었다.
*로시난테(ROCINANTE)- 돈키호테가 타던 말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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