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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오막살이 집 한 채 / 김정화

에세이향기 2021. 9. 21. 22:43

오막살이 집 한 채 / 김정화
 


올 여름. 나는 뜻밖의 횡재를 했다. 늘상 마음 속으로만 갈망해 왔던 오막살이 집 한 채를 갖게 된 것이다. 마당 앞으론 청계류가 흐르고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그림 같은 집이다. 지붕 위에 크고 작은 박들이 소담하게 열려 있고, 장독대엔 올망졸망 항아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는 풍광은, 오매불망 꿈속에서 그리워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정지문이 열리면서 하얀 무명베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가 함지박 가득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옥수수를 담아 들고 나올 것만 같고, 갓 바른 탱글탱글한 창지문을 열고 하얀 수염의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가 봉당으로 내려설 것도 같았다. 아니 까마득한 내 유년이 거기 냇물 속에, 장독대에, 창호문에 그대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는 집 앞으론 냇물이 흐르고, 집 뒤로는 작은 오솔길이 있어 언제든지 숲과 만날 수 있는 언덕 위에 있었다. 철따라 풀꽃향기 방창하고 풀벌레소리 요란하였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냇물소리가 높아지고, 양지쪽에 객사리풀이 돋기 시작하면서부턴 각시풀 만지기에 해지는 줄 몰랐다. 어른들의 살림살이야 땀범벅 눈물범벅이든 말든, 눈만 뜨면 산으로 냇가로 쏘다니기에 하루해가 짧기만 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뒷산으로 뚫린 오솔길 양켠에 피고 지던 망초꽃, 달맞이꽃, 오랑캐꽃, 노고초, 산붓꽃, 취란화, 메꽃들이 군락을 이룬 환상적인 모습. 그리고 엄마 등 뒤에서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
뿐이었던가? 석양녘 엄마를 기다리며 바라보았던 주홍빛 노을,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모습들은 까닭도 모르는 울먹임이었고, 내 영혼 너무도 깊숙이 들어앉은 핏빛 그리움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 외가에 대한 향수는 오막살이 집 한 채를 갖고 싶어하는 소박한 소망으로 내 가슴에 자리를 잡아갔다. 한때는 그 소망이 너무도 간절하여 복부인 누명을 써 가면서까지 그런 곳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꿈이 얼마나 내게 실현 불가능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그 꿈을 가슴 깊이 접어둔 채 꿈결에서 그리운 이 만나보듯 그렇게 만나볼 수 밖에 없는 지난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어느 고마운 벗의 마음씀으로 오막살이 집 한 채를 갖게 된 것이다. 살인적인 더위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식구들에게 이 선물은 커다란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반 평의 반도 채 못되는 오막살이 주위에 모여 히히낙락 웃고 떠들었다.

냇물에 수초도 사다 넣고 금붕어도 기르자는 막내의 의견에, 냇물에 무슨 금붕어냐며, 다슬기나 가재, 피라미를 길러야 한다는 딸아이의 좀은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뭣 본 김에 뭐하더라고 물레방아 본 김에 좀 더 시원하게 분수를 장치하자고 제의했다가, 아이들에게 백치 취급만 당했다. 도대체 물레방아와 분수가 어떻게 한 자리할 수 있냐며, 엄마의 감각기관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아이들이 제 방으로 돌아간 후, 갓 푸세한 삼베 이불 한 자락 깔고 돗자리 위에 누워서 쉬임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에 실려 끝없는 상상의 미궁으로 빠져들어 갔다. 만추의 보름달이 뒷동산에 두둥실 떠오르면 이내 초가지붕 위에 쏟아져 내릴 달빛 폭포수. 만삭이 된 박덩이가 마지막 씨앗을 익히느라 뜬밤 새우고, 뒤늦게 부랴부랴 꽃피운 하얀 박꽃이 눈부신 달빛에 더욱 하얗게 가슴을 태우는 밤. 이런 밤에 주인인들 어찌 깊은 잠에 빠질쏘냐. 방안 가득 출렁이는 달빛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문갑 어느 한켠을 지키고 있을 대물림 퉁소 찾아 한 손에 들고 가만히 창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내려서면, 아낌없이 온몸으로 내리비치는 달빛 세례.

하늘에도 달, 냇물 속에도 달, 지붕 위에도, 장독대에도, 물레방앗간에도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의 정취에 취해, 이백이나 두보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시 한수 읊음직하고, 퉁소의 대가가 아닐지라도 한 곡조 멋지게 불어 댈 것이니. 무산의 옥퉁소가 아닐지라도, 만파식적의 피리소리가 아닐지언정 달빛과 어우러진 퉁소 소리는 선계까지도 감동시킬 것이다.

아! 저기 천상의 선녀들이 춤을 추는구나. 그리고 선녀들에 둘러 싸여 춤을 추는 이. 오! 내 할머니… 내게 초원의 꿈을 주시고 대지에의 향수를 심어 주신 이. 그분을 꿈길에서나마 만나 뵌 걸 보니, 서너 뼘 남짓한 오막살집 한 채가, 오랫동안 고이고이 접어 둔 그리움의 물꼬를 트게 했나 보다.

어쩌면 이제는 종이 위에 무수히 그렸다 지워버린 그 꿈을 펼쳐도 좋을 때가 가까워왔는지도 모른다. 내 꿈을 포기해야했던 첫 번째 걸림돌이었던 아이들도 이제 거의 장성했고, 세상살이에 지친 내 영혼이 귀거래사를 쉬임없이 읊조리는 것을 보더라도. 촬촬촬, 쉬임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를 들으며 이 저녁부터 나는 또 오막살이의 꿈에 부풀 것이다.

언덕배기에 무명초 비단결처럼 나부끼고, 봄이면 이름 모를 풀꽃들 다투어 피어나는, 어느 산모롱이 물 좋은 산마을의 오막살이집 한 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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