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의 계절이 돌아왔다/김정화
일 년을 기다렸다가 먹는 과일이 있다. 딸기의 계절을 거쳐 수박과 포도의 배릿함을 가로지르고 오는 어질어질한 향이다. 풋여름 노을빛을 닮은 색, 한 입 베어 물면 코끝이 찌릿하고 눈허리가 시어온다. 그 과육은 혹독했던 입덧의 기억까지 소환시키는 힘을 지녔다. 자두의 계절이 왔다.우리나라 자두는 유월 중순이면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해마다 달력의 하짓날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첫 자두인 대석 자두를 기다린다. 대석 자두는 알이 작고 딴딴한데 아삭하고 새콤달콤하여 내겐 이것이 진정한 자두의 맛이다. 하지만 출하 시기가 짧아 때를 놓쳐버리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첫 자두 맛을 넘기면 속살이 연한 후무사 자두가 입을 즐겁게 해 준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때쯤 시장에 가면 자두가 종류별로 나온다. 겉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과 겉은 벌겋고 속이 노란 것, 겉도 속도 시뻘건 살덩이 같은 과육들이 허연 분을 바르고 물감을 잔뜩 덮어쓴 것같이 소쿠리 위에 앉아 있다. 이 풍경을 상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심지어 먹기도 전에 자두의 계절이 후다닥 지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그러나 추석 즈음 수확하는 추희 자두를 떠올리고는 한시름 놓는다.내가 어릴 때는 자두를 풍개라 부르며 깨물고 다녔다. 사과나 복숭아보다 맛이 박하고 모양이 작아 한낱 재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에추’라고도 불렀다. 그때만 해도 경상도 사람들은 개량 자두와 토종 풍개를 다른 품종으로 쳤다. 감과 고욤의 차이처럼 서양에서 건너온 사과와 아시아 종인 능금처럼 구분하였다. 내친김에 자두의 사투리를 찾아보니 서른 개도 넘는다. 충청도에서는 ‘옹애’라 하고 강릉에서는 ‘꽤’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며 ‘추리’라는 이름도 남아 있다. 그러니 노인들이 자두를 무어라 하는지 들어 보면 고향이 짐작될 정도이다.무위자연을 주창한 노자는 자두나무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춘향전에서는 이도령 어머니가 자두꽃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고 나온다. 평생 자두만 그려서 자두 화가라는 별호가 붙은 화백의 그림을 본 적도 있다. 문인들도 앞다투어 자두 예찬을 한다. 앙드레 지드는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수 있는 것이 작가적 재능이라 일렀으며 김훈 소설가는 자두의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고 탄복했다. ‘자두나무 정거장’을 쓴 시인과 ‘슬픔을 맛본 사람만이 자두 맛을 안다’고 쓴 작가도 자두의 계절에는 뉘 못지않게 행복할 것이리라.자두는 한자리에 앉아 입술에 자두색이 배고 양손에 단물이 흐르도록 먹어야 한다. 자두를 한 바가지 먹은 날은 자두 향 바람이 일고 자둣빛 석양이 내려 세상이 붉게 물든다. 자두를 먹으면서 자두꽃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한때는 나라의 주인 꽃이었다. 자두가 오얏나무 열매이니 오얏꽃이라고도 불리며 한자로는 이화(李花)라고 쓴다. 옛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에 등장하는 배꽃 이화(梨花)와는 다르다. 조선 왕실의 성씨가 자두 이씨였으므로 자두꽃이 왕실의 문장화로 쓰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이화 문양이 사라졌듯이 표준어에 밀려 오얏과 풍개라는 이름도 자취를 감춰 간다. 그러기에 자두가 익을 때 도시락을 싸서 자두밭으로 소풍 간다는 이웃 나라의 풍속이 더욱 부럽기만 하다.한 자루의 자두를 매달고도 의연했던 나무. 푸른 그늘을 뿜어내던 꽃자리에서 이리도 달큼한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한다. 부드러운 살 속에 박힌 단단한 씨앗을 경배한다. 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인간은 꽃과 열매를 소중히 여기지만 나무는 뿌리나 줄기를 귀히 여길 것이다. 스스로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버리기도 하지만 꽃 필 자리를 마련해 두는 일도 나무는 잊지 않는다. 때로는 한 그루 나무가 훌륭한 스승이 되기도 한다.
올해도 무당벌레와 사마귀와 거미를 함께 키운다는 자두원 농부가 택배를 보내왔다. 물기를 털어낸 붉은 열매를 와짝 깨문다. 온몸을 몸서리치게 하는 맛이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은 있는 법. 자두 맛같이 짜릿한 순간은 이제 다 지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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