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1891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곽재구(1954 - )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

좋은 시 2022.01.26

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 허정진

시래기, 정(情)을 살찌우다 / 허정진 소 눈망울같이 순한 집들이 옹기종기 하얀 눈을 덮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수묵 깊은 처마 아래 무청 시래기가 익어간다. 겨우내 얼고 녹고, 정한(情恨)도 맺고 풀며 달빛 향기 층층이 내려앉는다. 고드름에 숙성하고 된바람에 건조한다. 털어내야 가벼워진다지, 제 욕심 비워낸 자리마다 푸른 숨결 영혼으로 살찐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서걱거리는 속살에 “댕그랑” 풍경소리가 들릴 것 같다. 무서리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불어오면 처마 밑이 분주해진다. 드높은 가을하늘 아래 푸르게 자란 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무를 수확하고 나면 그 줄기와 이파리가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시간이다. 굴비 두름처럼 볏짚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 줄줄이 매달아 놓으면 보는 것만으로..

좋은 수필 2022.01.26

저녁이면 돌들이/박소란

저녁이면 돌들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30〉 저녁이면 돌들이/서로를 품고 잤다 저만큼/굴러 나가면/그림자가 그림자를 이어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게 아니었다 간혹,/조그맣게 슬픔을 밀고 나온/어린 돌의 이마가 펄펄 끓었다 잘 마르지 않는 눈빛과/탱자나무 소식은 묻지 않기로 했다 ―박미란(1964∼)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첫 구절만으로도 이 시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맛집에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법이다. 저녁에 서로를 품고 자는 돌들이라니. 이 말을 들은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본 듯도 하다. 사실 우리는 저 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궁금하면 어두운 밤중에 깨어 있으면 된다. 피곤에 찌든 남편은 방구석에서 이를..

좋은 시 2022.01.25

박소란시모음 20편

박소란시모음 20편 《1》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 《2》 고장 ..

좋은 시 2022.01.24

골무/이어령

골무/이어령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쟁터에..

좋은 수필 2022.01.24

밥/강윤수

밥/강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神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이고, 도무지 그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삶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이 구원인 인류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몹시 위태하였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우리 집 살림을 거덜내고 말았다. 적빈이 된 것이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 '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그 말 속에는 절망하지 말고, 잘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환란을 피해 나는 가족에게 가족은 나에게 그저..

좋은 수필 2022.01.24

달의 등 / 박월수

달의 등 / 박월수 내가 사는 곳은 대구의 서쪽 끝이다. 달의 등을 뜻하는 이곳을 태어나고 지금껏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유년의 기억 속에 달의 등은 조용한 소읍이었다. 나지막한 집들과 너른 들을 둘러친 앞산 줄기가 전부였다. 밤이 되면 앞산 마루에 뜬 달이 평평하게 생긴 소읍을 고루 비추었다. 달의 등짝처럼 펑퍼짐한 마을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디서부터 인사할 채비를 해야 할 지 항상 헛갈렸다. 거치적거릴 것 없이 훤하다는 것이 주는 불편함은 늘 같은 곳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앞 서 걷는 이의 뒤통수가 눈에 익은 사람이면 숫기 없는 나는 가던 걸음을 늦추어야 했다. 그 속에서 자라던 유년을 떠올리면 항상 아버지가 있다. 내가 아홉 살이 될 무렵 날마다 조금씩 허리가 한 쪽으로 기울었다. 자..

좋은 수필 2022.01.24

그늘 제조법/전영관

그늘 제조법 외 4편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

좋은 시 2022.01.22

먹물/박후기

먹물/박후기 먹물을 품고 사는 건, 문어나 낙지나 오징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오징어나 문어는 놀라거나 성이 나면 먹물을 뿜는데, 이는 포식자의 시야를 가리는 연막 효과는 물론이고 포식자의 후각이나 미각 등 전반적인 감각기능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먹물 쓰임새는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 현실에서 먹물은 아주 비열하게 쓰인다. 흔히 공부깨나 한 사람을 보고 먹물 좀 먹었다는 말로 빗대곤 한다. 가방끈이 길다는 말과도 한통속인데, 먹물 좀 먹은 것과 끈이 긴 것으로 치자면 바다에 사는 문어나 낙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먹물 티를 내고 가방끈을 논하는, 이른바 ‘끈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

좋은 수필 2022.01.22

이어폰/이원

이어폰/이원 이어폰, 귀는 열리고 입은 닫히는 순간 여기가 좋다. 안도 밖도 아닌. 두 개인 것이 좋다. 귀가 두 개인 것과는 무관하게. 밖에서 보자면 양쪽 귀를 막는 것이고, 안에서 보자면 어떤 세계가 계속 도착하는 것. 입이 아닌 귀에 관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입은 너무 많이 말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미소를 짓고 있다 해도 왜 말은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느냐고 한다. 입은 말을 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기관이기도 한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입을 닫는다. 세계는, 입은 닫히고 귀가 열릴 때 시작되는 곳은 아닐까. 입이 닫히면 귀가 열리고, 귀가 열리면 눈도 열린다. 비로소 들리고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

좋은 수필 2022.01.22

쌍둥이칼/김경후

쌍둥이칼/김경후 아줌마들이 쌍둥이칼이라 부르는 칼이 있다. 원래 이름이 헨켈이고, 독특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정보는 아무 소용 없다. 태양은 하루 한 번 뜨지만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다. 끼니 사이사이엔 간식을, 그리고 달이 뜬 후엔 야식을 먹는다. 쌍둥이칼이든 쌍칼이든 일단 들고 썰고 자르고 다져야 한다. 끼니는 가끔 거를 수 있지만 끼니 만드는 걸 거르는 건 곤란하다. 곧 다음 끼니가 닥쳐온다. 다행스럽게도 난 음식을 맛있게 만들지 못한다. 자주 음식 만드는 걸 가족들이 말려준다. 하지만 내 쌍둥이칼을 들고 있는 시간을 난 정말 사랑한다(오해하지 말길, 다른 용도로 절대 쓰지 않는다. 칼 들고 부엌에서 조리만 한다). 내게 쌍둥이칼은 다락방이다. 숨어 있기 좋은 오두막이다.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

좋은 수필 2022.01.22

저울/장석남

저울/장석남 가끔 수영을 합네, 탁구를 합네 하며 몸뚱이를 움직인다. 살아온 내력을 몸에 고스란히 지닌 터라 중년이라고 불리면서부터, 그대로 두었다가는 몸이 주저앉을 판이라고 경고를 받은 바이다. 말년에 뭔 영화를 보겠다고 극성을 떠는 꼴 같아 구차스러운 맘 텁텁한데,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까닭을 헤아리니 또 한둘이 아니다. 이, 계속 늘어나는 생의 구속 사유들을 어쩔 것인가! 운동이랍시고 하고 나오면 샤워를 하고 저울에 올라간다. 눈금을 바라보면서 실망하기 일쑤다. 좀체 체중이 줄지 않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저울 옆에는 탈수기가 놓여 있다. 물 철철 흐르는 수영복 가지들을 그 안에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려놓은 다음 저울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내 털털거리면서 요동치는 탈수기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순간적..

좋은 수필 2022.01.22

봇짐/이현경

봇짐/이현경 노란 주전자에 새알 가득 들은 동지팥죽을 들고 열여덟 살 여고생은 엄마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다. 밤은 추웠고 길은 약간 미끄러웠다. 목포예식장을 휙 지나쳐가다 여고생은 뒤돌아보았다. 뭔가가 그녀를 잡아끈 것이다. 한 손으로 봇짐을 꼭 안은 여자가 목화송이 같은 눈을 한 손으로 받고 있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에게 맞은편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여자는 군말 없이 따라와 여고생과 함께 오뎅과 붕어빵을 먹었다. 기차역은 한참 더 가야 하는데 여자 입에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가 느닷없이 흘러나왔다. 봇짐을 아기처럼 꼭 껴안으면서 아아앙 아아앙 으버버 으버버 칙칙폭폭…… 여고생은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몇 년 전, 기차역에서 아기를 뺏긴 여자가, 눈 맞으며, 눈에 눈물 가득 달고, 서 있는 것이다..

좋은 수필 2022.01.22

등잔/신현림

등잔/신현림 불이 켜지면 마음은 더 이상 먼 데로 가지 않고 내 안으로 향한다. 홀로 있을 때의 외로움은 자아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해주고, 사람들이 모이면 등잔불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 손의 감촉은 더 예민해지고, 사랑하는 자들의 손길은 더 부드러워진다. 까무잡잡한 얼굴은 빛나는 구릿빛으로 바뀌고, 흰빛의 얼굴은 은은하게 달빛으로 끌어당긴다. 하루 동안 노동으로 지친 기분은 평화롭고 아늑해진다. 쓸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도 무엇이든 잘될 것 같은 기분으로 바뀌니 이 아담한 전등불은 밤 속에서 더욱 신비롭다. 등불을 보면 ‘생을 마감한 뒤에 남는 것은 그가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나눠줬던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등잔의 철학이 바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람에게 빛을 나눠주는 것..

좋은 수필 2022.01.22

석유풍로/김해준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검은 연기와 함께 석유 냄새가 올라온다. 그을음을 먹은 풍로는 비린 향을 품고 내가 지나온 공간의 한편에 자리 잡는다. 불꽃을 품고 배경을 흔드는 등으로, 또는 쌀 두 홉을 안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의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허기진 사람의 무력감을 해방하는 풍로는 그 공간에 갇힌 사물을 부조로 파낸다. 끝만 타버린 성냥개비 같은 머리통을 하고 잠드는 밤이면 나는 유년 시절과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누이고 잠이 든다. 사람을 끌어안고 잘 때와 같이 풍로의 온기 속에는 불씨가 존재한다. 타인의 숨소리를 받아주는 여유를 갖고 귀 기울이면 맥박이 느껴진다. 캄캄한 부엌에선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간다.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불꽃을 본다. 산막에서 야영을 하거나 계류낚시를 할 때면 나의 몽..

좋은 수필 2022.01.22

지게/문태준

지게/문태준 나의 아버지는 평생 지게를 지셨다. 지게를 벗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에게 지게는 등짝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업고 다니셨다. 논과 밭과 산과 하늘을 업고 다니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땔나무를 지고 돌아오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오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와 풀더미를 부려놓으면 저무는 내내 울안에는 동실한 풀냄새가 흘러넘쳐났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봄과 가을과 겨울을 지고 돌아오셨다. 골짜기 깊은 곳에 들어가셨다 소낙비와 검은 구름과 눈보라를 지고 오셨다. 지게에는 늘 뭔가가 실려 있었으므로 지게는 포만(飽滿)했다. 흘러넘치도록 가득가득 차 있었으며 묵중했다. 지게에는 낫과 도끼와 톱과 삽과 괭이와 써레와 쟁기 등속이 실려 있었다. 가끔 멀리..

좋은 수필 2022.01.22

약속도 없이/전영관

약속도 없이 전영관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의 찰기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 해드려야 안심이지 싶은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조청만큼 달달하니 서둘러 왔는데 늦었다 해도 넘겨줄 수 있겠다 찬 없는 두레상에 모셔도 결례는 아니려니 어스름 무렵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 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리라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보려 찰밥이라 고집 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네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

좋은 시 2022.01.22

세업 / 최태랑

세업 / 최태랑 아버지의 몸에서 언제나 돌 깨는 소리가 났다 그 차디찬 돌에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지 쩡쩡, 손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눈이 밝은 아버지, 돌 속에 숨은 거북이도 꺼내시고 사자, 호랑이도 불러냈다 먼지 푸석이는 소리로 밥을 짓던 아버지 열손가락을 다 버리시더니 돌을 반죽하기까지 칠십 년이 걸렸다 열 개의 지문을 다 핥아먹고 돌덩이들은 비로소 몸을 열어주었다 돌의 혈관을 찾고 심장을 찾아 숨을 터주는 것을 천직이라고 믿으셨을까 막힌 혈을 찾아 엎드린 아버지 새벽잠을 털고 일어설 때면 소리도 함께 일어섰다 한 자 한 자 각을 세운 비문의 이름들 어느새 묘비는 이끼가 끼고 어디론가 엉금엉금 기어간 거북이들은 어느 정원에 탑이 되어 앉아있을 것이다 평생 남의 이름만 쓰다가 당신 이름 석 자도 새기지 ..

좋은 시 2022.01.22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아버지의 연필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

좋은 시 2022.01.22

귀촌/전영관

귀촌/전영관 ​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으니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는 것이다 ​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을 붙이며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

좋은 시 202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