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3/01 9

물 묵어라 - 전동균​

​ ​ 물 묵어라 - 전동균 ​ ​ ​ ​ 밤새 앓으며 잠을 못 잔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는다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아내는 지금 제 속의 여자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입술은 갈라지고 얼굴은 퉁퉁 붓고 갑자기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 그래도 당신에겐 첫사랑과 어머니가 함께 있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색도 않는다 (…) 물 묵어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물 잔을 건넬 뿐 ​ ​ ​ 갱년기 증세를 견디느라 잠 못 잔 사람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침 밥상은 약식이다. 아내를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고 안타까워할 뿐 남편은 표 내어 위로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고구마는 목이 멘다. '물 묵어라'는 무뚝뚝한 한 마디에 숱한 감정이 배어 있다. 첫사랑이었던 남편도 말을 안 할 뿐 사실은, 정글로 쫓겨난..

좋은 시 2024.03.01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 ​ ​ ​ ​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

좋은 시 2024.03.01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 ​ ​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어 기대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울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 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좋은 시 2024.03.01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 ​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이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좋은 시 2024.03.01

비의 문양 - 윤의섭

비의 문양 - 윤의섭 ​ ​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른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른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

좋은 시 2024.03.01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 ​ 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ㅡ 붙잡으려는ㅡ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자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ㅡ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ㅡ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 물줄기 지나간다 ​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 아ㅡ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 ​ ​ ​ ​ 계간 『서정시학』 2011년 여름호 발표

좋은 시 2024.03.01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 박새 떼 날아오르는 탱자나무 사이사이로 올라오는 양지 꽃잎 숨소리 엎질러진 샛길 따라가다 보면 ​ 하눌타리 서너 줄기 무너져가는 돌담 양어깨로 들어 올리다 지쳐 쓰러진 담장에 억지 걸음을 내디딘 양철판과 헌 문짝들, 함박눈 뒤집어쓴 대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감싸고 있다 자신을 품어 줄 땅을 향해 경배하고 있는 지붕과 기둥과 마루와 방문과 주인 노파, 시간은 집과 주인의 마음을 한 물결로 흐르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쪼아댔을까 눈매도 앞태도 뒤태도 옆태도 모두 닮았다 ​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린 샤쓰 하나, 오래된 바램처럼 나부끼고 봄볕에 몸을 맡긴 고양이 한 마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염불하듯 두 발 앞으로 모은다 살구 꽃잎들이 우르르 떼지어 몰려다..

좋은 시 2024.03.01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ㅡ 못골 19 ​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 ​ ​ ​ ​..

좋은 시 2024.03.01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 이문재 ​ ​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있다 눈부시다. 소금 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 ​ ​ ​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중에서 ​ ​ ​ ​ ​ 어른들은 왜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어린 시절,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답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어쩌면 간단합..

좋은 시 2024.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