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3/05 3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밤새 곰팡이가 담쟁이넝쿨처럼 자라 있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인가. 며칠 사이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 듯했다. 벽지가 찢어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더니 미끈거리는 검은 습기가 묻어났다. 물티슈로 닦아내고 신문지로 문질렀다. 축축하던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내렸고 그 뒤로 시멘트가 조금 드러났다. 그런데도 곰팡이가 피었던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릿해지고 옅어졌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여느 때처럼 거울로 가렸다. 절망처럼 급속도로 피어나던 곰팡이를, 그 벽을. ​ 좁은 방에는 못이 딱 하나 박혀 있었다. 전에 살던 누군가가 박은 못이리라. 내가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못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못에 거울을 걸었다..

좋은 수필 2024.03.05

어둠의 저편 / 고지숙

어둠의 저편 / 고지숙 바람이 제법 불어 창문을 닫았다. 소란스럽게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드라마 속 남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모처럼 나 혼자 먹는 저녁.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간단한 볶음요리를 했다. 당근, 양파, 대파를 다듬고 버섯을 물에 불려두었다가 적당한 길이로 썰고 오징어는 살짝 데쳤다. 여러 재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드는 동안, 드라마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 여자와 노부인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걸로 보아 갈등상황이 시작된 것 같았다. 프라이팬에 재료를 넣고 기름에 볶는 동안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야채 볶는 소리 때문에 대사는 잘..

좋은 수필 2024.03.05

달고 뜨거운 /고지숙

달고 뜨거운 /고지숙 눈송이가 떨어진다. 얇은 외피에 비해 낙하 속도가 빠르다. 손등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녹는다. 다음 그 다음의 눈송이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손등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서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바로 녹는다. 차갑다는 느낌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훼손된 눈송이를 응시하며 본래 눈송이가 가지고 있었을 무게를 가늠해본다.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니 크고 탐스럽다. 한때는 세상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처럼 눈송이의 형태는 무구하고 선명하다. 팔을 벌리고 입을 열어 눈을 맞이한다. 차가운 것이 몸 여기저기 부딪히다 입속으로 들어온다. 혀를 적셔주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

좋은 수필 2024.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