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3/26 3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어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걱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진다 ​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 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

좋은 시 2024.03.26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 카트만두를 여행하는 것과 카트만두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았지만 밑도 끝도 모를 당신이라는 오지를 살아내면서 당신이라는 미로를 살아내면서 아직도 우리는 서로의 중심에 닿지 못했으니 서로의 극점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서로의 오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미로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해도 좋을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를 함께 살아내는 것 우리가 백 년을 해로하는 방식일 겁니다 ​

좋은 시 2024.03.2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시 2024.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