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3/08 4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최지안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 ​ 최지안 ​ 저녁은 경계에 걸린다. 낮의 끝과 밤의 시작 사이. 낮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밤이라 하기에 어정쩡한 시간. 차를 마시기엔 늦고 술을 마시기엔 이르다. 무엇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까운 인생의 절반을 지난 시점 같다. ‘아직도’와 ‘벌써’에서 망설이는 애매한 시간. 미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만다. 인생이란 것이 모두 그러하듯. 저녁은 슬그머니 온다. 서쪽 산등성이에 걸렸는가 싶은데 어느새 그림자를 이끌고 그렇게 시치미 떼고 온다. 고양이 담 넘어 집 뒤로 사라지고 새들도 둥지 찾아 날아가면 그제야 저녁은 눈치 보며 깃든다. 도로는 차량이 넘치고 조용하던 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슬그머니 시작된 저녁. 길이 막히고 거리는..

좋은 수필 2024.03.08

뒷골목/김응숙

뒷골목 김응숙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다. 밤이라면 그것은 체념의 시간이 흐르는 너절한 도랑이 되고 비까지 온다면 허무가 떠다니는 오염된 하수구가 된다. 늦가을 찬바람마저 불어대는 오늘, 화장 짙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비는 번들거리는 얼룩을 남기며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있다.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일까. 비안개에 희뿌연 빛을 분사하는 백열등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 빌딩 뒤편에 설치된 여러 구조물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거린다. 그 틈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납작 엎드려 있다. 곰팡이들이라도 퍼져 있는지 큼큼한 냄새마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의 저 끝, 어둠이 갈라진 직사각형의 빛 속에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흡사 멀리서 보는 전광판 화면 같다. 발밑의 웅덩..

좋은 수필 2024.03.08

태양초/김덕임

태양초/김덕임 주머니 속 금화가 잘랑거린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순천 시댁에 다녀왔다. 바삭한 고추 삼십여 근을 오부룩이 부었다. 작은 산더미만하다. 새 색시 다홍치마 같은 태깔이 손끝에 자르르 감겨온다. 고추 꼬투리를 떼어낸다. 벌써 두어 시간째다. 떼어낸 꼬투리는 흡사 생후 이레 만에 말라 떨어진 딸들의 탯줄이다. 코끝의 알싸한 냄새는 연신 재채기를 끌어올린다. 콧물이 눈물인지, 눈물이 콧물인지…. 고추 속에는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불룩이 담겨 오글거린다. 순천만 수평선에 낭자한 저녁노을도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고추는 해풍에 실려 온 달착지근한 새조개 냄새와 쫄깃한 쭈꾸미 맛도 담뿍 담고 있다. 고추밭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자락 속의 소쩍새, 멧새들의 울음소리도 고추더미 속에서 잔망스럽게 들린다...

좋은 수필 2024.03.08

수필의 서정성/방민

수필의 서정성/방민 수필도 시처럼 서정을 담는다. 서정은 감정을 펼친다는 뜻이다. 인간은 사고하기도 하지만 감정도 품는다. 서정은 이중 감정을 주로 드러내어 표현한다는 의미다. 이 서정을 대표하는 문학 장르는 시를 으뜸으로 꼽는다. 시의 성격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서정으로, 시를 달리 서정시라 부를 정도로 시의 핵심적 속성이다. 이 서정성이 수필에도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담겨있다. 이를 수필의 서정성으로 이를 만하다. 수필의 서정성은 시의 서정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같거나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변별 측면이 있는가 알아보자. 시와 수필의 공통적 서정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다. 첫째로 시와 수필에서 드러나는 서정성은 개인의 개별적 정서이다. 창작 행위가 개인적 독자 활동이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독자..

수필 이론 2024.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