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의 독백 / 김희숙
나는 나이든 책이라네.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제대로 나를 들춰가며 읽은 이는 드물 게야. 사람들은 지은이가 정약전 선생이라는 정도는 알겠는데 그저 바닷물고기나 해초류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겠거니 여기는 눈치더군. 어스름이 깔리는 파장 무렵, 눈알이 흐릿해진 어물전 생선처럼 한물간 고서 취급을 당하고 있어서 더러는 서러운 마음까지 들곤 하지. 그래서 아직은 붉은 아가미가 펄떡이는 팔팔한 현역임을 밝혀보려 한다네.
내 고향 흑산 사리마을 자랑부터 좀 해야겠지. 마을에 들어서면 작은 알돌과 편편한 호박돌을 번갈아 쌓아올린 나지막한 돌담이 먼저 눈에 띈다네. 자로 잰 듯 반듯하진 않아도 어지간한 태풍에도 꿈쩍하지 않는 단단한 담이지. 높이가 어른 허리를 넘지 않는 담장은 도시의 높다란 외벽과는 다를 게야. 구불구불한 밭의 경계도 나누고 사람 사는 집을 에워싸는 역할에 충실한 담이라네. 굽어진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구분 지을 뿐 아래윗집 사이 주고받는 눈길까지 막아서진 않지. 내 품에 안긴 바다 식구들을 소개한 선생의 글줄을 보면 짧고 간결하면서도 정겨운 것이 마치 사리마을의 낮은 담을 닮지 않았겠나. 동네 사람들은 변변한 대문조차 세우지 않은 채 한 덩이로 뭉쳐 마을을 활짝 열어놓았지. 발아래로 눈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탁 트인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은 마을이야. 휘돌아가는 곡선 따라 돌담길을 걷노라면 곧바로 빨리 가기를 바라던 삶이 수굿해질 게야. 그 느긋함을 만나러 요즘에도 여행객들은 거센 파도를 뚫고 속이 뒤집히는 뱃길도 마다않고 끊임없이 찾아오는지도 모르겠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천둥벌거숭이였지. 책의 씨앗은 정약전 선생이 틔웠고 동네 청년 장창대와 마을 사람들이 거름과 물을 주어 기르지 않았겠나. 이준익 감독은 영화에서 선생이 물고기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어주고 창대의 수많은 뱃길 경험과 바닷속 정보가 더해 가는 과정을 되새김하더군. 책을 지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선생의 의지와 청년의 세밀한 관찰력이 있었기에 그나마 온전하게 태어날 수 있었다네. 덧붙여 정약용 선생의 명을 받은 학자 이청이 문헌을 찾아 번듯한 옷도 입히고 볼살이 붙도록 몸집을 키워내고서야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는 어엿한 꼴을 갖추었지. 현대에는 세련되고 방대한 자료들에 밀려 비록 뒷방으로 물러났지만 내 몸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정성과 헌신이 새겨져 있다네.
내 나이 이백 살이 넘었어도 흑산도에서는 가수 이미자 정도의 인기는 될 게야. 음식점 주인장은 홍어 한 마리를 자르면서도 여느 병원 의사가 말해주듯 부위별 쓰임새를 자세히 읊어주곤 하지. 삭힌 홍어로 끓인 국은 뱃속에 덩어리가 생긴 병을 낫게 하고 숙취 해소에도 제일이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린다네. 뱃멀미로 고생한 뒤에 홍어 몇 점만 먹어도 뒤집힌 속이 가라앉는 듯 싶어지지. 주민들은 자신의 말은 모두 ≪자산어보≫에 나온다며 얼마나 당당해 하는지 모르네. 아마 집집마다 책장에 나의 분신들이 한 권쯤 꽂혀 있지 않을까. 택시기사들은 관광해설사를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더욱 나와 사리마을에 대한 자부심으로 침을 튀긴다네.
나는 백과사전으로 분류되지만 읽다보면 문학적 상상력을 돋우어 주기도 해. 선생은 묘사와 비유의 달인이었고 글재주가 뛰어난 시인이었지 싶어. 전자리상어를 ‘산사’라 칭하며 ‘산사 가죽은 별처럼 총총 박힌 무늬가 사랑스럽다.’고 하였고 참홍어를 몸통이 연잎 닮은 물고기라 불렀으니까. 홍어 지느러미의 나풀거림을 보며 연밭에 흔들리는 연잎을 떠올렸다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지 않는가. 문어 다리의 빨판이 국화꽃 같다고 일컫는가 하면, 민꽃게는 춤 추듯이 집게발을 펼치고 일어서기를 즐겨한다고 적을 때에는 나도 소리죽여 웃었다네. 별불가사리의 귀퉁이 뿔이 단풍나무 잎처럼 나온다고도 하고, 새조개를 알리는 대목에서는 빛깔과 무늬가 참새 털과 비슷하여 참새가 변한 듯하다고 했지. 연잎이 하늘거리고 국화꽃은 스멀스멀 돌아다니며 참새가 재잘거리는 무릉도원 같은 바다가 그려지는가. 물속 단풍나무 숲길에 들어간다면 민꽃게의 춤 걸음으로 걸어야 어울릴 것일세.
문인들은 지금도 종종 서고에서 나를 불러내곤 하지. 선생이 지어준 이름과 세세한 설명을 인용하여 글을 풀어가더군. 김정화 수필가는 그녀의 글에서 선생이 가자미를 명명한 ‘소접小鰈’ 대신에 ‘소접小蝶’으로 고쳐 ‘작은 나비’로 부르고 싶다며 재치있게 눙쳤지. 여수 바닷가에 사는 한창훈 작가는 내 품에 있는 물고기들 중에서 몇몇을 골라 그가 겪는 바다살이와 곁들여 밥상과 술상을 차려 놓았다네. 고등어는 회를 뜨고 소금 간이 밴 볼락은 꾸덕하게 말려 맹물에 삶아 마시고 살짝 데친 생미역은 뻘건 초고추장에 찍어먹고 성게의 노란 알을 파내어 비빔밥으로 즐기더군. 나를 ‘바다 식구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거대한 수족관’이라 추켜세우는 시인도 있었지. 그 말에 어찌나 어깨가 으쓱해지던지 63빌딩의 거대한 아쿠아리움의 유세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니까.
육지의 가족과 떨어진 섬이었기에 가능했을 게야. 선생은 뭍으로 드나들 수 없는 묶인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서는 오히려 공간을 뛰어넘어 시간을 앞서가지 않았겠나. 백성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양반이라는 체면도, 죄인이라는 굴레도 벗어던지게 했겠지. 당시에는 천한 일이라 여기던 갯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으며 비린내 나는 물고기의 배를 직접 가르며 뜯어보고 헤집으며 궁리하고 기록하였다네. 후대에 해양생물 연구자들 뿐 아니라 글을 쓰려는 자들이라면 선생의 생명에 대한 연민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내 이름이 세대를 넘어서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힘일 게야.
그때보다 바다 수온이 높아졌고 해양 오염도 심하다던데 흑산도 바다에는 그 시절 어종들이 변함없이 살고 있는지, 혹여 내게 이름만 남기고 멸종해간 생물은 없는지 궁금해지는군. 사라진 어족이 없기를 바랄뿐이지. 객기 부려 한바탕 생색을 내었더니 쑥스럽네그려. 이제는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 있어도 외롭다 여기지 않으려네. 갯것들이 품안에서 뛰어 노는 한 나는 언제나 살아 있는 바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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