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 최병영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소리꾼이 단가短歌로 마른 목을 푼다. 목청에 촉촉이 물기가 어리자 이내 본 사설로 넘어가면서 아니리부터 내놓는다. 소리꾼이 열린 소리로 세상을 열어간다. 세월처럼 닳아버려 오히려 새로운 옛 소리를 끌어낸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물혹으로 굳어진 사연들을 올올이 풀어낸다. 질그릇처럼 투박하게 쇤 성음聲音이 거침없이 시공을 넘나든다. 갖가지 사연이 가닥마다 빗장을 풀고 새로운 소리로 태어난다. 그것은 말 못하고 가슴앓이로 살아온 민중의 고통 어린 삶의 소리다. 그것은 득음만을 위해 불나방처럼 살아온 소리꾼의 한 맺힌 절규의 신음 소리다.
소리꾼의 걸쭉한 소리가 소리판을 굴렁쇠처럼 구른다. 소리꾼이 농주처럼 탁한 성조로 질펀하게 세상을 풍자한다. 전라도 깊은 산골에 오롯이 은거하던 토착어가 세상 나들이를 한다. 소리들이 굽이굽이 열두 고개를 넘으며 여섯 마당 소리판에서 노닌다. 춘향이와 이 도령이 사랑가로 그네질을 하고, 초승달밤 힘이 뻗힌 변강쇠가 과부 집 토담을 넘는다. 심술 난 놀부가 흥부 집 화초장을 짊어지고, 젊은 소경과 눈 맞은 뺑덕어멈이 심 봉사 봇짐 훔쳐 달아난다. 꾐에 빠져 용궁에 들어간 토끼가 생간으로 별주부를 희롱하고, 풍채 좋은 관우 장군이 적벽에서 조조를 몰아세운다. 소리마다 서민의 풍자고 사설마다 민중의 해학이다.
소리꾼이 대하大河처럼 유장하게 소리를 내지른다. 이따금씩 부채를 펴고 접는 발림에 실려 소리는 더욱 입체화된다. 소리꾼의 애절한 창이 소름 돋도록 가슴을 휘저어 전율을 일으킨다. 진양조창이 주야장천 임을 기다리다 밤을 맞은 여인의 옷고름처럼 스스로 풀어진다. 중모리창이 능수버들 춤추는 신작로의 들바람처럼 청량감으로 스친다. 중중모리창이 상모 휘돌며 점점이 꽃그림자로 지는 소고놀이패의 오금놀음처럼 흥취감을 몰아온다. 자진모리창이 자근자근 앞산 오솔길 솔잎 밟고 오는 임의 발자국처럼 신바람을 일으킨다. 휘몰이창이 남정네를 밀쳐내는 수절여인의 열두 폭 치마끈처럼 장단을 빠르게 당겨 후다닥 옭아맨다. 소리에 얽힌 곡진한 사연들이 각기 다른 가락으로 푸지게 노닐다가 농염으로 아우러진다.
실로 오랜 날에 걸쳐 구비口碑되어 온 서민의 소리다. 지체 높은 양반네들 술자리 취흥을 돋우기 위해 행주처럼 목구멍을 쥐어짜던 소리다. 부잣집 영감들이 던져주는 은화 몇 닢으로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허리끈 동여매고 속내를 끌어내던 소리다. 동네 설화를 가락에 올려 한으로 곱씹었던 상민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소리는 온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질박한 세상 얘기로 넘쳐난다. 소리는 그렇게 시나위 권을 중심으로 평민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중심이 되어 면면히 불려왔다. 율문적인 창에도, 서사적인 아니리에도 갖가지 사연이 대목 맞은 시골 장터처럼 푸짐하다.
소리꾼이 소리를 다스리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사뭇 벼랑을 오르내리는 가락의 진폭이 여려지고, 사연들을 아우르는 목청에 힘이 부친다. 아무래도 억새처럼 거센 소리가락을 다스리기에는 나이가 소리보다 저만치 앞서 내닫고 있다. "얼씨구!", 고수가 눈치를 채고 넌지시 추임새를 넣어 소리를 챙긴다. 고수의 북채에 힘이 실리며 북장단이 변주가락으로 날렵하게 미끄러진다. 고수의 신명난 북소리가 소리마디 사이를 누비며 흥겹게 노닌다. 물 먹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던 소리꾼의 성조에도 다시 감정이 일고, 빠르게 구슬리는 사설에도 윤기가 흐른다. 북은 앞길을 터 소리를 이끌고, 소리는 북을 밀어 금세 한 몸이 돈다. 그렇게 소리꾼과 고수는 하나로 어우러져 세상살이를 푸지게 풀어놓는다.
고수가 북면치기와 태치기를 엮는다. 입체적으로 굴리는 북장단이 심산유곡의 물소리처럼 청아하다. 새벽 풀잎에 가만히 맺혀 있다 또르르 구르는 이슬처럼 영롱하기도 하다. 예로부터 '1고추 2명창'이라고 했다. 명 고수만이 명창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명고수의 출중한 북소리에서만 명창의 신들린 소리가 가능하다. 고수가 소리꾼을 어르고 부추기며 소리 속의 진수를 끌어낸다. 고수와 소리꾼은 장단으로 화합和合하고, 호흡으로 화응和應하며, 느낌으로 화협和協한다. 소리꾼의 내력 깊은 소리가 부채에 둥지를 튼 선학을 타고 너름새로 넘어간다. 소리꾼의 음조는 탁하기에 강렬하고 낮기에 애절하다.
실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한이었다. 짐승도 얼씬거리지 않는 깊은 계곡 동굴 속에서였다. 인적 끊어진 지 오래인 벼랑 끝 폭포 아래서 였다. 계절은 벌써 수도 없이 초록색으로 다가와 암갈색으로 물러갔다. 허구한 날 한여름에는 비바람이 몰아쳤고 송곳 같은 한겨울에는 눈보라가 들이쳤다. 숨결 고르기 어려웠던 그 많은 날이 모두 소리였다. 날숨 끝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진액에선 쓸개처럼 쓰다 못해 단내가 났다. 북망산천 응시하는 결핵 환자처럼 선혈을 토해낸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번번이 기력을 다한 밭은 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혀 생기 잃은 메아리가 되었고, 폐부를 쥐어짠 마른 소리는 폭포수에 막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절망감에 그만 소리를 팽개쳐버리고 팠던 힘겨운 날들이었다.
소리꾼이 지닌 것은 오로지 독기毒氣에 찬 집념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소리꾼은 독기를 신주처럼 끌어안고 죽고살기의 오기로 버티었다. 허기진 배를 맹물로 속일 때 소리는 오히려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말라갔다. 뱃가죽이 등골에 달라붙어 대꼬챙이가 되어도 원수 놈의 소리는 박절하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극단적인 절망감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소작 땅뙈기에 엎어져 농사일로 허리 휘었을 여편네가 아른거렸다. 헐벗고 배곯은 채 땟국 꾀죄죄하게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을 자식 놈도 어른거렸다. 소리꾼은 그때마다 어금니 악물고 곧추앉아 눈물로 소리를 끌어냈다.
그러나 소리가 말라버린 가슴에서는 소리 대신 짙은 회한만이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그것은 절망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는 처절한 절규의 몸부림이었다. 자꾸만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미끄러지는 소리의 헝클어짐을 극복할 수 없어 그냥 혀를 깨물어 버리고도 싶었다. 그토록 험난한 길인지도 모르고 불쑥 발을 들이민 어리석음이 미워 눈을 후벼 파고도 싶었다. 분노가 꼭짓점까지 비등하여 활화산처럼 이글거릴 때는 자신을 무작정 폭포수에 던져버리고도 싶었다. 갈등과 번뇌의 심연에서 탈진하여 쓰러진 소리꾼의 몸 위로는 이따금씩 한줌 달빛만이 무심히 밟고 지날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소리다. 그렇게 하여 거두어진 소리꾼이다. 그러기에 소리꾼은 항상 회한과 설움으로 세상을 엮는다. 마음껏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을 질타하던 소리꾼이 판을 여미면서 세상 얘기를 닫는다. 북채가 태 위에서 강한 맺음으로 소리판을 갈무리한다. 고수의 추임새에 실린 신명과 장단을 빚던 소놀림도 소리 끝에서 멎는다. 소리가 끝난 소리판엔 소리꾼이 흩뿌려 놓은 적막만이 무겁게 감돈다. 소리판에는 완창한 소리 가락의 잔영이 묵음默音으로 남아 못다 푼 소리꾼의 사설을 이어간다. 어둠처럼 짙은 정적이 소리 없는 소리판을 바람개비 되어 휘돈다.
고적하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우살이 / 김은주 (0) | 2023.02.26 |
---|---|
물고기의 시간 /김정화 (1) | 2023.02.25 |
자산어보의 독백 / 김희숙 (0) | 2023.02.14 |
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0) | 2023.02.09 |
쉼표 / 고미영 (0) | 2023.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