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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불안에 대한 보고서/장미숙

에세이향기 2023. 2. 26. 07:39

불안에 대한 보고서

 

                                                                                                                                      장미숙

 

  그들은 푸른색 두꺼운 천으로 그녀를 덮어버렸다그녀는 순식간에 어둠 속에 갇혔다죽음 같은 고요가 흘렀다두려움을 거느린 외로움이 엄습했다외로움은 삽시간에 온몸을 꽁꽁 묶어버렸다외로움은 두려움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일까마음속에 소름이 돋아났다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평온하게 일상을 즐기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그들에 속하지 못한 그녀는 비참했다눈을 감아도 영상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머릿속 액정화면 정지 버튼을 꾹눌렀다그리고 고통이라는 메뉴를 골랐다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삶의 고뇌에 맞선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그녀는 그 속에 자신을 끼워 넣었다화면은 우울한 푸른빛이 되었다무거운 푸른빛이 그녀 주위를 감쌌다그녀를 덮고 있는 푸른색 수술 천과 같았다외로움이 조금씩 사라졌다혼자 견디는 게 아니라는 건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철컥!”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분주한 발걸음이 오갔다간호사들의 말소리는 차분했다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와 다르게 한없이 평온한 그들은 자신들만의 용어를 주고받으며 가볍게 웃기도 했다그들 속에서 그녀는 이방인처럼 외로웠다.

 

 곧이어 가슴께가 묵직해졌다수술기구들을 올려놓는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진정되어가던 가슴이 날카로운 쇳소리에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빨라진 호흡은 곧이어 벌어질 일을 상상하게 했다숨을 크게 내쉬었다그사이 특정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간호사들과 확연히 다른 그 소리는 견딤의 시간이 곧 시작될 것임을 알려주었다발걸음 소리가 뚝멈췄다살을 찢고 뼈를 깎아낼 손이 그녀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시작합니다입을 크게 벌리세요.”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곧이어 눈 부신 불빛이 푸른 천을 뚫고 눈꺼풀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그와 동시에 불안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들려왔다놀란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공간이 좁은 곳도 아니건만 몸을 펼 수 없었다움직이면 두려움이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아서였다무릎을 세우고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결박해 버렸다아니그녀 스스로 두려움에 갇혀버렸다늘 그랬듯이 그녀에게는 콩알만 한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민감해진 귀는 조그만 소리에도 화들짝 반응했다그럴 때마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곧 닥칠 장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술 냄새광기 어린 눈빛거친 고함거대한 몸그 앞에 파랗게 질려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고함이 귀를 때렸다귀를 막아도 소리는 안에서부터 터져 나왔다도망가고 싶었다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곳이라도 좋았다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공포는 이성까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불안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찰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벌떡 일어났다안절부절못한 채 문 앞에 서자 술 냄새가 먼저 달려들었다거대한 공포 속에 그녀는 내던져졌다이가 달달 떨려 맞부딪히는 소리가 폭포처럼 크게 들렸다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강한 본능이 꿈틀거렸다광기 어린 눈빛이 그녀를 쏘아봤다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불안은 그녀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들었다복종에 길든다는 건 생존에 대한 욕구만이 남아 있음을 의미했다폭력을 이겨내는 건 비폭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복종은 그녀를 지켜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의 눈빛과 그의 고함과 욕설과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냈다그를 자극하지 않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억울함에 대한 분노는 두려움 뒤로 밀려났다억울함은 미래의 일이고두려움은 눈앞의 일이었다그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바짝 엎드려 있어야 그나마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그가 잠들고 나면 먼 훗날 갚아 주리라고 이를 앙다물었다그렇게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던 술은 그녀의 인간다운 삶을 앗아갔다맞설 기회를 놓쳐버린 후그녀는 거대한 힘에 지배당했다그녀 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불안은 가지를 키우고 잎을 달면서 점점 더 세력을 넓혀갔다불안은 정신에 숙주(宿主)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편안한 잠을 자 보는 게 소원이었을 만큼 많은 날을 불면증에 시달렸다핍박에 길들면서 두려움과 불안은 예감으로 먼저 찾아오곤 했다상황이 펼쳐지기도 전에 심장부터 요동쳤다.

 

 그녀의 정신 속에는 두 개의 감정이 교차했다평온과 불안극도로 평온했다 극도로 불안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술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은 너무나 대립적이었다타인이 마시는 술은 천사의 미소였고그가 마시는 술은 악마의 눈빛이었다그녀 안에 있는 또 다른 그녀는 안으로 깃들지 못하고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서성였다언제든 튀어나올 태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로이트는 어떤 위험에 대한 예상 속에서 생기는 불안을 신호불안(signal anxiety)’이라 했다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경우 그에 대한 예감을 감지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안이다상처가 아물지 못하면 상황이 달라져도 불안은 없어지지 않는다마음속에 파랗게 돋아 온몸을 휘감아버린다그 제어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그녀는 빠져나오지 못했다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의 뿌리는 깊이 박혀있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꿈을 꾸는상상하는 힘이 불안의 근원이라고 말했다그녀의 불안도 상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과거의 경험이 상상의 씨가 되었다상상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수록 기억은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상황이 닥치면 맞서보려는 의지는 발바닥 밑으로 재빠르게 숨어버렸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면서 술 냄새가 집안을 채우는 날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함도 점점 잦아들었다아무 일 없이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했다올 시간이 지나도 그가 오지 않거나누군가 불러내면 기다렸다는 듯 불안이 얼굴을 들이밀었공포에 대한 예감이 큰 만큼평온함에 대한 고마움도 컸다예감했던 것에 비해 별일이 없었을 때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로 행복했다. 

 

 육체의 아픔과 고통은 순간을 참아내면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치과에 갈 때마다 극도의 공포를 느끼지만그 공포는 몇 시간에 불과하다치과를 나오면 불안은 씻은 듯이 사라지기 때문이다살을 찢고 뼈를 갈라도 그로 인해 불면증을 겪진 않는다서너 번의 치료가 끝난 후 치과에 대한 그녀의 불안도 더는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밤낮으로 온몸을 꽁꽁 묶어버리는 거대한 정체는 뭘까덮쳐오는 검은 그림자 밑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매일 그 화두(話頭)를 붙들고 괴로워했다가해자는커녕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녀만의 불안 속에서 처절하게 외로웠다그러면서도 밥을 먹고일하고운동하고글 쓰고 웃기도 하면서 행복한 사람들처럼 살았다그녀에게 행복은 때로 가장(假裝)이었고때로는 감당하기도 벅찬 진실이었다순식간에 자신을 쓰러뜨려 버릴 수 있는 배후(背後)의 그림자임에도 불안과 그녀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아니불안이 그녀 삶을 붙들고 휘둘렀다.

 

 언제까지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불안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그녀는 답답했다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검은 그림자 덩어리를 끄집어내 부숴버릴 수 있다면그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평온함에 대한 간절함은 어느덧 그녀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런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녀는 불안에 지배당하곤 한다하지만어느 날 그녀는 깨달았다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미세한 기운이 자아의 바닥에서 피어나고 있음을그건 분명 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더 이상 엎드릴 수 없을 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였다.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그녀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하지만 스쳐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본다그러다가 지독하고 처절한 외로움과 맞닥뜨리면 우뚝 멈춰 선다아프고 아픈 누군가의 뒷모습을 다독다독 해주고 싶을 때 그녀 안의 그녀가 살며시 웃음을 짓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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