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슬픔
김진순
해를 몰아내고 창 밖에 어둠이 서성일 때마다 기다려진다. 옷깃에 바람을 풍성하게 달고 와 줄 것만 같아서 두근거린다. 펄럭이는 푸른 잎처럼 활기차게 너는 그렇게 나에게 온다. 대지로부터 전해오는 발걸음 소리는 이미 현관에 닿아 있고, 무심히 벗어놓은 신발은 왜 이토록 애잔한가. 복숭아 빛깔처럼 고운 미소와 허기에 찬 손놀림을 영광스런 훈장을 보듬듯이 밀도 있게 바라보고 싶다. 온전한 삶이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명백하게 유지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상실을 통해 알았다.
이별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왔다. 2012년 3월 아들은 교통사고로 인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부재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54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아들은 돌아오지 않으며 방문을 여닫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다. 집 안에 엄마라고 불러 주는 목소리가 떠다니지 않고, 맘에 든다던 가느다란 손가락도 예쁘다며 동의할 수가 없다. 교통카드 충전해야 한다는 말이 잠자리처럼 맴돌 뿐 들리지 않는다. 벗어놓았을 세탁물은 흔적이 묘연하고 책상 의자에는 물빛 그림자가 아련하게 새겨졌다. 식탁에 앉으면 함께하고 싶은 열망이 모여든다. 관리비 고지서조차 부재를 확인시켰을 때는 삶의 조롱에 숱하게 비틀거렸다. 이별을 수용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중력을 느낄 수 없이 부유하며 삶의 벼랑에서 헐떡거리게 한다. 갑옷처럼 단단한 굴레가 짓누르며 살아 있음이 모욕처럼 부끄럽게 한다. 상실을 견디는 자에게 최선이란 없다.
다시 만질 수 없는 아들에 대한 몰입은 삶의 현재진행을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리움이라는 우물 안에서 웅크린 채 아들을 추억할 뿐 삶을 지웠다. 그리움의 부피는 터져도 상관없다는 듯 수시로 풍선처럼 팽창한다. 날마다 25세 청년이었을 아들이 사방에서 나풀거린다. 종아리가 유난히 길어 여자 다리 같다며 씨익 웃던 미소가 따갑게 사무친다. 엄마 먹으라고 꽃게를 발라 접시에 담아 놓았던 마음은 한없이 정겨웠고, '고백'이라는 시를 써 엄마 아빠에게 사랑을 전하던 비둘기 깃 같은 보드란 감성은 아직도 설렌다. 치킨 쿠폰은 옹기종기 냉장고에 붙어서 먹는다는 사소함이 벅찬 순간임을 자주 상기시킨다. 즐겨 부르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떠올리면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다. 손의 지문이 가득할 책상서랍은 한 사람의 역사가 빼곡히 펼쳐져 별을 다녀간 자취로 남았다. 삶의 무게가 둔중하게 깔려 있는, 화산 같은 뜨거움을 내뿜는 그의 방을 넘나들 때마다 신의 형평성에 의문을 가지며 슬픔에 파묻히게 된다. 아무리 영혼이 산재해 있다 한들 하나뿐인 몸만 하겠는가, 부둥켜안을 수 있고 봐도 봐도 닳지 않을 몸만 하겠는가. 하늘의 영원한 생명이란 또한 얼마나 허탈한가. 심장 소리를 들려 주는 내 곁의 너만이 진실인 것을.
꼼지락거리는 아들의 발가락을 관찰하며 함께 TV를 보던 기억이 처연하다. 아들은 당시 맨유에 있었던 박지성의 팬이었다. 그의 자서전을 탐독할 만큼 열성이었고 그에 관해선 기억력이 대단했다. 그러므로 박지성은 그토록 열광한 팬을 잃은 것이다. 야구는 삼성을 응원했는데 양준혁을 좋아했다. 양준혁의 마지막 경기를 보며 그 선수의 적나라한 설명을 싱글거리며 해 주었다. 농구에 있어서는 부산 KT 팬이었는데 전창진 감독이 이유이다. 전술을 잘 짜는 감독이라나. 그날 KT가 졌는데 어찌나 속상해 하던지 눈에 선하다. 무엇인가 공유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음을 감사하지 못했다. 미래는 단절되고 지난날이 아쉬움으로 쌓일 때마다 깨닫게 된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나를 많이도 웃게 했다는 것을.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를 처음으로 타며 행복해하던 얼굴이 가까이서 찰랑거리는데, KT 농구를 같이 본 것을 마지막으로 아들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다시 볼 수 없다.
남편도 친정엄마도 형제도 그렇게 말했기에 그런 줄 알았다. 엄마 사랑 많이 받고 갔다고, 잘해 줬으니 그런 걸로 아파하지 말라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회한으로 괴로움이 깊어 간다. 더 잘해 줄 걸, 더 이해할 걸, 미안하다고 애타게 말해도 고스란히 내 안에 머물러 아들의 가슴팍으로 다가갈 수가 없다. 미안함으로 저당잡힌 채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거리는 거듭되는 문명의 발전에도 좁혀지지 않을 거라는 인정을 암울하게 할 뿐이다. 현명한 엄마는 아니었다는 뒤늦은 자각으로 마음은 꺾어지고 엄마로서 만회할 기회가 영영 없기에 한숨만 잦아진다. 자식과 이별한 엄마는 끝없이 무력하며 죄인으로 남아 스스로의 철창에 갇히는 것 같다. 미안한 마음을 유예하지 않고 흔쾌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내 옆에 네가 있었으면…….
말기 암환자인 나는 죽음이 낯설지 않다. 21세에 아깝게 떠난 아들의 나이와 비교하기에 병에 대해 평온하고 죽음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머지않은 날에 우리의 만남을 생각할 때 죽음은 고통을 상쇄하고 새로움을 도출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꿈꾼다. 만나면,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정성스럽게 살펴봐야지. 초승달 같은 눈썹도 쓸어도 보고 콧등을 만지작거리며 웃어줘야지. 통통한 귓볼을 성스럽게 우러르다가 눈 맞추고 말해야지. 숨 쉬는 순간순간 보고 싶었다고. 귀한 몸 안고 어깨를 토닥토닥 해 줄 때 하늘의 안식처는 더없이 포근할 것임을 믿는다. 고통을 마치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그날에 나는 편안히 웃을 것이다. 한 뼘만 가면 그리운 아들이 있으니까. 아, 그 휘황한 모습은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
이별은 절망스럽다. 뇌에 부조처럼 박힌 생생한 아픔은 소멸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살이 뭉텅뭉텅 찢겨져 나가듯 고통스럽다. 금속의 고체처럼 박제된 슬픔은 연해지지 않은 채 삶이 나날이 지루하다. 그러나 새벽녘 길을 막는 짙은 안개처럼 삶의 인자함은 닫혔지만 살아냄의 사명감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에는 집행유예가 없으며 날마다 유순해지지 않는 칼날과 마주할지라도 살아감의 가치를 존중해야 함을 알았다. 슬픔이 내면의 균형을 무너뜨릴지라도 삶의 이면을 받아들여야 한다.
산 사람은 살기 마련이라는 허무한 진리에 부합하듯 시간은 흘러갔다. 살아진다는 지극히 수동적인 맥락이더라도 생은 계속되었다. 죽는거 무섭다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던 아들의 말이 귀에 쟁쟁할지라도 그가 살아 보지 못한 오늘에 나는 있다. 얼마나 비열한 현실인가, 이토록 불완전한 삶의 질서가 신의 구원을 통해 온화해지기를 갈망한다면 지나치게 이상적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합리화에 내 삶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기도가 고단한 삶에 완충작용을 한다는 것을, 어지러운 영혼을 쉬게 한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내려고 한다.
어느 날, 결렬한 삶도 풍화하여 연약해질 수 있을까. 계절의 순환처럼 응고된 슬픔도 물컹하게 변형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심장이 굳건히 기억하더라도 슬픔은 단아해질 수 있을까.
나는 아들을 마중한다. 창가를 비추는 고운 달빛으로 와서 불면의 밤을 위로한다는 것을. 흩어지는 꽃잎이 되어 사뿐사뿐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는 것을.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은방울 같은 청아한 소리로 소식 전한다는 것을. 거인 같은 어둠이 나를 거느려도 빛으로 와 준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가 매 순간 함께한다는 것을. 이 소리 없는 진실에 기대여 몇 겹의 울음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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