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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그런 바람 / 최명희

에세이향기 2023. 4. 24. 16:28

둥그런 바람 / 최명희

 
 

달님이야 계절을 가리리오. 청옥같이 차고 맑은 얼굴이 반공에 둥두렷이 떠오르면, 우러러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푸른 물빛이 스미어든다.

 

꽃기운 자욱하여 애달픈 봄밤의 달이나, 가슴 속 핏줄의 골짜기까지도 시리게 비추는 가을의 상월(霜月), 얼음보다 투명하여 그 명징이 오히려 두려운 빙천(氷川)의 달, 그리고 은하수 너울을 두르고 냇가의 달맞이꽃과 희롱하며 검푸른 밤바다를 건너가는 여름의 달, 이 달을 따 손에 들면, 한낮의 폭염 복판에서도 서늘한 바람이 인다. 둥글부채 단선(團扇).

 

살대에 갑사(甲紗)나 비단, 종이 등을 곱게 발라서 만든 둥그런 이 부채는 모양도 다채롭고 이름도 갖가지다.

 

태극무늬 선명한 태극선(太極扇)은 그 여염(麗艶)한 자태의 곡선과 단순하면서도 휘황한 빛깔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는데, 더위를 쫓는 다른 도구가 따로 있다 할지라도 태극선 한 자루만은 머리맡에 놓아두고 싶은 것은, 그 모양의 아리따움 때문이리라. 더욱이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본체라 하는 태극의 저 오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동그랗게 부채로 만들어 손에 쥐고 아끼었던 옛사람들의 앙증스럽고 낙천적인 심성이라니.

 

“그러닝게 우리 선조들이 아조 대단한 멋쟁이들이었지요. 부채 한 자루도 그냥 맨들지를 안허고, 그것을 즐길 줄 알았거든요. 풍류의 운치가 있었응게요.”

 

물어물어 뙤약볕에 일부러 찾아간 전주의 한쪽 모퉁이 동네 파밭 너머 부채촌에서, 오직 부채를 만들며 살고 있는 선장(扇匠)은 그렇게 말했었다.

 

태극선 말고도 부채는 형형색색 이름도 많았다.

 

오동잎 모양의 오엽선(梧葉扇)이 신선하게 일으키는 바람을 받으면서는 상서로운 봉황이 가슴에 깃드는 것을 꿈꾸었고, 연잎 모양의 연엽선(蓮葉扇)을 들고 앉아서는 연꽃 향기 지극한 정토의 기슭을 아득하게 그리었으며, 파초잎 모양의 초엽선(焦葉扇)을 바라보면서는 너그럽고 의연한 군자의 기상을 가다듬었을 것이니, 그것이 어찌 단순히 더위를 쫓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겠는가. 어쩌면 그 부채들은 형상을 빌어 마음을 담아낸 그릇이 아니었을까. 왕골이나 갯버들 또는 죽순껍질로 넉넉하게 짜서 만들었던 팔덕선(八德扇)에 이르면, 각박한 이 도회인도 저절로 마음을 풀어 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 부채는 왜 이름이 팔덕선인가 허먼요. 여덟 가지 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해서 그렇게 불렀답니다. 그것은 주로 서민층 부녀자들이 지녔던 것인디요. 첫째로 값이 싸고, 둘째로 망가져도 아깝지 않고 그 다음에 오다 가다 앉을 일이 있으먼 방석으로 쓰고요. 불을 피울 때는 바람을 일으키고, 그러고 남의 사람허고 내외헐 때는 얼굴을 가리고, 한낮에는 머리를 덮어 햇볕을 가리고요, 훨렁훨렁 부치먼 시원허고, 땀이 흐르먼 베적삼을 걷어 올려 그 속에 넣어서 등거리 대신 썼으닝게 그런 이름이 붙을만허지요. 참 순박헌 부채지요. 사람의 덕이 어디 그만헐 수 있간디요?”

 

부채 한 자루가 지닌 덕을 따르지 못할 ‘사람’은 냉수 한 대접을 주인장에게 청하고는 타오르는 마당을 내다보았다. 허름한 울타리 아래 붉은 접시꽃이 요요하게 피어 있고 어디서 얻어다 심었는지 옥잠화 작약이 한 포기씩 무심한 듯 자리 잡고 있는데, 원추리, 나리, 창포는 그 뒷줄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그 옆에 수줍은 연지 분홍이 어우러져 피어난 족두리꽃, 그 꽃의 구슬 같은 수술.

 

이만한 한적함 한 뙈기가 어찌 아직 애틋하게 남아 있는가.

 

“요새는 누가 부채를 부치간디요? 모다 성질들이 모질고 급해서 빠르고 자극적이어야 허닝게 이까짓 부채 바람 가지고는 양이 안 차지요. 허나 사람 몸이고, 성질이고, 세상 사는 일이고 간에 자연을 거슬러서는 못쓰는 법이지요. 서로 기운을 달래고 북돋우고 어우러짐서, 다스리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허는 것이 순리 조화지요. 안 그러면 어디가 상(傷)해도 상헙니다. 허기야 기계들이 하도 많이 발달을 해놔서요. 한번 그 맛이 들어 놓으면 인이 백혀서 자꾸 더 기계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렁게 인제는 부채들도 점점 더 없어지고. 옛날에는 ‘전주 부채’허먼 임금님한테 진상허던 명품이었는디요.”

 

멀고 먼 국경을 넘어 중국의 천자에게까지 바쳐져 그 절묘한 기품으로 찬탄을 받았다는 합죽선(合竹扇)도, 이제는 부채 촌에 남은 단 몇 사람의 선장(扇匠) 손에 아쉽게 접히고 있을 뿐인데.

 

“평생 부채나 맨들고 살어온 사람이지만 내 생각에는 과학이 마약이다 싶습디다. 그것이 발달헌다고 꼭 그렇게 좋은 것잉가 어쩐 것잉가.”

냉수를 마시고 내려놓는 흰 사발에 둥그런 바람이 들어와 고인다. 사발은 달님이 되어 말갛게 떠오른다. 그리고 달님은 선장(扇匠)이 들어 올리는 날렵한 부채 속으로 그 몸을 숨긴다. 어질고 넉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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