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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의 무릎* / 윤남석

에세이향기 2023. 5. 15. 16:14

민들레의 무릎* / 윤남석

 

무릎 꿇고 앉은 그녀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흠칫, 한다.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쓸어내리며,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드물게, 늦은 시월에 들렀다. 대체로 따뜻한 계절에만 찾아왔기에 뜻밖의 방문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즘 들어 가끔 때 이르게 피는 꽃을 볼 때도 있고, 또 제철에 보여야 할 꽃이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이상기후에 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어지기에 씁쓰레할 때가 있다. 그녀가 마당 한쪽에 다소곳하게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반가움보다는 의외롭다는 생각이 먼저 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혹시 낫낫한 가을볕이 유혹한 걸까. 그 볕살의 촉감에 잠시 기대어, 나른한 몸을 내려놓았다가 그만 들켜버린 걸까. 이렇게 눌러 앉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솜털 같은 포근함에 버릇처럼 무릎 꿇고 앉았다가, 순간 덜미가 서늘해짐을 느끼고 슬며시 돌아다보는 걸까. 무릎 꿇고 앉은 그녀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는다. 앙증맞은 자태가 눈길을 끈다. 아무래도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조금 벌어진 무릎을 급히 오므리며-

 

슬며시 낯을 붉힌다. 그녀는 매년 봉숭아가 제 스스로 피고 지는 자리 옆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봉숭아가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자루 끝에 여러 색깔 꽃을 연이어 매달아놓기 때문에, 키 작은 그녀의 꽃부리는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다행히 봉숭아꽃을 보고 찾아든 벌이 축 처진 그녀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봉숭아 통통한 씨방이 터져 씨가 튀어나올 때에는 새삼스레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 게다. 그러는 사이 혀같이 생긴 꽃부리는 점차 말라서 오그랑쪼그랑해진다. 그녀가 외로이, 시들어가는 혀 꽃부리의 단추를 하나씩 열더니 훌렁 벗어부치기 시작한다.

방석처럼 땅바닥에 납작 달라붙어 한겨울 날 때부터, 그녀는 이미 마음을 조금씩 비워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땅이 얼어붙어 무릎이 깨질 것 같은 혹독한 추위에도 몸을 웅크리며 입선入禪에 든다. 무릎이 툭툭, 갈라져 각질 같은 번민이 허옇게 떨어져내려도 가슴속에 품은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겨우 이만한 정도의 고행도 없이 어떻게 정신을 정화시키고 아름다운 희망의 싹을 키우느냐,

탁 ․ 탁 ․ 탁,

죽비 소리 같은 바람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그쳐본다. 잡다한 생각을 훌훌 떨쳐낸다. 항상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보곤 한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세속의 잡념을 한 꺼풀씩 걷어낸다. 그렇게 찬 땅바닥에 누워 가장 낮은 자세로 영혼을 정화시킨다.

봄이 되자, 그녀는 여전히 무릎 꿇은 채 꽃대를 밀어 올린다. 하늘 향해 하얀 꽃받침을 펼쳐 보인다. 우주를 포용하려는 몸짓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기에 홀대 받기 일쑤였던 유전적 기억이 솝뜨곤 했지만 아랑곳 않는다. 나비와 벌들에게 선택받지 못해도 낙심 않는다. 그렇게 꽃이 이울고, 보기 흉한 고름 딱지처럼 시든 꽃잎을 매달고 있어도 부끄러워 않는다. 이윽고, 말라 뒤틀린 꽃잎은 절로 떨어진다.

그녀는 어느새, 다시 묵묵히 하얀 솜 같은 갓털을 뽑아 올리고 있다. 감싸던 꽃턱잎이 바람에 날릴 정도로 뒤집힌다. 그녀가 바람을 맞는다. 다시 그렇게 바람신에 의해 수행의 길을 떠난다. 가장 낮은 자세로 무릎 꿇고 정진하던 그녀가 낙하산같이 생긴 갓털 붙잡고 출가를 감행한다.

그렇게 허공을 떠돌던 그녀가, 늦은 계절에 홀연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게다. 어지간해서는 가을마당에 발을 디디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게 낯설기 그지없었을 텐데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늘 그래왔듯이, 조용히 눈 감고 기도 올리는 모습이다.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은 그녀 모습은 흐트러짐 없는 구도자의 몸짓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무릎, 을 두고

인간의 육체에서 가장 미운 부분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장 미운 그 부분을 항상 치맛도리로 감추고, 보송보송한 꽃턱잎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다.

다시 그녀가 활짝 펼친 포苞를 머리에 이고, 바람을 기다린다. 봄바람이 아닌 선선한 가을바람이지만, 이번에도 성공적인 출속을 기대한다. 갓털에 길게 매달린 씨가 옴질거린다. 무수한 씨앗은 그녀의 복제된 영혼이다. 수송기 안에서 공수 낙하를 준비하는 대원들처럼 말없는 긴장감이 감돈다. 강하 전 최종점검을 끝낸 듯 씨앗의 결연한 눈빛이 매서워 보인다. 서서히 바람이 입질한다. 매우 흥분한 듯, 그녀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줄탁啐啄, 을 생각한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주둥이를 내민다. 이때 어미닭은 병아리가 뚫고 나올 방향을 향해서 정확한 시간, 정확한 지점을 부리로 톡 때려 쪼아준다. 어떤 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안팎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드디어 바람과 그녀가 맞쪼기 시작한다. 바람은 그녀를 쪼아대고, 그녀는 힘껏 바람을 엉겨 잡는다. 갓털 펼치고 새로이 구도의 길을 떠나려는 그녀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바람은 그녀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길라잡이다.

바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그녀를 인도한다. 바람에 의해 길 나서려는 의지는 순전히 그녀의 마음에서 피어난다. 서로의 행위가 아름답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고결한 의식은 빛을 발한다. 품안에 성스러운 우주를 감싸 안고 있던 영혼이 번뇌의 사슬을 끊고 광활한 우주로 번져간다.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인연을 훌훌 벗어버린 그녀는 그렇게 해탈을 꿈꾼다. 그녀의 실체가 떠난 자리에는 멋진 비상을 위해 발판이 되었던 꽃대만 덩그러니, 고독을 삼킨다. 삐죽 솟은 꽃대는 마치 우주와 교신을 주고받기 위한 안테나 같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꽃대가 설렁대는 바람에 안테나를 한껏 흔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남은 육신은 종내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바람이 흘러간 허공만 하염없이 쳐다본다. 시집보낸 친정어미의 심정일 게다. 그래서 눈물 삼킨 줄기마다 젖빛 진액이 가득 들어차는 걸까. 그만큼 애절함이 스몄기에 줄기는 또 그렇게 쓰디쓴 맛을 머금는 걸까.

알고 보면,

그녀는 엄청 숙부드러운 여자다. 육신은 비록 세속에 적을 두고 있지만, 언제나 투정하는 법이 없다. 아무리 하잘것없더라도 싫은 내색 않고 감싸 안을 줄 안다. 권정생權正生의『강아지똥』을 보면, 강아지똥이 모두들 더럽고 냄새난다며 구박해도 그녀만이 포근하게 감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아지똥은 그녀가 예쁜 꽃을 피우는데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그녀의 아름다운 포용은 오랜 좌선으로 마음을 잗다듬었기 때문일 게다. 그녀가 체득한 마음자리는 성스럽다. 마을 교회 종지기였던 권정생도『강아지똥』을 집필할 시기에는 그가 기도하던 자리는 표가 날 정도였다고 하니, 그러고 보면 그녀의 기도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듯도 하다.

지상에 남은 그녀의 육신이 조용히 묵도를 올린다. 기도하는 동정 마리아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또다시 엄숙하고 정결한 의식을 치를 봄날을 위해 자세를 낮추는 게다. 겨울나려면 마음 비우고 몸을 더욱 웅크려야 한다는 걸 안다.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할 줄 알아야 가장 멀리 나는 법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일 게다. 그녀가 그렇게 맑은 묵상에 든다.

* 문정희 시「민들레의 무릎」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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