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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때죽꽃처럼 / 김잠복

에세이향기 2023. 5. 12. 05:25

때죽꽃처럼 / 김잠복

 

태백산 줄기를 돌고 돌아 당도한 산골 마을에는 산 그림자가 길게 몸을 늘이고 있었다. 꼬박 다섯 시간이나 고른 숨을 쉬며 불평 없이 우리 부부를 싣고 달려간 승용차는 기계라기 보다 충직한 말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봇짐을 풀었다. 우애 좋은 자매처럼 산이 산을 감싸안고 있는 산중에서 모처럼 달과 별을 청한 잠자리는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아직은 안개가 눈을 비비는 첫새벽이다. 창을 밀고 들어오는 풋풋한 오월의 산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켠다. 동네를 걸어나와 작은 공굴 다리를 건저나 '김삿갓 생가'를 가리키는 안내간판은 잠에서 덜 깬 채 손님을 맞는다.새벽숲이 물속처럼 고요하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풀 숲 아래고 아침 산책중이던 날다람쥐가 내 눈과 마주치자 머루알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급하게 몸을 숨긴다. 언뜻 스친 눈빛이 맑고 선해서 겁이 많은 친구임이 틀림없다.

남편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 말이 적은 남편은 오래간만의 내 제의가 싫지 않은지 팔을 빼지 않는다. 이런게 팔짤을 끼고 호젓하게 걸어 본 지가 얼마만이던가. 오랜만에 맛보는 감미로운 시간이다.

오래 전 방랑시인 김삿갓은 어떤 기분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이 주막 저 주막에서 얻어마신 공술에 취했거나, 낮에 만난 주모를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로 시 한 수를 읊었을까. 풍진세상이 하 서러워 사모곡을 흘리며 새똥같은 눈물을 손등으로 스윽 훔치고 목이 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삿갓(병연)의 조부는 홍경래의 난으로 탁핵을 당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김삭삭은 백일장에서 조부를 비난한 글을 써내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이를 어쩌랴.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병연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스스로 부와 명예, 직위와 신분 따위에 대한 미련일랑 백지로 접어버렸다.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며 삿갓을 쓴 채 구름 따라 바람따라 몸을 맡기고 방랑길을 자청했다.

내게도 삶의 끈을 놓을 만치 힘든 방랑의 시간이 있었다. 어쩌면 그 증세는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가 맨정신으로 버티기가 가혹한 고문이었다. 이십팔 년이라는 시간을 행복의 꽃 이파리만 줍게 했 주던 아이가 일순간에 없어졌는데 내 존재 따위가 무슨 의미였을까. 곡기를 거부하고 몸이 시들어져 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삶의 끈을 놓겠다는 일면만으로 존재의 허망함에 포악을 떨었다. 지구끝까지 달려가 절대자의 멱살을 잡고 이유를 따지겠노라 치를 떨다가 이내 제풀에 지쳤다. 가슴에 피가 흥건하도록 손톱으로 할퀴며 그가 간 곳을 찾아날설 때믄 치맛자락에 불붙은 무녀가 되어있었다. 허걱허럭 미친 듯이 달려간 종점에는 언제나 '서울공원묘원'이란 침묵의 장소가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랑의 말이나 소원도 침묵으로 통했다.

인간 세상으로부터 빗장을 걸고 어둡고 습한 무인도를 자청했다. 산사의 작은 암자를 찾아가는 날은 출가를 마음먹었다. 한갓진 해변에서는 바닷물 깊숙한 밑바닥까지 침잠해 부레가 터진 물고기가 되어 삭아 없어지기를 빌었다. 되돌아 나오는 외진 길모퉁이에서면 맥없이 뒹구는 마른 막여으로 돌아가 낮선 이들의 발에 바스락 밟혀지기를 바랐다. 건조한 영혼은 그대로를 자동차 뒷바퀴의 뿌연 먼지로 허공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 내게 그럴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목숨이란 모진 거였다.

여명은 말간 빛을 길섶부터 깔았다.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를 흔들어 숲을 깨우느라 분주하다. 골짜기를 타고 니리는 개울물 소리가 바지런히 하루를 여는데 어디선가 인간의 소리리나 나지막이 섞여 흐른다.

저만치 산 위쪽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다 큰 처녀 아이가 다정하게 걸어 내려온다. 이른 시간에 산책ㄱ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서로 어깨를 맞추며 오손도손 걸어오는 그들에게 자꾸만 눈이 간다. 몸집이 있고 감색 상의가 어울리는 중년 남자, 남색 체크무늬 셔츠에 풀잎처럼 여린 여자가 긴 생머리를 폴폴날리며 연방 함박웃음으로 자지러지듯 한다. 마치 훔쳐보는 내 눈을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꼼짝없이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처녀는 부부 사이에서 행복을 건네는 징검다리이자 보석이다. 행여나 그들이 내 눈치를 챌까싶어 나는 몸을 나무 뒤로 숨기며 엿보기에 한숨간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럽고 또 부럽웠다.

웃으면 드러나는 하얀 치아에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이다. 도톰하게 붉은 입술과 선연한 흰자위, 선명하고도 까만 저눈동자, 긴 목덜미는 우윳빛이어서 기름기 자르르한 처녀의 자태가 낮설지 않다.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는 것이며 아담한 키에 통통한 몸매까지. 그는 하늘나라에서만 지내는 내 딸아이와 흡사했다.

가족은 우리 쪽을 향해 눈인사로 스쳐 지나가 저만치 멀어져갔다. 한 번씩 발걸음을 멈추는가 싶다가 이내 가던 길로 갔다. 산모퉁이를 돌아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곳을 한참이나 지켰다.

내게도 저런 딸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쩌다 지금 나는 남의 처녀를 훔쳐보며 부러움의 침을 질질 흘리는 불쌍한 신가 되었단 말인가.

"떼죽꽃이다!"

난데없이 남편이 목청을 돋우었다. 아내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딴청을 부리는 거였을까. 그래서 내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하는 고의였단 말인가. 잠시 고개를 흔들어 앞을 지켰다. 눈앞이 아니, 골짜기가 온통 하얗게 떼죽꽃을 깔아놓았다. 뜬금없는 서설을 만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로 젖히자 별 모양의 떼죽꽃이 수도 없이 내려다 보며 금방이라도 '톡톡' 별똥별로 곤두박질할 테세였다. 살아 있는 꽃별이다. 하늘에 있는 별만 별이 아니었다.

초여름날 떼죽나무에 내려앉은 꽃별, 행여나 길 위에 내려앉은 별이 다칠세라 까치발을 했다. 하얀 별들을 쓸어 모으는 내 손등 위도 생생한 꽃별하나가 '톡' 소리내로 떨어진다. "너는 어찌 턱없이 여리고 생생한 꽃인데 떨어지누….절로 탄식의 말이 흘러나왔다. 떨어진 별위로 새똥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지. 턱없이 생으로 지는 것이 어찌 떼죽꽃 분이랴.

삶은 한바탕 도깨비 놀음이다. 지난하게 수공예 작업으로 한 땀 두땀 수놓다가 신의 실수로 먹물 한 방울 흘리는 찰나에 삶의 퍼즐은 허사가 되고마는 것이다. 한창 무지개 비눗방울로 곱게 부뤂어 오른 물풍선이 바람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헛장난이다. 어줍은 바람, 외가지를 스치는 가는 바람에도 그대로 몸을 통째로 내려놓는 때죽꽃러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리.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에 있으리. 젊음과 사랑, 부와 명예, 행복도 불행도 다 한때인 것을.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라 여기며 복종하고 무릎꿇는 것이 인생이라고 가르치는데 말이다. 젊음을 흔드는 푸른 숲물결도 그렇고 이 가지 저 가지를 호르내리는 새들으 지금이 호시절인 것을 알기나 할까.

김삿갓이 한때 머물렀던 초옥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한 생이 머물다 간 소박한 흔적을 그대로 정지지켜 두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무심한 새털구름이 바람에 쫏기어 남으로만 달린다. 구름 사이로 허연 두루막자락을 펄럭이는 예주인을 떠올린다. 불쑥 고개 내밀어 호탕 웃음 한번 껄껄 웃어 주면 좋으련만….

누가 알까. 그 덕에 나는 억지 충향 큰 소리로 웃게 될는지. 언제쯤 속 깊은 곳에서 마음껏 소리내어 웃어 볼 날이 오기나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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