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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박시윤

에세이향기 2023. 6. 18. 08:51

빗살무늬토기, 그 넓은 대륙

                                                                                                    박시윤

 

 

 

 

  하나의 덩어리는 언젠가는 조각나기 마련인 것인가. 아니면 조각난 것들은 언젠가는 하나의 덩어리로 다시 결합될 수 있는 것인가.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은 퍼즐처럼 하나로 들어맞았고, 나는 그 속에 잊혀 진 하나의 세상이 존재했음을 예감한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으로의 빗장은, 무겁고 둔탁한 미로 속을 배회하듯 조심스럽다. 손가락 하나를 무늬에 갖다 대고 천천히 지문을 읽힌다. 암호를 대고 기밀의 문을 통과하듯 내 지문은 그들이 요구하는 비밀부호에 적합했고, 일정하게 흘러가던 빗살의 언어들이 하나, 둘 깨어나 해석을 재촉한다. 하나같이 똑같은 무늬인 듯해도 가만가만 되짚어 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언어로 까끌 거렸고, 육천년을 단숨에 건너와 깊이와, 촉감을 달리하며 나의 손끝에서 맴돈다. 미세하게 긁고, 손톱으로 꾹꾹 눌러 찍은 그들의 표기는 글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문명의 세상에 살면서도 문맹인일 수밖에 없는 조모의 표기법에 다다라 있는 듯하다.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일까. 손끝으로 전해지는 깊숙하고 오묘한 그들의 손길이 얼핏 느껴졌다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어슴푸레 눈앞에 그려지는 그 때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간다. 되짚어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만 맴도는 현실에 나는 서 있고, 이따금씩 뇌리를 스치는 어떤 기억들이 자꾸만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텅 빈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뿐이다. 한 톨의 단서조차 없는 미궁의 항아리를 쫓다보면 무수한 갈등이 굶주린 내면을 자극한다. 오래전부터 비어버린 속을 들여다 볼 때마다 유령 같은 존재가 살다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다. 한 세계를 건설하고 꿈을 ?아 살다가 서로의 야망이 맞지 않아 깨어진 신들의 세상처럼 그것은 늘 공허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꿈틀대며 대륙들이 제각각의 욕망을 쫓아 위치 이동을 하던 소리, 수 억 마리의 매미 떼가 제국의 파멸을 슬퍼하며 울부짖는 소리, 비바람이 회오리처럼 일어서 흙먼지들이 흩어지던 소리들이 일제히 북을 치듯 고막을 울려댄다. 각자의 목소리로 일제히 아우성을 쳐대던 기억이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나를 깨워낸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존재하기에 이토록 나를 안달하게 하는가. 쓰라린 속으로 맹물을 흘려 넣으면서도 기억의 너머로 깊숙이 잊혀져간 시절, 전설의 땅을 떠올리고자 불면의 안간힘을 쓴다. 굶주림은 언제나 후각을 자극하고 가물가물 뭉쳐진 구름의 등을 밟고 불어오는, 아득히 먼 곳의 바람에 집중케 한다. 후각은 야생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강인하게 살아남아 그들의 냄새를 추격하고 있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들개들의 무리가 코를 땅에 쳐 박고 살아있는 날것의 길을 찾아 나서던 야생의 습성처럼. 오래 묵은 흙의 냄새가 스민 바람결을 타고 뭉클하게 다가오는 태고의 기억이 눈시울을 건드린다.

  깊고 어두운 토기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하나였던 대륙이 지각의 변동에 갈라졌듯 그도 생의 연속성을 위해 스스로 분열을 택해야 했던 것일까. 초 대륙의 둥글던 몸체가 조각조각 깨어져 세상을 부유하는 것처럼 그도 긴 세월의 터널을 지나 여기까지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체를 잠시 내려놓아야 했으리라. 거대한 몸체는 추격자들에 의해 조각을 이어 다시 하나로 되살아났고, 퍼즐처럼 흩어져 어지럽던 그 때의 서막을 열어 주었다. 투박하여 빛나지도 않고, 아름답지 않아 예술적 가치도 없어 보이는 메마른 흙덩어리가 우리를 향해 자그마치 육천년을 흘러 와 단순하고 고요한 세계로의 초대를 한다.

  알 듯도, 말 듯도 한 희미한 감각들을 쫓다 보면 언젠가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고요하고 가장 단순한 세계를 누비다 온 바람처럼 언젠가는 그 날의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을 거라는 본능이 자꾸만 좁은 틈 속으로 눈동자를 갖다 댄다. 토기는 태고의 흙냄새를 떠안고 고요했으며 손톱에 부딪는 소리는 그때와 같은 음으로 알갱이들을 품고 바스락거린다. 어두운 내면의 밑바닥까지 천천히 훑고 가는 소리를 따라 영혼이 맑게 깨어난다.

  깨어진 틈에서 조금씩 어둠을 누비던 밀서가 밝은 곳으로 비집고 나온다. 빛은 어둠을 막아서지 못하고 서서히 한줌씩 한줌씩 자리를 내어준다. 깊고 웅숭대던 토기의 몸체가 기지개를 켜며 꿈틀댄다. 눈이 멀 듯 아득한 진공의 어둠이 감지된다. 수렁수렁 고여 드는 물의 소리가 서서히 몸을 에워싼다. 떨어져 나간 대륙의 틈을 에워싼 물처럼 조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대륙의 생명을 영위해가는 물의 흐름 때문이리라. 숨이 멎을 것 같다. 눈부심과 어두움이 교차되는 순간 어둡고 깊던 밑바닥이 열리고 용오름 치는 부력에 이끌려 나는, 굶주린 안달의 쓰린 속을 안고 어디론지 이끌려 간다.

  그간 대륙의 영토 위에 무수히 많은 영혼이 들고 났다. 육천년을 거슬러 미세한 숨구멍이 생명의 콧날을 세워줄 때 나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서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고, 먹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날것으로 씹어 삼켜야 했다. 주인이 없는 것들은 널브러져 살았고, 추격에 추격을 하며 서로가 야생의 본능으로 으르릉대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짐승의 숨통을 끊고 허기진 배를 채우던 날, 메마른 영토위로 난무하게 흩어진 붉은 피를 자유자재로 빨아올리며 풀들은 생장점을 뻗어 아름답게 꽃을 피워나갔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뜨겁게 아름다울 수도 있었던가. 굶주린 삶은 후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고 해가 뜨고 짐이 일정하듯 떠나간 바람은 대륙을 끝없이 돌고 돌아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직감케 했다. 떠난 것들은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리니 더 이상의 떠돌이생활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수컷들은 무리의 우두머리를 뽑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수컷들은 거칠었으며 최고의 포식자답게 강인했으며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개척을 서둘러야 했으리라. 삶의 개척성, 그것은 시대를 읽는 일이고, 시대를 이기는 일이고, 시대를 넘어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에 대한 승리의 도달을 뜻하는 것이었다. 찍고, 쪼개고, 다듬었던 수많은 시간들의 흐름이 모조리 산화하지 못하고 그들의 족적처럼 대륙의 곳곳에 틀어박혀 차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자그마치 육천년이다. 뼛속까지 틀어박힌 커다란 대륙의 숨소리가 한눈에 들어차 있다. 오래 묵어 제대로 숙성된 그들의 시간만큼 우리의 시간도 보태어져 긴 긴 문명으로의 도달을 꿈꾸고 있다. 와글대며 쏟아져 나오던 아우성들은 흩어짐의 애잔한 통고가 아닌, 뭉쳐짐의 희망의 노래였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통과해온 그들의 시선과 손길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빗살로 그어져 아슴아슴 또 누군가의 본능을 자극한다. 내면은 한없이 깊고, 흙을 주물렀을 그들의 체온이 내면을 따라 빗물처럼 한없이 우리 문명에 스며든다.

  태고에 하나로 뭉쳐진 대륙이 분열을 하여 세상을 떠돌 듯, 지나온 세월만큼 또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는 또 하나의 대륙에서 문맹의 흙뭉치를 빚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 인고로 이룩된 문명의 세월은 가고 태초에 빚어진 인류의 이야기는 자유로운 시절로 되돌아가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고요한 세계로의 흐름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빗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몸체를 흐르고 있는 강인한 혈액의 흐름이 들리고, 잔잔히 훑고 가는 그들의 족적이 울린다. 여리고 희미한 그들의 빗살 속에 아슴아슴 전해지는 육천년 세월의 걸음들이 보폭을 좁혀 더욱 힘차게 대륙을 울리고 있다. 도달하고픈 욕망을 따라 빗살의 흐름은 잔잔한 여우비가 되기도 하고, 한없는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그들의 나라, 그들의 제국, 나의 문명, 나의 세계가 토기 안에서 빙빙 돌고 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창조의 실마리를 따라 문명은 숙명처럼 무수히 많은 족적을 뻗으며 제자리를 향해 항해의 돛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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