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빨래
정둘시
아침 밥상을 다 차렸는데도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출근을 서둘러야 할 사람이 왜 이리 태평이냐고 혼잣말을 하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린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당혹스럽게도 남편이 뒤 베란다 세탁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손빨래까지 할 생각을 하다니. 늦복이 터진건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발꿈치를 높이고 살며시 들여다보니, 와이셔츠 한 장을 비벼 빨고는 맑은 물이 나오도록 헹구는 중이다. 집 가까운 거래처에 출장 온 아들이 어제저녁에 벗어둔 옷이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빨래하는 그의 뒷모습은 정성스럽다 못해 숙연해 보인다. 바쁜 시간에 무슨 청승이냐고 재촉하려다 입을 다물고 만다. 오늘따라 한눈에 들어온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예기치 못한 행동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는 까닭이다.
셔츠 깃이 뽀얗게 빛나도록 문지르고 있는 남편의 손길은 단순히 빨래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닐 것이다. 먼 객지에서 온 힘을 쏟아부어 자신의 몫을 하느라 애쓴 아들에게, 유난스럽지 않은 아버지의 칭찬일 테다. 아니면, 전쟁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취업 경쟁 속에서,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무엇보다도 말간 빨랫물 속에 자신의 젊은 날을 투영시킨 채, 가슴 깊숙이 묻어둔 얼룩진 상흔을 꺼내어 맑은 물로 헹구어 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학업을 마치고 결혼까지 하였지만, 남편의 취직은 쉽지 않았다. 식구까지 딸린 부실한 맏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제때 자기 몫을 다 하지 못한 남편 또한, 허리가 휘도록 농사지어 뒷바라지해준 부모님께 면목이 없어 한동안 어깨를 움츠린 채 지내야만 했다.
직장도 없이 결혼을 먼저 했으니, 제대로 살림을 한다고 말할 것도 없던 신혼시절이었다. 어느 주말이었던가, 저녁에 남편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집들이하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그날, 시아버님과 친정아버지가 신혼집을 둘러볼 양으로 함께 오셨다. 단칸방에 두 분을 모시고 조촐한 술상을 차렸다. 옹색한 살림살이를 둘러보며 걱정 그득한 두 분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크지도 않은 방을 이쪽저쪽 한참이나 둘러보시던 시아버님께서 다락방을 발견하시고는, 갑자기 계단을 오르며 나에게 말없이 손짓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올라갔더니 아버님은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내 손에 가만히 쥐여 주셨다.
“오늘 친구들 온다며, 이걸로 제대로 대접하고 큰 애 기죽이지 말거래이.
그라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데이“
사돈이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였건만, 그마저도 끝내는 목이 메는지 내 등만 다독이셨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이장을 맡고 계셨으니 늘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시던 아버님. 어머님께는 언제나 불호령만 내리시어 무섭게만 보이던 아버님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애잔함만 서려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당부하시던 당신의 그 깊은 속내를. 나는 단지 못나 보인 내 처지가 부끄럽고 서럽다는 생각만 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태어났고 한 뼘씩 자랄 때마다, 그네들도 각자의 눈높이에 주어지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곤 하였다. 부모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영역은 점점 늘어갔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는 자주 목이 쉬었고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아졌다. 그런 날이면 긴 밤의 끝자락에서, 아릿함이 배어있던 아버님의 당부가 어느새 나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진심으로 오열했다. 장성한 아들이 친구들에게 주눅이라도 들면 어쩌나, 갓 시집온 며느리의 상심은 얼마나 클지 노심초사하셨던 그 마음이 애달파서였다. 지금까지도 남편은 아버님의 가슴을 아리게 한 그 시간에 대해 깊은 회한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무뚝뚝함 속에 숨겨진 아버님의 속 깊은 사랑은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살게 했던 동력이었음도 잘 안다.
오늘 아침, 고개를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 아들의 셔츠를 빨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과, 낮은 천정에 머리가 닿을세라 구부린 채 다락방 계단을 오르던 아버님은 그렇게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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