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 문춘희
아이들과 남편이 학교로 일터로 모두 떠나고 난 아침은 세상이 텅 빈 것 같다. 상자의 내용물이 상자를 버리듯 나는 남겨졌다. 매일 아침 치러야 하는 잠시 동안의 이별이요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속을 다 비워 버린 상자 같은 내 안은 언제쯤 다시 채워질 수 있을까?
아파트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마치 내가 알 수 없는 큰 상자 안에 갇힌 것만 같다. 큰 상자 안에 갇힌 작은 상자가 된 나를 들여다본다. 상자엔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다. 한때 무엇을 담았던 것인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상자가 된 것일까?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막다른 골목길처럼 컴컴하고 오래 입은 옷처럼 후줄근해진 상자 속으로 을씨년스런 바람 소리만 윙윙 들려온다.
얼마 전 거실이 휑한 것 같아 입구 쪽에 놓을 콘솔을 하나 샀다. 아침저녁으로 콘솔을 닦으면서 그래도 허전한 것 같아 화방에 가서 콘솔 위에 걸어 둘 그림도 한 점 구입했다. 그래도 자꾸만 집은 비어 보인다. 마음의 빈자리 때문이지 황량한 겨울 들녘처럼 허허로웠다. 허한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가구를 장만하고 그림을 사들여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 없이 집은 커다란 상자가 되어 갔다.
큰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부터 내게 유난스럽게 툴툴거렸다. 학교 생활이며 학원 생활에 대해서 물어보면 마지못해 겨우 고개만 주억거린다. 자신의 생활에 확대경을 들이대며 일일이 알려고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시험 기간을 핑게로 제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있기를 원했다.
막내마저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 자상한 남편도 바깥일이 힘이 드는지 말수가 더 줄었다. 그런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아이들도 남편도 내 곁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안의 상자도 조금씩 비워져 갔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품안의 자식’ 이라는 말이 있듯이 때가 되면 세 아이 모두 엄마의 품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이 이렇게 시나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자식들과 가정이 전부였던 엄마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마음의 평안을 잃고 무연히 빈 의자처럼 앉아 있다. 쓸쓸함이 밀물처럼 스며든다.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도 잠시, 허전함을 접듯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의 옷을 개킨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옷은 마치 아이들의 그림자 같다. 이 방 저 방 청소기를 돌리면서 집 안에 흐르는 적막감을 빨아들인다.
청소를 하고 나니 집 안이 더 넓어진 것 같다. ‘쉬리릭 처얼썩’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낯선 방문자처럼 적막을 두드린다. 빈 상자 같은 아파트 거실 안쪽으로 정오의 햇살이 깊숙이 들어온다. 내 안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빨래를 널면서 바라보는 맞은편 아파트도 줄지어 높이 쌓은 빈 상자 같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난 이후의 시간은 빈 상자들이 설거지를 하고, 빈 상자들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빈 상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쓸쓸함에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다. 상자들은 스스로 빈 상자가 아니라고 수다를 떨고 타인에게 위로를 받으려하지만, 언제나 텅텅 비워진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춘기 시절 나는 늘 혼자였고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였다. 그런 내게 위안이 되어 준 것은 잡동사니를 모아 준 상자를 꺼내어 보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머리핀이며 친구들한테서 선물 받은 액세서리며 혹은 두근거리면서 누군가에게 썼지만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꺼내어 보고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다.
상자는 기차가 되어 아프리카의 초원으로, 알프스의 설원으로 태평양의 푸른 바다로 데려가 주었다. 알라딘의 램프 같은 상자 안에 무지갯빛 꿈을 차곡차곡 담았다. 그렇게 작고 예쁜 상자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내게는 상자가 없다. 대신 아이들과 남편의 상자로 남아 있다. 이젠 예쁜 종이로 포장된 작고 앙증맞은 상자가 아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상자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런 상자의 삶도 꼭 쓸쓸한 것만은 아닌 듯싶다. 본래 상자는 제 안에 자신을 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사물을 담는 것 아니던가. 상자 자신은 구겨지고 찢기어져도 최후의 순간까지 그 속에 담긴 것들을 안전하게 지킨다. 상자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언제나 남을 지향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상자는 둥지와 같다. 둥지에서 새는 알을 낳고 품는다. 그곳은 새끼들이 푸른 창공으로 비상할 때까지 비바람과 눈보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 준다. 또한 상처를 닦아 주며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당당한 힘을 길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어린 시절 내 꿈을 키우던 상자는 다 잃어버렸지만 둥지 같은 내 안에서 아이들의 꿈은 새처럼 부화할 것이며 남편은 조금씩 자신을 성취해 나갈 것이다. 언젠가 사춘기 시절의 상자가 내게 꿈을 심어 준 것처럼 이제 내 스스로 상자가 되어 가족의 꿈이 되어 줄 차례다. 그러기에 사춘기 시절 내 안의 상자에 꿈을 담았던 것처럼 아이들과 남편의 끔을 담기 위해 상자의 뚜껑을 늘 열어 두어야겠다.
집 안에 서서히 어둠이 덮이기 시작할 해거름, 아이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앞치마를 두르고 부산스럽게 저녁을 준비한다. 밥솥의 추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목쉰 기적 소리를 울리고, 도마 위의 칼은 춤을 추듯 움직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운다.
서서히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상자가 채워지는 듯하다. 햇살에 둥지가 따뜻해지듯 상자 안은 다시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되어 품이 좀 헐렁해진 상자이긴 하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상자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내 키만 한 나무 상자에 빈 몸으로 누워 우주 어딘가에 안착하게 되리라. 그때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작고 하찮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상자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상자로서의 삶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내일은 예쁜 상자에 머리핀이며 지갑이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담아 볼까? 맞은편 아파트 창에도 하나 둘 불빛이 내 걸린다.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종일 빈 상자였던 아파트들이 출렁거리면서 행복을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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