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 김윤선
식당은 널찍하고 천장이 높아서 쾌적했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률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시어머닌 휠체어에 앉은 채, 나는 그 곁에 자리를 잡았다.
지독히도 조용했다. '수다 금지'라고 했는지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함이 지나쳐 묵직하고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어색하고 긴장됐다. 처음엔 낯선 동양인을 관찰하느라 다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식탁마다 음식이 놓여도 어느 한 사람 선뜻 수저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퀭한 눈동자로 멀거니 딴전만 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들,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지만 설사 눈을 마주쳐도 반응이 없었다. 종이인형들 같았다.
어떤 맛이 당신 구미를 당긴 것일까, 넙죽넙죽 꽤나 잘 받아 드신다. 씹을 것이 없으니 오물오물 두어 번 입안에서 굴리고는 꿀꺽 삼키신다.
"아! 어머니, 잘 하셨어요."
연거푸 추임새를 넣다 보니 꼭 예전에 딸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것 같다. 제비새끼마냥 주는 대로 쪽쪽 받아 먹던 예쁜 모습과는 달리 어머니의 식욕은 날 감질나게 한다.
어머니는 지금 요양병원(Nursing Home)에 계신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식사도 남의 손을 빌리는데 다른 건 오죽할까. 당신 몸이 당신 것이 아닌지 오래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 나오는 은지 할머니처럼 우리에게 지혜와 사랑을 나눠주느라 당신께서는 키와 기억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식사를 거드는 동안 입언저리를 훔쳐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느라 부딪치는 피부접촉이 그간의 고부갈등을 해소시켜 이미 화해가 되어버렸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잘 자라기를 기도하듯 어머니의 오늘이 편안하기를 또한 기도한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부터 몇몇은 병실 복도를 따라 휠체어에 앉은 채 고개를 늘어뜨리며 졸고 있다. 그보다 좀 더 나아보이는 이들은 느릿하게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가며 복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말없이 떠다니고 있다. 그들은 섬이다. 물결 없는 바다에서 부유하는 섬이다. 그리고 그 섬은 무인도다. 진액은 다 빠지고 남은 건 척박한 바위뿐, 건조하고 무표정하다.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당신들, 그나마 마지막 홀로서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캘리포니아 인근해안을 지나면서 육중한 바위섬을 만난 적이 있다. 해변에서 불과 여남은 걸음이나 될까, 속절없이 파도에 부딪치고 있는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찌릿했다. 육지와 바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자리하지 못한 어정쩡한 자세,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차라리 바다 한복판에 내려앉아 파도라도 덜 맞든지, 아니면 육지에 올라 제 위용이나 떨든지. 고스란히 파도를 맞고 서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바위가 말했다. 저 작은 돌멩이들을 보라, 내 몸이 바람막이가 되어 그나마 저들이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는다면 그게 내 몫이라고. 나는 단지 저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유리창 너머 제 삶을 사느라 바쁜 자식을 바라보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
바깥에서는 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되레 그런 햇볕을 찾아다닌다. 휠체어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방금 전의 무더위가 살풋 비껴갔는지 웬만하다.
"참 좋다."
밝은 햇살이 좋은 건지 실낱같은 바람이 좋은 건지, 아무튼 당신 얼굴이 편안하다. 수국에 손을 대어드리니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신다. 바질의 잎을 몇 개 따서 손바닥에 놓아드리니 코에 대고 향기를 맡는다. 점점 사라져가는 머리의 기억보다 그간 새겨온 몸의 기억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따뜻함을 알고, 손으로 꽃을 만지고, 손바닥에 놓인 이파리를 코에 갖다 대는 행동, 간간이 아들의 이름마저 잊은 기억력이지만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하고 있다.
목욕을 하고 난 후라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곱게 빗질을 해드리니 살짝 생기가 돈다. 당신께서도 은연 중 여성임을 되살리고 있는 것일까. 좋아하는 빨간색 블라우스도 어깨에 걸쳐드렸다. 멍한 눈길 속 당신은 지금 열다섯 살의 소녀다.
"집에 가자."
그새 해바라기도 귀찮은지 자리에 눕고 싶단다. 병실을 당신의 집으로 여기시나 보다. 하기야 지금에 이르러 고대광실이 무슨 소용일까. 침대에 당신 몸을 뉘였다. 기저귀를 봐드리고 이불을 덮어드리고 베개를 괴어드렸다. 당신께서는 그간의 행보가 피곤한 듯 벌써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내게 손사래를 치신다.
"어여 가서 밥 먹어라."
어머니는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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