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구슬나무/이명길
늦가을 호수는 푼푼하다. 물오리들의 행렬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둥치만 남은 물 버들은 잠잠히 하늘을 읽는다. 물속을 거꾸로 인 채 말라버린 연 대궁은 삶을 회상하듯 묵묵하다. 호수가 생의 지론이라도 강의 중인지 물이랑 사이로 바람을 일깨운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호수공원을 둘러본다. 활짝 열린 하늘은 새털구름마저 지웠다. 낱낱이 떨어지는 햇볕을 이고,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호수 에움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발길을 옮기니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간간이 하늬바람이 스쳐갈 때면 신록의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언덕 위로 특별한 나무가 있어 눈길이 간다. 멀구슬나무 줄기에 왕벚나무가 업혀 있다. 뻐꾸기나무라 한다.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습성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해 두었다. 바람을 타고 온 왕벚나무 씨앗이 멀구슬나무의 둥치에 앉아 발아를 하여 싹을 튀운 것이다.
아버지는 바람 같았다. 하루를 집에 계시면 열흘을 밖에서 지내셨다. 바람처럼 매인 곳 없이 당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다니셨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안중에 없었다. 어쩌다 집에 오실 때도 가족보다는 손님 같아서 아버지 품에 안겨 응석 한 번 부려보지 못했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몰라 늘 대하기가 낯설고 어려웠다.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가슴 속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추운 밤이었다. 집으로 젊은 여자가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녀는 털이 길게 누운 잿빛 코트를 걸치고 당당하게 우리 식구들을 훑어 보았다. 그 앞에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던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희미한 삼십 촉 전구 아래 두 여인 사이로 시간은 더디 흘렀다. 삽짝 밖 산 아래 공장 불빛이 밤새도록 시리게 반짝였다.
여자는 그날 이후로 방 한 칸을 차지한 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나 우리 남매의 눈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썼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왕벚나무처럼 아버지를 맞는 여자의 표정은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며칠 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버지는 여자와 함께 집을 나갔다. 나는 그날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행방에 밑줄을 그었다.
굽어 자라는 멀구슬나무에 온 마음이 잡혔다. 내 힘이 미쳐도 될 것 같으면 왕벚나무를 톱질해 버리고 싶다. 멋모르고 뿌려진 씨지만 단박에 패버려야 멀구슬나무가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이미 한몸으로 잘 살고 있다. 덧니처럼 아무렇지 않게 뽑아질 것이 아니어서 억지로 떼어내면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왕벚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은 부질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여자를 안 보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안 행사에 가면 어디서든 여자를 마주쳐야 했다. 반길 수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손바람이 좋아 내가 결혼할 때는 예단 음식까지 거들었다. 있듯 없듯 하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한 여자가 마뜩찮았다. 어머니는 그런 여자를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인들 오죽하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낡아 허물어지는 등에서 억지로 여자를 내릴 생각도 않았다.
왕벚나무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큼직한 꽃망울을 터트려 주변의 나무들 사이에서 으스대지만, 화려함은 잠시다. 여자에게도 왕벚나무의 무성한 잎처럼 단색의 시간이 길었다. 아버지는 함께하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화가 잦아지고 여자의 차림새에 까탈도 늘었다. 무엇 하나 반듯하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성정 탓에 곁의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여자는 나날이 위태롭고 팽팽해지는 긴장 탓인지 나이보다 수이 늙어갔다.
어머니는 여자에게 모진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당신이 울타리를 제대로 못 지킨 탓인 양했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일지라도 제 구실을 마쳐야 후회가 없을 것인데 여자를 보면서 얼어 떨어진 꽃눈을 떠올리시는 듯헀다. 미웠으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바람과 햇살에 생채기를 맡겼다. 입을 닫고 사는 일도 어머니 나름 세상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가슴에 고여 있는 것들을 한치 곁에서 바라보았다. 물 흐르듯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으니 궁색한 변명이 될까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외로움 속에 후덕함을 껴안은 충만의 삶은 뭉그러지지 않으려는 아우성이었다. 마음을 내린 어머니는 성숙한 영혼을 연습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야윈 손가라거럼 찬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는 멀구슬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옷장 속에서 이름자를 연습한 파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아버지와 우리 남매에 매여 평생을 잊고 살았던 당신의 이름을 되찾고 싶었던 것일까. 애를 쓴 흔적만을 남겨두고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셨다. 산수傘壽의 세월을 고이 접고 홀연히 떠나신 어머니의 위안일까. 멀구슬 나뭇가지의 떨림이 각다분했던 삶 자락을 들춰보는 어머니의 환한 웃음 같다.
멀구슬나무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왕벚나무에 자리를 내 주느라 등을 구부린 것인가 보다. 세상에 그냥 태어나는 것은 없다. 씨앗이 움을 트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또 연약한 몸을 안아 제 몸을 열어주는 관계는 귀하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 멀구슬나무와 왕벚나무도 태생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멀구슬나무가 싱그럽다. 아름드리는 아니나 잎이 떨어진 늦가을 나무 사이에서 청정하다. 왕벚나무도 멀구슬나무의 등에서 꼿꼿하게 잘 자라 있다. 멀구슬나무에 화답하는지 왕벚나무의 붉은 잎이 여린 손짓을 한다. 비운 듯 꽉 찬 멀구슬나무의 편안함에 내 마음마저 환해진다. 멀구슬나무의 둥지에서 어머니의 아름드리 품이 보인다. 그 품으로 내가 고스란히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