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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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두레박/황영선

에세이향기 2023. 11. 24. 15:16
두레박 / 황영선





우물은 거대한 종처럼 울림이 깊은 소리를 가졌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어둠 저 편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종소리를 닮았다. 고여있는 듯하면서 흐름을 가진 지하 어딘가에 숨어 흐르는 물길. 그렇다. 고요한 정인의 가슴에 담긴 사랑의 깊이와 맛이 이와 같지 않을까?
무미 무취한 듯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와 같은 우물! 그런 사랑의 우물을 갖고 싶다. 덧없는 갈증과 풋사랑의 허기를 달래던 젊은 날은 가고, 이제 나는 물 같은 사랑을 꿈꾸는 중년이 되었다.
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긴 여정이다. 잡으려고 하면 이미 저만큼 흘러가 버린 뒤이거나, 내 손이 닿지 않을 먼 거리에 가 있다. 내 안에도 어느새 동그란 물 무늬의 나이테가 숱하게 감겼다. 그러나 나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흐름을 잠시 멈추고 제 안의 소리를 듣는 우물처럼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던 참나무 두레박이나 박 바가지의 추억은 아름답다. 두레박으로 길어먹던 우물물이나 바가지로 떠먹던 샘물의 물맛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어딘가에 아직 우물이 남아 있겠지. 옹달샘이 있겠지. 두 손 가득 샘물을 움켜쥐고 먹던 그 물맛을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다. 우물은 사라져도 우물이 있던 자리는 영원하리라.

경주 국립 박물관 미술전시실에서 두레박을 발견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자투리 시간이 나 잠시 들른 그 곳에서 나무 두레박을 만난 것이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하는데, 줄은 삭아지고 없지만 두레박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라의 역사는 우물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물과 연관된 설화가 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나정이 바로 그 곳이다. 날이 밝으면 이른 새벽부터 제일 먼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우물이다. 그 우물가에서 하늘이 내려준 혁거세는 알에서 깨어난 것이다. 경주의 곳곳에 아직도 신라의 우물터가 남아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긴 두레박줄을 드리워 다시 한 번 물을 길어 올리고 싶다.
신라인들은 나무를 깎아 두레박을 만들어 썼던 모양이다. 박달나무의 속을 파내고 다듬어 만든 나무 두레박은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뭇결이 물 무늬처럼 떠밀려 와 파문을 일으킨다. 이 두레박의 물을 길어 먹던 옛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두레박만 남아 우물이 있던 자리를 추억하게 하는 것일까? 그들의 체온이 금방이라도 느껴질 듯 정감이 간다. 파인 김동환의 '웃은 죄' 란 짧은 시가 생각났다.

지름길 묻기에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 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우물가에서 오갔을 정겨운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내외가 엄격하던 시절에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떠준 일이 소문으로 번져간 모양이다. 어쩌면 웃은 죄에 얼굴 붉힌 죄까지 덤으로 얹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물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우물가의 그 모습을 누군가 몰래 훔쳐본 것이리라. 우물은 소문의 진원지였다.
이른 새벽 골목길은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들의 발소리로 깨어나곤 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물동이를 여 나르던 아낙네들의 모습은 우물이 사라지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더위를 식혀주던 냉수 한 사발이 그립다. 정수리까지 싸해지던 그 시원스런 물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대문은 시늉만으로 있을 뿐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시골집 대청 마루에 앉아 샘물에 탄 미숫가루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다면 이 무더위가 가셔질까? 밤이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멍석을 펴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지. 반딧불이 별똥별처럼 날아다니던 달리아가 피고 지던 그 마당가에 우물이 있었지.
나는 지금도 강가에 서면 지하 어딘가를 흐르고 있을 물길을 생각한다. 흐름을 잊어버린 내 가슴 안의 웅덩이도 언젠가 흐름을 되찾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놓쳐버린 두레박처럼 조각달이 떠있다. 놓쳐버린 두레박이 한둘이 아닌데, 내가 두레박을 던지던 그 우물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흘러가다 돌아보는 그 곳에 고향이 있다. 아무도 퍼가지 않는 우물은 이미 우물이 아니다. 사람 떠난 빈집처럼 쓸쓸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우물가에 감나무가 한 그루 오가는 계절을 말해주고 있을 뿐, 폐가가 늘어가는 마을 그 어디에도 두레박은 보이지 않는다.
물맛이 옛 물맛이 아니듯 고향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가슴 안에 들어와 있는 고향의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해갈 때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가? 고향을 떠나 지내다가도 위안 받고 싶을 때면 고향을 찾는다. 오지 뚝배기 같은 사람이 우직하게 지키는 고향. 그 곳의 물맛이 문득 그립다.
두레박을 던지면 우물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맑은 소리로 화답하곤 했다. 이른 새벽의 정적을 소리나지 않게 디디며 다가서던 우물가. 갈증이 더할수록 우물처럼 속이 깊은 사람이 그립다. 말씀 한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사람.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면 저 깊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물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우물물을 길어먹던 사람들은 참으로 순박했다. 지금 그 우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나는 그 우물이 있던 자리를 기억한다. 퐁당퐁당 누군가의 가슴에 두레박을 던져 다시 한 번 사랑을 퍼 올리고 싶다. 우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우물의 기억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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