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 / 정문숙
동 트기 전, 희붐한 거리의 풍경은 운치를 더하고 수시로 정체되는 도심의 길에 익숙하던 네 바퀴도 간만에 신바람으로 속도를 높인다. 근래에 남편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지 싶다. 집을 나서며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던 감정으로 충만해진다.
한때 우리는 달랑 지도만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한 숲을 찾아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는 말이 없어도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유난을 떠는 잉꼬부부라고 지인들의 눈총 아닌 눈총도 꽤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그럴 여유를 잃어버렸다. 부부 사이도 건조해져 아이들이 매개체가 되는 대화만 오고갔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떠난 후 둘만 남겨진 우리는 부부라는 오래된 이름으로도 피차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걷어 낼 무언가가 절실했다.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던 걸까. 서먹한 시간을 풀기 위해 남편도 고심했던 듯 나의 제안에 빠듯한 일정을 조절해서 시간을 만들었다. 간만에 의기투합한 탓인지 오래 전 그때처럼 우리는 여행을 준비하며 서로가 신이 났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남편에게 여행을 제안한 것은 얼마 전에 우연히 본 영상 때문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 씨앗을 뿌리고 또 뿌려 마침내 한 그루 종묘를 키워내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나무 한 그루로 시작하여 사막에 물길을 내고 마침내 큰 숲을 일군 그 남자의 모습에서 남편의 삶이 투영되며 엉켜들어 가슴을 울렸다. 사막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은 한겨울 언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만큼이나 지난한 일일 터이다.
자작나무 숲에 도착하니 어둠살이 걷히며 투명한 햇귀가 막 세상으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햇살이라는 조명 아래 수피가 터진 흰 몸체와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초록 잎들은 몸을 뒤척이며 수인사를 건넨다. 숲은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고요하다. 말로 형언키 어려운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나무의 숨을 깊숙이 받아 마신다. 숲의 청정함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휘도는 것이 느껴진다. 낱낱의 피톨들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기분이다. 문득, 발바닥이 근질근질 해진다. 어디선가 뿌리가 돋아나와 나도 한 그루 자작나무가 되는 건 아닐까. 실없는 상상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자작나무의 하얀색 수피에는 기름기가 있어 잘 썩지 않아서 오래 전부터 글이나 그림을 자작나무 껍질에 새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부부가 살가웠던 옛날을 반추하는 이 순간도 저 자작의 몸피 속에 아로새길 수 있음이리라. 서로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추억을 되살려 다시 길을 찾아 떠나왔듯이, 또 다시 서로를 향해 또 다른 모서리를 세우게 되는 날, 오늘의 순정했던 순간이 새겨진 목리를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 주기를 기대해도 좋겠다.
성큼성큼 자작의 숲길을 헤치고 앞서가는 남편의 등에 땀으로 무늬가 그려진다. 세상이라는 거친 숲에서 무던히도 헛손질을 했던 그였다. 어쩌면 그때 그의 등도 저렇듯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들 눈앞의 현실이 따가워 앞도 뒤도 살필 여유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도 우리는 지켜주지 못했던 그를 원망하느라 굳이 외면으로 일관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일의 앞면만 보고 뒷면은 살피지 않은 채 사업을 벌여 자주 허방을 디뎠다. 잦은 실패의 여파는 고스란히 가족들 몫으로 돌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살림은 팍팍해졌다. 아내의 눈빛에서라도 위안을 느끼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못했다. 상처가 상처를 들추는 시간이 이어지고 먼 밤하늘을 응시하는 뒷모습마저 유약해 보여 고개를 돌려버렸지 싶다.
남편의 앙상한 팔이 나뭇가지를 헤치며 길을 터준다. 그가 만들어 주었던 길이 더러는 물웅덩이거나 너덜겅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편한 길을 내어 주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뿐 그의 첫 마음은 한결 같았음을 안다. 오늘, 또 선뜻 앞장서서 걸으며 발아래 걸리는 잡풀을 걷어내어 길을 터준다.
겨울에도 자작나무는 자란다. 매서운 바람이 휘돌아 생채기를 낼 때 가로 무늬 수피로 겹겹이 몸을 감싸며 안으로 여문다. 두툼한 부름켜에 겨울을 쟁여 넣고 더 깊이 뿌리 내리며 봄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에 자작은 더 빛나는 나무다.
남편도 그랬다. 연이은 부도를 맞고도 주저앉지 않았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상처가 클수록 더 깊숙이 숨고르기를 하고, 더 높이 우뚝 서는 설원의 자작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 강파른 들판에 뿌리내리는 자작나무 같은 삶을 택한 그에게 내내 원망의 눈빛을 쏘다가도 문득 연민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에게 섭섭한 마음조차 없다는 듯, 실패의 기억조차 없다는 듯, 웃는 모습 뒤로 그만의 아픔이 먼저 읽히곤 해서였다.
무수한 말의 화살을 날리기는 했지만, 그러는 나도 아팠다고 이제라도 고백을 할까.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잠 못 들었던 시간들, 남편의 옆에서 한 발짝 비켜서며 애써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했던 지난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강물 같은 회한으로 굽이친다.
숲이 수런댄다. 뒷이야기가 앞의 이야기를 밀어 올리고, 오늘이 어제를 밀어 올려 나무도 굳건하게 일어서는 것이리라. 한 순간 한 순간, 고단하게 적어내린 나무의 역사가 모여 울울창창한 숲이 되는 이치를 이제야 깨닫는다.
세상에 허투루 지나가는 시간이 어디 있으랴. 비록 무수한 생채기로 고통의 시간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 순간들이 지금 내 삶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가 만든 큰 숲의 그늘에서 목청껏 노래하는 우리 가족의 지금은 자작나무처럼 삶의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남편의 뚝심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다.
잘 따라 오고 있는지, 남편은 무시로 뒤를 돌아본다. 저만치 나무들의 행렬에 서 있는 빛나는 자작나무 한그루다. 땀을 닦느라 이마를 찡그리니 주름이 옴팡지게 그려진다. 남편은 그의 역사를 이마에 일필휘지한 걸까. 굵은 흘림체로 된 또 한 권의 책이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니 걸음을 멈추고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나도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흔든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갈피를 넘기며 그에게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결국,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숲을 다스린다고 조근 조근 일러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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