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시모음
저물녘1
김영미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뒤란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아버지가 싸리꽃을 좋아하시던지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으시는가 했다
어둠이 성큼 마당을 기웃거릴 때
가을비속에 뒤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잔잔한 빗줄기가 오리나무를
성글게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레빗은 수그린 머리와
잔등을 쓸어내리며
네 사는 건 어떤가 묻는 것이었다
나무는 잔기침을 하며
오소소 떨 뿐이었다
외등으로는 자꾸만 낡아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저물어간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고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는 생각을 했다
싸리꽃은 내 그림자위에
붉게붉게 꽃을 토해내고 달그림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늙은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다
저물녘 2
김영미
그 여자 꽃분홍 시폰 블라우스 사이로
삐져나오는 살을 가까스로 당기며
하이힐에 온 몸을 싣고
흘러가네 출렁이네
담장 위 막 지기 시작한 배롱꽃
바람에 부스스 몸을 떨고
지는 빛을 감추려
여자의 화장도 짙어진 것일까
삼거리 곱창집, 소주 잔 기울이던 남정네들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네
아무도 부르지 않아도 자꾸
돌아다보게 되는 저물 무렵의 골목길
그녀는 삐져나오는 공허함을
허리춤에 잘도 숨기고
오래된 전파사 앞 트로트로 꺽인 내리막을
엇박자로 걸어가네
어쩐 일인지
꽃분홍은 서글프게 흔들리고
하이힐에 지탱한 그녀의 하루가
이제 막 저무네
사그라든 배롱나무 가지에 걸린
석양빛을 보다가
그녀, 무작정 걸음을 멈추네
산수유 필 무렵
김영미
겨울은 시계수리공처럼 집요하게
창밖의 시간을 응시했다
누군가 겨울의 웅크린 어깨를 흔들었을 때
구례 산동 상위 마을에 산수유가 피기 시작했다
그 것은 핀 다기 보다
번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시계 수리공은 완고한 시간의 나사못 하나를 풀어
충만한 빛의 물결을 마을로 보냈다
그는 나무의 부름켜 속에
숨어 있던 물 소리를 끌어 낸 것이다
나무의 우듬지에 돋아 나서는
끝없이 소곤거리며
저 먼 숲
고치 속의 벌레들을 깨우는 것이다
창문 밖 해빙의 시간이 내게 걸어왔다
꽃의 얼굴, 나무의 얼굴이
지상의 어떤 기운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겨울과 봄 사이의 균열과 간극을
쓸어내린다
겨울 선유도
김영미
민박집의 발목은
밀물에 젖어 있었다
헤집는 난로의 불씨로도
돌이킬 수 없는 어둠
아주머니는 우럭매운탕을 끓이며
까나리액젓에 겉절이를 무치며
허름한 등대가 되어간다
그녀는 오래된 버릇인 듯 생선을 손질한다
비린내 나는 일상은 비늘로 덮여있다
가시가 박혀 퍼득이는 그녀의 지느러미가 보인다.
먼데 섬의 집들이 젖은 눈을 껌벅인다
그녀의 목소리도 물너울에 잠겨간다
사는 일이란
막막한 시간을 소금 뿌려 절이며
가시조차 꾸욱 삼켜 보는 것
억류된 수평선
배들은 더 이상 길을 떠나지 않는다
등대는 이제 바닷길을
알려주지 못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담아둔
개조개가 갑갑한 듯 길게 혀를 내민다
북경소묘
김영미
북경의 후퉁
겨울 안개가 또아리를 튼 골목안
인력거에 올랐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그들은 이방인을 구경했다
끼니를 위해 푸성귀를 사는 이
무표정하게 눈길을 건네는 이
좁고 내장처럼 얽힌 길
골목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노란 모자를 쓴 아이가 소리 내어 울고
남루한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지친 듯 걸쳐져 있다
늘어진 피부의 여인이 식어버린 두부를 산다
인력거가 삐걱인다 연탄이 쌓인 집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골목이 희미해지며
인력거꾼의 등만 보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몰을 향해 휘어지는
그의 등은 핍진한 하루를 녹여
상형문자를 그린다
안개는 골목의 모든 시간을 가라앉게 한다
다리를 덮은 때 묻은 담요에 깃든 마지막 햇살
허물어져 가는 풍경 속에서도
인력거꾼은
죽을힘을 다해
생의 바퀴를 굴린다
*후퉁-좁은 골목 이란 뜻으로 베이징의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화차 설화(說話)
김영미
낮꿈처럼 짧은 생
운수행각하던 한 스님
오늘 입적하시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
바다를 향해
마음 흐드러진 적 있었지
눈 시리게 바라보다
스스로 제 빛깔에 겨워 깊어진 죄,
촘촘한 바늘 같은 가을 햇살아래
말하고 말았어
차가운 이슬에 젖은 밤을
부르트게 걷고 나서야
마음을 다 해도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
무릎을 꺾는 그 순간, 아찔한 향기의 죽비
내리친다
후드득 샛노란 말씀의 소나기
바다의 실핏줄이
훤히 드러난
그 산길 노오란 산국
오늘 한지위에서 온몸을 내어 말린다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다비식
바스락, 적멸을 향해 간다
차마고도*
김영미
티베트에서 윈난까지
마방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말이나 사람이나 말린 옥수수를 먹으며
길을 간다
우기에 접어든 차마고도
말들은 젖은 짐을 등에 싣고 고원을 지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협곡을 지나간다
하늘과 가까운길 차마고도
순례에 지친 어둠이 깃든다
엔젠가 하나둘 하늘에 올라
별자리가 되고 마는 마방의 운명
하늘 한 귀퉁이 끌어덮고 잠을 청한다
소금계곡을 간다 소금 한 줌 되지못한 생
늙고 비루한 말이 되어
부스럼 그득한 몸을 이끌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을 간다
삶에서 죽음까지는 지난한 길
들판의 꽃을 따라 걷던 노새였던 짧은 순간과
남은 목숨을 바꾸러 간다
한 덩이의 차를 구하러 간다
길은 내게 남은 시간을 내어 놓으라한다
도정의 끝에 바람보다 가벼운 죽음
걸음은 더디고 길이 흐려진다
*茶馬古道 차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옛길
근대의 잠
김영미
어디선가 짓무른 과일의 향기가
베어나는 봄날 오후
부산했던 시장 한 모퉁이
근대 한 바구니 시들어 간다
꾸역꾸역 몰려있는 좌판에 쭈그린 노모
허옇게 세어가는 머리가
쏟아지는 잠을
바구니에 꾸벅인다
시들어가는 근대와 지쳐가는 노모의 잠은
한 바구니 안에 얼크러져
서로의 볼을 부비며 위로한다
고단했던 무명의 시간들, 오래 걸었다
지나간 날은 먼지로 흐려지는
한 바구니 근대일 뿐
노모는 쭉정이만 남은 잠을
바구니에 넘치게 담는다
파장이다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근대는 생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한 뼘 남은 햇살이
노모의 등에 내려 앉는다
달팽이
달팽이 한 마리 기어 나와
수저를 놓고 그릇에 밥을 담는다
말없는 가족이 젖은 잎사귀에 앉아
축축한 침묵을 나눈다
빈 그릇에 남긴 서늘한 더듬이의 흔적들
달팽이는 개수대에 물을 붓는다
견딜 수 없는 눅눅함을 씻어내려
그릇들은 부딪치며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각기 제 집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닫아 건 저녁
달팽이 한 마리 숨겨둔 촉수를 꺼내
숲을 찾아 나선다
거친 길을 엎디어 느리게 지나간 흔적
한 걸음 건너뛰는 법 없이 낮고 깊어지는 슬픔
단단한 껍질 때문에 서로를 안아줄 수 없는 삶
이제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집을 벗어던진 달팽이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집속에 감춰둔 말들이 하나 둘 기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문장을
고통스럽게 완성한다
모란꽃살문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꽃살문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 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가시밭길에서 나무를 해요, 불씨없는 불을 때고 있어요
가위눌린 꿈이어요, 다시 돌아갈게요
물을 길어 밥을 지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 조금만
전 아직 한해살이 꽃이라도
한철 흐드러지게 피고 싶어요
어리석은 아픔을 조각해요
탁한 세상은
승선교를 지나고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바람이 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풍화하는 시간 속으로
봄을 건너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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