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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에세이향기 2021. 7. 28. 12:00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종점, 길은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막막하게 생의 변두리를 도는 자 외곽에서 중심을 구하는 자의 배경에는 벌판과 바람 길은 휘어져 어디에 닿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은 단지 스쳐가거나 봄볕에 살을 말리는 뿌연 것, 어느날 아주 먼 어느날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던 순간도 다 쓰고 나면 바람 빠진 폐타이어 닳아진 허울만 남아 한곳에 쌓일 것이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며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다 보면 지나온 길의 어디쯤 진실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고 갓 스물의 청춘이 노래한다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들판의 한끝 희망은 그런 대로 연명하기에 좋았으나 몸의 바퀴가 닳아 멈추었을 때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 햇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놓고 조는 듯 깨이는 듯 등허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길은 그때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감상, 그리고 한 생각> 이미, 막연히나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음일까. 종점(終点)으로 운을 띄우니. 담에 쌓아 올려진 '폐타이어'에게 삶을 묻는다.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어 묻는다. 지나온 길에 바람 빠지고 닮아진, 허울 같은 자신의 모습에 세월을 묻는다. 연명한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쉴 새 없이 먹고, 마시며, 숨을 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간다는 것. 그렇게, 꾸역 채워가기만 하는 삶. 죽음 앞에 마지막 한 모금 호흡까지 꼭 웅켜쥐기만 하는 삶. 그러나, 알고 보면... 산다는 건 지속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 죽음을 향해 꾸준히 질주하는 일. 하여, 비워야 할 때 흔쾌히 비운다는 건 얼마나 숙연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에서 소멸해 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연민도 솟는다. 하지만, 그게 꼭이 처연한 일은 아닌 것. 내가 비워진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 나로 부터 나를 내려 놓았을 때, 비로소 깊은 안식으로 다시 시작하는 저 따뜻한 길이 있을지니... 시인이 푸른 소매를 바람에 날리며, 그 길을 걸어갔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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