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정성희
바다는 늘 젖어있다. 항시 축축하다.
철썩철썩 쏴악, 어깨 너머로 초록빛 바다가 출렁댄다. 언젠가 내 어머니가 보퉁이 안에 담아온 낯익은 바다가 아니던가. 태반 같은 둥그런 봇짐 속에 저 푸르른 바다를 이고 세상 밖에서 허우적대는 딸에게 챙겨준, 바로 그 바다가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바다가 샘물처럼 고여있다.
거친 세상바람이 구멍난 인생을 스칠 때면 일상을 냅다 가로질러 바다를 찾는다. 제 키를 훌쩍 웃도는 절망의 질곡에서 엎어져 꼬부라질 때도, 긴 언덕길을 올라 바다로 향한다. 비릿한 갯내음에 묵은 갈증을 달래듯, 눈앞에 들어선 바다의 웅대한 위용을 내 안으로 쟁여 넣는다.
물속을 들여다본다. 삶에 지쳐 허둥대다 속절없이 시들어버린 인생의 허무가 비친다. 곰실거리는 물결 위에다 삶, 고뇌, 좌절…따위의 어휘들을 떠올리다 보면 금세 마음자락에 이슬이 맺혀 소금으로 흥건해진다.
짙푸른 바다 속으로 첨벙첨범 마음을 담군다. 몇 번의 들숨날숨만으로도 시퍼런 정기를 다 보듬은 듯, 생활에 조여든 숨통이 트인다. 나는 쪽빛 바다와 검푸른 파도를 인질로 삼아 내 속을 갉아댄 꺼그라기들을 물속에다 내던진다. 차르르 차르르, 아리고 쓰린 통곡의 세월이 파도에 쓸려간다. 군데군데 긁히고 흠집난 생채기도 바다자락 아래로 떨구어져 나간다.
파도는 득달같이 해면을 내달린다. 까딱까딱 물속을 자맥질하며 먼 여독을 바위에다 세차게 부려 놓는다. 꽉 막혀 있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뚫리는 듯, 닫힌 마음에서 시원스레 회오리바람이 인다. 순간 거대한 멍석말이로 밀려왔다 소쿠라지는 포말의 잔해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 먼길을 단숨에 달려온 곳이 일산간의 내려놓음이라니, 어찌 보면 사람살이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수평선 너머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자욱이 몰려온다. 사위는 갯벌처럼 거무튀튀하다. 조용하던 바다가 굉음을 울리며 울렁댄다. 바람의 억센 손아귀에 휘감긴 파도가 세차게 바다를 덮친다. 성난 태풍에 내몰린 바다가 휘청거리며 원죄 같은 시련에 시달린다. 파도는 허연 이를 드러내며 시퍼렇게 멍든 바다를 연신 후려친다. 바다는 이내 사멸의 냄새가 배어든 광란의 각축장이 된다.
처얼썩처얼썩 쏴아악, 바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동친다. 뱃고도 소리보다 더 크게 포효하는 바다가 밤새 목쉰 울음을 토한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었기에 저리도 모질게 입 안 가득 소금을 물고서 꺼억거억 울분을 삼키는 걸까. 싸한 해풍에 바다의 외로움이 밀려와 가슴속 깊이 여울진다. 이제서야 바닷물이 짠 연유를 알 것 같다. 멍든 아픔을 수장한 바다가 남몰래 흘린 눈물이 고여 소금물로 되었으리라. 무적함대가 지나가도 움쩍 않던 바다라고 삭혀내는 고통인들 없었으랴. 바다의 깊고 푸른 속내를 들여다보니, 내 눈물이 얼마나 하찮고 초라한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바다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검푸른 치마자락이 마파람에 건들거리자, 신이 난 철부지파도는 텀벙 텀벙 물 밖으로 튀어 오르며 바다를 자맥질한다. 찰싹대는 물소리가 바다생물들의 갈매빛 숨소리로 전해온다. 태고이래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억만의 생명을 키워온 푸른 고행에 내 마음마저 숙연해진다. 나는, 맨몸으로 추운 한파와 땡볕 더위를 등에 인 바다의 비릿한 짠 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며 두 손 모아 합장한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수평선 아래로 기운다. 바다는 붉은 빛으로 잠시간 요동치더니 이내 거칠었던 숨결이 잦아들며 버거웠던 하루를 여민다. 하늘은 채색구름 꽃을 피우고, 바다는 쪽빛으로 물든 풀꽃을 피워 푸른 어둠이 자욱한 하늘을 마중한다. 나는 수평선 너머로 아슴아슴 지는 성자의 임종을 바라보며, 석조에 타는 붉은 가르침을 내 가슴 안으로 쓸어 담는다.
사람과 바다는 멀리서 보라고 했던가. 지척에서 보는 삶은 통증만 자욱할 따름이다. 저 너머 들판에 허리 굽힌 농부가 평화롭게 다가오는 것은, 멀찍이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연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멀리서 보아 아름답다면, 그 속내야 어떠하든 구태여 보퉁이를 헤집어 세밀한 실체까지 꺼낼 필요가 있을까. 삶이란 겪는 사람의 몫이지 바라보는 사람의 차지는 아니기에, 복잡하고 아프기는 내남없이 마찬가지 아닐까.
수평선으로 테두리쳐진 거대한 궁륭위에 한 점으로 소멸되던 배가 뭍으로 끌려나온다. 고래 같은 덩치에 흠씬 놀라 뒷걸음친다. 인간의 피조물조차 바다에서 위엄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데, 인간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바다는 굽은 등을 펴고 처진 어깨를 곧추 세워 사람을 일으키지만, 한사코 그의 눈높이 아래에서 일렁인다. 그럼에도 수평선 너머의 아우성들을 내치지 못해 갈매빛 물그림자에 발목만 겨우 적시는 나를, 바다는 얼마나 안쓰러워할까.
그러한 바다는 입은 없고 귀만 있는 갯바위 부처 같다. 육신이 부서지는 푸른 고행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자들의 세정을 속속들이 헤아린다. 파도가 모래성을 쓸어가듯, 바다는 갯물에 젖은 소금기 밴 짜디짠 삶의 고랑들을 하나씩 지워낸다. 화닥화닥 달아오른 한여름의 열기와 휘이익 몰아치는 설한의 얼어붙은 상흔들이 희미한 그림자 되어 내 안에서 묽어진다. 바다는 자질구레한 시름으로 산화된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준다. 나는 광활한 바다를 통해 대자연의 가없는 너그러움과 웅숭깊으 겸허를 온 몸 가득 싣는다.
구름 사이로 통통하게 잘 여문 붉은 햇덩이가 쑤욱 솟아오른다. 쇳물을 끓여 부은 듯한 장려한 성찬을 두 눈 가득 주워 담는다. 어영차, 어귀차, 바다는 뜨거운 용광로가 되어 내 인생을 새빨갛게 풀무질한다. 순간 새로운 장이 드르륵 열린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사연들이 빗장을 풀고 세상 속으로 잠입한다. 파도의 뒤엉킴이 흩어진 내 안의 바다는 천지가 창조되던 날의 정적으로 돌아간다. 도나캐나 다 내어주고 비워낸 바다의 무구한 헌신과 무주상보시를 한 바구니 그득히 담고서 허리 굽혀 비나리한다.
'바다여, 바다여, 쪽빛 부처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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