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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집/김윤환

에세이향기 2021. 10. 5. 12:25

구겨진 집


김윤환

 


구겨진 채 여러 대(代)를 살아 온 집이 있었다
마당 귀퉁이 마다 빈한(貧寒)한 풀꽃이 피고
해마다 알맹이가 서툰 앵두가 자라고 있었다
할배는 새벽마다 헛기침으로 새들을 깨우고
어매는 식은 다리미에 숯을 넣곤 했다
얕은 처마 밑에 고인 그늘에는 타다만
숯덩이 다리미가 식솔들의 가슴을 다렸지만
화상(火傷)만이 눌러 붙어 주름이 더 짙곤 했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길을 만들 무렵
구겨진 집은 주름이 깊었지만
먼저 길을 떠난 아버지의 발소리가
젖은 마당을 다림질 하고 있었다
식은 채로, 숨죽인 채로
어매는 오래된 집에 연신 다림질을 했었다

제비꽃이 여러 번 피고 지는 동안
할배와 아비와 어미는 주름진 집을 떠나고
아이의 눈에는 그들이 남긴 눈망울이
마당을 하얗게 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과 마당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하얗게 펼쳐진 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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