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 주인석
씨 없는 싹이며 거꾸로 자라는 줄기다. 여느 생물과는 달리 굴광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어도 멸종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길러도 꽃이 피거나 열매 맺지 않는 줄기다. 필요성은 없으나 세대를 이어 유전되어 내려오고 퇴화되지도 않는다. 성숙한 남자의 뺨이나 턱에 자리를 잡고 남성만의 관능미를 자랑하고 액세서리 역할까지 한다. 오후보다 오전에 더 잘 자라며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을 먹고 산다. 몸에 있는 털 중에서 가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수염이 아닐까. 눈썹이나 코털, 머리카락은 이물질이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사명을 다한다. 이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꺼번에 잘리거나 밀려 나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수염은 아침마다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남성 상징 액세서리용이나 부랑자를 의미하는 아이콘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수구 구명으로 빠진다. 최근 들어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아진 아들이 입 주위에 난 털을 깎는다며 난리다. 아침마다 면도하는 남편 곁에서 참새처럼 조잘거리며 관찰한 지 일주일째다. 화장을 하려다 덥수룩해진 눈썹을 먼저 정리해야겠다 싶어 면도기를 들었다. 아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신도 수염을 깎아야 한다며 온 얼굴을 거품으로 덮고 문만 빠끔 내놓은 채, 한여름 산타가 되어 루돌프 허리에 팔걸이를 한다. 한창 호기심에 찬 녀석이라 참으로 귀엽게 느껴진다. 한참 동안 입을 이리 삐쭉, 저리 삐쭉거리며 제 아버지 흉내를 낸다. 아들은 처녀작을 끝내고 찰싹 달라붙으며 턱을 내 볼에 비빈다. 어디서 보긴 많이 봤나 보다. 아들의 보드라운 애교가 팔순 아버지의 그리움을 부른다. 매일 아침 깨지 못한 잠 찌꺼기들이 나를 괴롭힐 때 아버지는 수염으로 나의 잠을 물리쳐 주신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반쯤 열어 나를 안은 어버지를 쳐다보면 아버지의 얼굴보다 푸르스름한 턱이 먼저 보였다. 아직은 멀었다 싶은지 연이어 볼에 이마에 빠끔한 틈도 없이 분질러 댄다. 얼굴 전체가 발갛게 된 후에야 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팔과 수염은, 사랑의 수갑이고 촉수였다. 내가 폴짝폴짝 뛰며 따갑다고 난리 치면 아버지는 오히려 줄거운 듯이 나를 낚아채어 엉덩이를 치신다. 아버지는 저녁나절에 면도를 하셨다. 오전 중에 수염이 잘 자라는 원리를 아셨는지 바쁜 농사일 때문이었는지, 해거름이 되면 따뜻한 물에 세수한 후, 수염이 난 부분만 비누 거품을 바글바글 냈다.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앉아서는 신기한 듯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봤다. 아버지는 영락없는 산타였다.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산타가 실존 인물인 줄 알았던 나는 아버지 턱에 있는 하연 거품만 봐도 좋았다. 아버지가 혹시 산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동화에 빠져 들어갈 즈음, 날이 반들반들한 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했다. 하얗게 포장되었던 언덕바지에 한 줄 미끈한 길이 만들어졌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길이 만들어질 때마다 하얀 거품은 검은 찌꺼기들과 함께 칼끝에서 땅으로 휙휙 내동댕이쳐졌다. 산타의 환영이 사라지자 아버지의 턱은 매끈하고 파릇한 카라라 대리석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까칠까칠한 아버지의 사랑이 애 얼굴에 전해지다가 농번기가 되면 느슨해진다. 사랑이 느슨해진 만큼 늦잠도 늘어나서 밥도 못 먹고 학교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농사일이 바빠지면 아버지의 수염은 덥수룩해졌다. 육 남매의 학비와 생계를 사과 농사와 논농사로 둘러쳐야 했으니 어려움이야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힘이 들수록 수염이 길어졌고 덥수룩해졌으며, 나는 따끔한 맛을 볼 수가 없었다. 가끔 덥수룩한 수염이 내 얼굴을 쓸어내렸고, 아버지는 힘든 일상을 작은 위안에 얹어 두고 일터로 가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따가운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사랑이 가까이 있고, 아버지 어깨의 무게와 반비례함을 알았다. 길을 가다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자를 보게 되거나, 밤늦은 귀가에 며칠간 면도하지 않은 남편을 보면 나만이 느끼는 연민이 스르르 가슴을 타고 아버지를 부른다. 바스락거리는 삶이 여기저기서 삐죽거리며 올라온 흔적일까. 덥수룩한 수염은 아버지들만 가지고 있는, 애환의 흔적 같은 것이다. 까칠하게 짧은 수염은 부딪히면 따갑고 힘이 있으나 긴 수염은 아버지의 피곤한 일상처럼 쓰러져 눕는다. 결혼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중년의 고슴도치 딸이다. 그때의 따끔한 사랑이 내 볼에서 흘러내려 가슴속 잔잔히 밀려온다. 넉넉하지 못해 힘들게 살았으나, 아침마다 느꼈던 아버지의 까끌까끌하고 따사로운 사랑이 너무나 그립다. 아버지는 삶의 끝자락을 아침저녁으로 조물조물 만지며 일요일이 되기만 기다리신다. 육 남매가 되다 보니 일요일이면 누구든 한 사람은 찾아가 아버지의 수염을 깎아 드린다. 오빠들은 요리조리 잘 깎아 내는데 나는 보는 것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수염은 거품 속에서 당신의 삶처럼 하얗게 승화되어 찌꺼기마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하얀 턱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등 뒤에서 아버지를 안고 내 볼을 아버지 볼에 비벼 보았다. 아이처럼 빠진 이 드러내고 웃는 아버지는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이었다. 평생을 자식의 등받이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자식이 등 뒤에서 한번 안아 주는 것과 맞바꾸는 밑지는 장사를 하고도 웃으신다. 나도 아버지의 딸이라서 밑지는 장사하고도 웃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별로 하는 일 없다 여겼던 수염이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 까칠까칠한 그리움이 가슴을 타고 내린다. 아들의 보드라운 뺨을 비벼본다. 아들의 수염이 까칠까칠해질수록 나의 그리움 덩이는 더 커질 게다. 그때는 두 개의 그리움이 덩이를 안아야겠지. 아들은 품에서 보내야 하고 아버지는 가슴에서 보내야 하는 날이 자꾸만 가까워짐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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