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왕산터에서
기단도 버젓한데 기둥 없다고
기와가 스러졌다고 공간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바람은 누대의 습성대로
추녀에 달려 있던 쇠붕어를 찾습니다
잔해를 헤치고 마루판까지 뜯어간 산촌 필부들도
쉽게 아궁이에 던지지는 못했을 일입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동지까지는 달포도 남지 않았는데
초록 발심(發心)을 견지합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구름이 백운대 이마를 훤하게 씻어놓았습니다
터라는 어휘는 과거형이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감이기도 합니다
종결과 착수가 맞물리는 11월
폐업과 개업이 하나의 화환에 나란한 문구로 걸린 11월
끝까지 폐허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도 있음을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전영관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실천문학사 2016)
부왕사터에 남은 부도.
[감상]
폐사지! 한때 수많은 스님이 예불 올리고, 밥을 짓고, 공양하고, 공부하고, 열띤 토론도 하고, 허허 웃으며 차도 마셨던 곳! 깨진 기왓장과 벽돌과 그릇 조각에서 옛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 아 이곳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이 스며 있는 곳인가? 아 이곳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이 담겨 있는 곳인가?
폐사지에서 눈을 감으면 우리는 저절로 과거로 갑니다. 폐사지에서 귀 기울이면 시간의 저쪽에서 선배들이 손짓하는 것이 보입니다. 다가가 그 손을 잡으려 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폐사지!
부왕사터는 북한산성 내에서 이제 대표적인 옛 절터가 되었습니다. 절터가 있을 리 없을 것 같은 깊은 골짜기에, 참으로 아늑하면서도 의외로 드넓고 해맑은 곳에 부왕사터가 있습니다. 약 300여 명의 스님이 기거했으니 중흥사와 더불어 북한산성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스님들이 주석한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 개의 돌 기단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제법 큰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려주는 건물터에 들어서면, 옛 스님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돌 기단에 앉아 명상하노라면, 옛 부왕사 누각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300여 명의 스님이라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했을까?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을까? 300여 명의 스님이 한꺼번에 들어갈 법당은 없었을 것 같은데, 예불은 어떻게 했을까? 목욕은 어떻게 했을까? 삭발은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폐사지의 명상은 계속됩니다.
전영관 시인은 폐사지의 풍경을 서글픈 듯 익살스럽게 묘사합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시인이 부왕사터를 방문한 것은 11월 말, 동지가 달포도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불두화 이파리는 초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불두화 이파리가 은근히 오래 초록을 유지하는가 봅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시인의 문장이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이라고 한 이유는 폐사지의 감회를 표현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기단도 버젓한데 기둥 없다고
기와가 스러졌다고 공간까지 무너진 건 아닙니다
바람은 누대의 습성대로
추녀에 달려 있던 쇠붕어를 찾습니다
잔해를 헤치고 마루판까지 뜯어간 산촌 필부들도
쉽게 아궁이에 던지지는 못했을 일입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동지까지는 달포도 남지 않았는데
초록 발심(發心)을 견지합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구름이 백운대 이마를 훤하게 씻어놓았습니다
터라는 어휘는 과거형이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감이기도 합니다
종결과 착수가 맞물리는 11월
폐업과 개업이 하나의 화환에 나란한 문구로 걸린 11월
끝까지 폐허라고 말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도 있음을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전영관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실천문학사 2016)
부왕사터에 남은 부도.
[감상]
폐사지! 한때 수많은 스님이 예불 올리고, 밥을 짓고, 공양하고, 공부하고, 열띤 토론도 하고, 허허 웃으며 차도 마셨던 곳! 깨진 기왓장과 벽돌과 그릇 조각에서 옛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곳, 아 이곳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이 스며 있는 곳인가? 아 이곳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이 담겨 있는 곳인가?
폐사지에서 눈을 감으면 우리는 저절로 과거로 갑니다. 폐사지에서 귀 기울이면 시간의 저쪽에서 선배들이 손짓하는 것이 보입니다. 다가가 그 손을 잡으려 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폐사지!
부왕사터는 북한산성 내에서 이제 대표적인 옛 절터가 되었습니다. 절터가 있을 리 없을 것 같은 깊은 골짜기에, 참으로 아늑하면서도 의외로 드넓고 해맑은 곳에 부왕사터가 있습니다. 약 300여 명의 스님이 기거했으니 중흥사와 더불어 북한산성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스님들이 주석한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 개의 돌 기단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제법 큰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려주는 건물터에 들어서면, 옛 스님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돌 기단에 앉아 명상하노라면, 옛 부왕사 누각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300여 명의 스님이라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했을까?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을까? 300여 명의 스님이 한꺼번에 들어갈 법당은 없었을 것 같은데, 예불은 어떻게 했을까? 목욕은 어떻게 했을까? 삭발은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폐사지의 명상은 계속됩니다.
전영관 시인은 폐사지의 풍경을 서글픈 듯 익살스럽게 묘사합니다.
“사천왕이 출타 중이니 승병인 양 불두화가/ 법당 협시를 지속합니다”
시인이 부왕사터를 방문한 것은 11월 말, 동지가 달포도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불두화 이파리는 초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불두화 이파리가 은근히 오래 초록을 유지하는가 봅니다.
“나의 문장은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긋습니다”
시인의 문장이 ‘삽날에 찍힌 뱀의 몸짓’이라고 한 이유는 폐사지의 감회를 표현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계절병으로 흔들리다 풍경에 밑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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