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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에세이향기 2022. 3. 25. 14:23

몽돌 해변에서 만난 소리 / 최선욱

 

 

파도를 앞세우고 몰아오던 바닷바람이 절벽을 돌면서 순해져 섬마을로 마실 오듯 넘나드는 곳쯤에 내가 서 있다. 일행 중 앞서 가던 이가 깎아지른 절벽 중턱쯤 깊숙이 파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 보이는 너럭바위가 기氣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당자리라 한다. 그곳에 오르려면 물 빠질 때를 맞춰 와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대지 위 삼라만상에 광활한 우주의 기운이 스미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 앞에 서면 언제나 숙연해지는 것은 그 광대무변함 때문만이 아니다. 바다는 세상의 온갖 오물을 달게 삼키는 대신 끊임없이 새 생명을 만들고 생기를 뿜어내준다. 그 넉넉함으로 선순환의 질서를 베풀어 주기에 어머니의 품 같은 바다 앞에 서면 겸손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스산한 3월의 새벽은 겨울 끝자락의 매운 바람을 밀어내며 밝아온다. 옷깃을 세우고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오감이 다 열리는 듯하다. 심호흡을 하자 바다의 기운이 온몸에 스며든다. 끼룩끼룩 갈매기의 날갯짓을 쫓아 시야는 한없이 넓어진다. 두 손을 한껏 뻗어 기지개를 켠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해조음에 콧노래로 답하며 물 마른 몽돌을 밟아본다. 따뜻한 날이라면 맨발로 걸어도 좋을 감촉이다.

 

온 세상을 뒤엎어 버릴 것 같은 기세로 파도가 달려온다. 누군가에게 분노라도 쏟아부을 듯 거친 숨결이더니 해안가에 이르러서는 포기한 듯 털썩 주저앉아 흰 거품만 쏟아놓는다. 이 하얀 물거품들이 몽돌을 품고 있다 내려놓으며 남기는 여운이 노래가 되었는가.

 

“차글차글 차그르르!”

“차글차글 차그르르!”

 

여느 해변에서 들어보지 못한 결 고운 소리다. 몽돌들의 아우성이거나 돌멩이들의 마찰음이라면 분명 둔탁한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다가갈수록 비파 소리보다 더 기막히게 보드라운 소리다. 인간들이 풀이할 수 없는 물분자들의 신비로운 속삭임이라고나 할까?

 

해변을 무참히 훑고 사라지는 파도, 집채만 한 바윗덩이조차 삼켜버리는 파도 앞에 몽돌, 이 작은 것들이 무슨 항변인들 할 수 있으랴. 억겁의 세월을 물살에 쓸려 사는 몽돌은 제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때론 속울음을 물 밖으로 품어내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벽에서, 갯바위에서 떨어져 나올 때의 아픔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돌멩이는 굴러야만 한다. 물과 뭍의 경계선에서 돌멩이가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또다시 거칠게 할퀴는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는다. 차라리 물의 흐름에 제 몸을 맡겨버림이 오히려 덜 고통스럽다는 것을 몽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항명을 포기하고 제 운명을 아름다운 고통으로 받아들일 때 울퉁불퉁 돌덩이는 모난 곳이 깎여지기 시작했으리라.

 

이젠 차갑고 딱딱한 돌멩이가 아니라 온기 어린 부드러운 몽돌이 되었다. 각진 데가 부딪히고 깎여 동그래질 때까지 오랜 세월 구르고 굴러 여기까지 왔을 몽돌, 그 아득한 역사의 시원始原을 조물주나 알까? 닮은 듯 서로 다른 모양과 빛깔을 가진 몽돌 몇 개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만져본다.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더욱 단단해진 몽돌의 표피마다 얼룩진 무늬들, 세파에 순명할수록 작아지는 몸뚱어리에 남겨진 강박의 표징도 다채롭다.

몽돌도 인간의 운명처럼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겠지. 인간과 다른 점이라면 이것들은 한 알갱이 모래로, 흙으로,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질 고통의 세월을 계수할 줄 몰라 차라리 행복한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몽돌마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한결같이 동글납작 편안한 얼굴들이다.

 

서서히 바람이 잔다. 이제는 화해의 시간이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파도는 사라지고, 해변엔 헤쳐 모인 몽돌들과 일렁이는 잔물결의 만남이 이어진다. 마치 모래 속에 뿌리라도 내릴 듯 버티고 있는 몽돌, 그 위를 잔물결이 애무하듯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마조히즘의 탄성인가.

 

“자글자글 자그르르!”

“자글자글 자그르르!”

 

만남과 헤어짐이 한순간에 있어 더욱 아쉬운 이것들이 만들어 낸 가락이 내 발목을 붙든다. 고요히 눈을 감고 추억의 소리 상자를 열어본다. 초겨울 등하굣길, 나무 밑 응달진 곳에 엉성하게 일어선 서릿발이 밟힐 때 부서지는 소리다. 툇마루 옆에서 머릿수건 질끈 맨 어머니가 키질 마무리할 때 곡물 쏟아 내리는 소리다. 외할머니가 손때 묻은 대나무 참빗으로 내 머릿속을 깊게 훑어 내릴 때 나던 소리다. 고향집 언저리를 맴도는 소리들이 그립다. 유년의 풍경들이 몽돌 소리 속에서 연신 피어오른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사느라 그리움을 잊은 이가 있거든 한번쯤 몽돌해변에 가 귀를 기울여 보라. ‘차글차글 차그르르’ ‘자글자글 자그르르’ 신비로운 선율을 타고 정겨운 추억들이 하나 둘 피어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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