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마당 / 장금식
마당 한구석에 빗자루 하나가 세워져 있다. 손잡이는 손에 잡힐 정도로 굵고 중간중간 칡넝쿨에 단단히 묶여 있다. 밑 부분은 머리를 묶듯 야무지게 여러 갈래로 묶어놓았다. 수숫대로 만들어 부드럽다. 몸체를 많이 부린 탓에 닳고 닳아 앞부분보다 뒷부분이 짤막하고 몽땅하다. 당당하게 서 있는 몽땅 빗자루, 할머니 마당의 바탕화면이다.
만물이 잠든 새벽. 사악∼싹, 할머니 비질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깔끔하게 청소된 앞마당과 눈인사를 하노라면 옆 마당 꽃밭에서 나무와 꽃들도 눈을 떴다. 빗자루 높이에 맞추어 허리를 구부리고 손목에 강약과 완급조절을 하며 해 놓은 비질. 보일 듯 말 듯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은 바로 할머니가 겪은 인생사를 한 땀 한 땀 박음질해놓은 것과도 같았다. 옛날 풍경이 된 할머니 마당은 그간 느슨했던 내 기억을 조여 준다.
요즈음 신종 코로나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집에 있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저녁 준비에 바쁘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니 초기에 바이러스로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식사준비 스트레스로 바뀐다. 사서 고생하는 면도 없진 않다.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를 해도 식구들 모두를 마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 취급하며 끓는 물로 여러 번 소독까지 하니 일은 배가 되고 심신은 고달프기 마련이다.
빗자루 외에는 청소도구조차 마땅치 않았던 옛날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순간, 쓸고 닦고 털어내는 것을 묵묵히 잘도 해내셨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바이러스가 불러온 할머니의 기억이다. 내 마음에 남아있던 세균을 몰아내며 할머니를 소환해내기까지, 할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이다.
옛 조상들의 삶이 지난했듯이 우리 할머니 마당도 늘 반듯하고 고른 땅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자갈이 날아들거나, 빗물이 고여 질퍽하고 물컹해진 땅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식솔들 밥을 위해 할아버지는 10년간 만주에 가 계셨다. 할아버지가 멀리 계신 동안 할머니는 어린 세 아들을 홀로 키우셨다. 행여 남편 소식이 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다 우체부 기별이 오는 날은 버선발로 뛰어나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활비가 오나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중간에 전달사고가 있었는지 기대는 매번 무산되었다니 혼자 그 속앓이를 어찌 감당하셨을까.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티를 내보이는 걸 큰 흠으로 여기셨다. 동래 정씨로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커서 속울음을 삼키며 쌓은 질펀한 내적 고뇌는 얼마나 끈적거렸을까. 왜소하고 연약한 할머니지만 세 아이는 물론 시동생 둘과 시누이 세 명도 자식처럼 돌보아야 했다.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신 후, 할머니는 자식 둘을 더 낳으셔서 대가족을 거느리신 작은 거인이 되셨다.
대가족 입을 해결하는데 부엌일만 할 처지는 아니고 들판도 할머니 손길을 기다렸다. 이뿐이랴. 식솔들 먹이기도 급급한데 정이 많고 베푸는 성품에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행려자들과 정신적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집에 들여 숙식을 해결해주기가 일쑤였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연민은 많은 이들의 울타리가 되고 가림막이 되었다.
훗날, 11명 손자 손녀들에게도 아낌없이 인정을 베푸셨다. 손수 채소를 길러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순금 장신구를 공평하게 다 해주셨다. 할머니에게서 받은 금팔찌는 나를 받쳐주는 정신적 보배가 되었다.
정 많고 베풀기 좋아하는 할머니 삶에도 심한 풍파가 있었다. 당신 큰아들이 사업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것을 보았고 심장질환을 겪던 그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을 보았다. 쓰라리고 굴곡진 삶의 씁쓸함을 털고 바람결에 묻어온 먼지 낀 가정사, 세상사를 쓸어내기에 손발은 물론 몽땅 빗자루는 닳고 닳았다.
가족을 위해 새벽이면 몽당비로 마당을 정성스럽게 쓸며 하루를 밝히신 할머니. 자신을 불태워 주변에 온기를 주며 희생을 미덕으로 삼으신 할머니. 한 치 부끄럼 없이 당당하셨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우셨던 할머니.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103세까지 장수하시며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눈을 감으셨다.
지금도 할머니 마당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옆 화단에는 사과나무, 채송화, 봉선화, 장미와 목단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 생애는 늘 몽당비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인생사를 수놓은 마당은 할머니 일생을 담은 역사이고, 집안을 반듯하고 깔끔하게 일군 상징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할머니 가슴 마당에서 생명력을 얻고 열매를 키운 꽃과 나무들이었다.
따뜻한 집 안에서 잠시 잠깐 세척기로 설거지하고 청소기로 청소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나날이다. 세척기와 청소기 소리가 삐걱댈수록 할머니 마당에서 들려오는 새벽 비질 소리가 새벽달에 익어간다. 내 삶의 마당, 그 바탕화면엔 어떤 빗자루를 그려 넣을까, 붉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새벽달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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