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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이방주

에세이향기 2022. 9. 25. 19:41

댕댕이덩굴꽃에 어리는 어머니

 

 

 

 

아직은 추억을 더듬으며 살 나이는 아니다.

나는 이렇게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다. 그런데도 다른 이의 작품은 멀리하고 과거의 내 졸작에 취해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는 때가 많다. 그뿐 아니라 꽃을 보면 미래를 그리워하지 못하고 이제는 보내드려야 할 어머니만 보인다. 들꽃을 보면 민중이 보이고 민중의 삶이 보이고 민중의 아픔을 보아야 하는데 어머니가 보인다. 아무리 부정해도 추억에 젖어 추억을 더듬으며 애상에 젖는 노년의 생리를 어쩔 수 없는 나이인가 보다. 떨쳐 버리자. 추억의 미로에서 뛰쳐나오자. 인제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지는 양평 대명리조트에서 자고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직도 깨지 않은 친구들 옆에서 부스럭거리느니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제 세미원과 두물머리 물소리길을 이십 리 남짓 걸어서 몸이 가뿐해졌다. 주변 산야가 아름답다. 비가 내린다던 하늘은 푸른빛이 오히려 곱다. 어머니는 하늘빛이 고운 이런 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셨다. 그리움은 무엇일까. 나의 그리움은 대상도 방향도 잊어버린 채 정서만 남아 여기까지 따라와 있다. 과거로 향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의 그리움은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한다. 지금의 사랑이어야 하고 내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농가마다 울타리에 꽃이 한창이다. 리조트나 호텔 정원에 비해 꾸밈없어 편하다. 리조트 앞 어느 농가 울타리에서 댕댕이덩굴꽃을 발견했다. 산에서 난 것만큼 곧게 쭉쭉 뻗어가지는 못했다. 울타리에서 다른 덩굴풀과 엉켜서 간신히 꽃을 피웠다. 꽃은 작은 포도송이처럼 몽글몽글 연두색이다. 작은 꽃에도 꽃잎이 있고 꽃잎 속에는 암술이 있고 수술이 있다. 작은 꽃도 그리움이 있다. 짙은 남빛 열매가 소복하게 달릴 가을을 그리워할 것이다.

어머니는 여름 내내 댕댕이 덩굴을 끊어 모으셨다. 가을이면 여름내 끊어 모은 댕댕이줄을 엮어서 무엇이든 만드셨다. 달빛이 사랑채 용마루를 넘어오는 차가운 마루에서 밤을 새

우셨다. 커다란 댕댕이보구리, 댕댕이채반, 허리에 찰 수 있는 댕댕이바구니 같은 집에서 쓰는 그릇이란 그릇은 못 만드시는 게 없었다. 그것을 팔아 가용을 구하는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이 다 무너지도록 질기고 질긴 댕댕이줄을 엮었다. 어머니 손가락은 남자 손처럼 마디가 굵어지고 엄지와 검지 끝이 갈라져서 피가 났다. 아니 성한 손가락이 없었다.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어쩌다가 숟가락을 집다가도 깜짝깜짝 놀라셨다. 지문조차 만질만질하게 지워졌다.

어머니는 갈라진 손가락으로 댕댕이줄을 엮으며 마음으로는 무엇을 엮으셨을까.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질긴 댕댕이줄마다 엮이는 질긴 아버지가 보인다. 콩이 닷 말쯤 들어갈 만큼 커다란 보구리의 댕댕이줄 결마다 엮인 어머니의 한이 보인다.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소홀했던, 그래서 섭섭함만을 남기신 아버지, 아니 어머니에겐 섭섭함을 넘어서 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닷 말씩이나 드는 보구리에도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한 사람의 여인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가득할 것이다.

옛날 우리 아버지들은 다들 그렇게 우리 어머니들에게 한을 남겼다고들 한다. 나라를 위해 집을 떠나 있고, 공부를 위해 집을 비우고, 또 무엇을 위해 살림과 사람살이를 어머니에게 몽땅 떠맡기고 떠나있는 것이라 했다. 그래야 이상적인 남자려니 했다. 국가나 사회라는 명분도 있겠지만 이면에는 곁길도 걷고 곁가지에 마음이 가 있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 아버지 원백園白 선생만 하였을까. 아버지는 종묘제례, 사직대제 뿐 아니라 그 밖에 크고 작은 이유, 정당하기도 하고 정당하지 못하기도 한 이유로 위아래 가족들을 어머니께 떠맡기고 번번이 집을 비우셨다.

살림살이에 지친 어머니는 외로움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인 어머니는 달이 밝은 밤을 댕댕이줄이라도 붙잡고 외로움, 고독, 혼자라는 고통을 견디어내셨다.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만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을이면 숱하게 만들어낸 어머니의 댕댕이줄 공예품은 예술이 아니라 가슴에 박힌 고독의 옹이이다.

지금도 고향집에 가서 보면 어머니의 보구리가, 어머니의 댕댕이줄 채반이 무너지는 바람벽에 비스듬히 걸려있다. 어머니의 갈라진 손가락이 응어리 되어 걸려 있다. 채반 가득 보구리 가득 아직도 못다 엮은 어머니의 한이 매달려 있다. 지금도 산소 제절에는 댕댕이 덩굴이 아버지를 감으며 뻗어가고 있다. 이 아침에는 아마 댕댕이덩굴꽃도 피었으리라.

 

, 나는 어느새 또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아직도 어머니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고향에서 천리 머나먼 길에 나와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어머니 품을, 어머니 그리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사랑해야 할 것이 많은 지금을 그리워하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그리움을 품고 있을까. 이제부터 어떤 아버지로 남아야 할까. 나의 그리움은 지금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내일을 그리워해야 한다.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변화에 새롭게 다가가고 싶다. 무쇠솥처럼 더디게 뜨거워지지만 쉽게 식지 않게 다지고 달구어야 할 일이다. 따뜻해서 좋지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사랑법을 벼리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마도 그런 아버지를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식들만은 그런 아버지가 되기를 소망하셨을지 모른다.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소망이 또한 그러하다. 뜨겁지는 않지만 크고 은근하게 품어주는 사랑 말이다.

댕댕이덩굴 작은 꽃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지금 내 그리움이 되어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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