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어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걱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진다 ​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 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

좋은 시 2024.03.26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 카트만두를 여행하는 것과 카트만두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았지만 밑도 끝도 모를 당신이라는 오지를 살아내면서 당신이라는 미로를 살아내면서 아직도 우리는 서로의 중심에 닿지 못했으니 서로의 극점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서로의 오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미로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해도 좋을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를 함께 살아내는 것 우리가 백 년을 해로하는 방식일 겁니다 ​

좋은 시 2024.03.2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시 2024.03.26

아버지의 우파니샤드/ 손광성

아버지의 우파니샤드/ 손광성 여남은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어느 날 마루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는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담장 너머로 내 또래 아이가 토끼 귀를 잡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토끼가 불쌍했습니다.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토끼는 왜 귀를 잡지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꼼짝 못하니까." 순간 아버지 곁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습니다. 놈은 어디를 잡아야 꼼짝 못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 고양이는 어디를 잡지요?" "목덜미를 잡지." 나는 쓰다듬는 척하다가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번쩍 들어올렸습니다. 놈은 발톱을 세워 할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으로 오다가 두엄을 헤집고 있는 닭이 눈에..

좋은 수필 2024.03.25

고리 / 전미경

고리 / 전미경 침묵이 흐르는 반가다. 닫힌 문마다 정교한 이음이 가문의 결로 자리한다. 가옥을 지키고 있는 텅 빈 뜰엔 고요와 쓸쓸함만이 사대부의 흔적을 대신한다. 바람도 잠시 걸음을 멈춘 듯 작은 움직임조차 일지 않는 비움의 터다. 솟을대문을 사이에 두고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격랑의 역사 속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안과 밖을 드나들며 고리를 만졌을 손길이다. 둥근 테가 가문의 윤기만큼 반지르르하다. 고리를 잡으며 밀고 당긴 시간 속, 어르고 달래는 연습은 감정의 빗금을 수없이 긋고 지우면서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다. 마음의 깊이를 저울질하던 그 고리를 잡는다. 손끝에 닿는 촉감이 쇠붙이의 딱딱함보다는 곡선의 부드러움이 먼저 가 닿는다. 전통가옥에서 만나는 근엄함보다 심연의 성찰을 먼저 안았을 고리다. 통하..

좋은 수필 2024.03.25

칼을 갈다 / 김이랑

칼을 갈다 / 김이랑 칼 갑니다. 칼 갑니다. ​ 누군가에겐 눈물 섞인 소리요, 또 누군가는 화들짝 놀랄 소리다. 오뉴월 서리 내리는 소리에 나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 저만치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멀어지고 있다. 마침 속이 출출한 터, 허기를 채우기 위해 포구로 나간다. 횟집 상가에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끼쳐온다. 몸속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원시의 본능이 발동한다. ​ 꿈틀대는 고기들을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문어, 넙치, 우럭, 해삼, 개불…. 싱싱한 먹잇감을 고르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바깥쪽에서 강한 마찰음이 들려온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담벼락 음지에서 칼을 갈고 있다. ​ 위잉, 쨔르르르. ​ 칼날을 고속 연마기에 대자 자잘한 불꽃이 흩어..

좋은 수필 2024.03.23

쌈 / 강여울

쌈 / 강여울 부모님은 친정에 있는 동안 잠시라도 좀 쉬라며 나를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점심상을 차리셨다. 양념불고기와 푸성귀들이 먹음직스럽다. 친정 부모님은 쌈을 좋아한다. 나도 쌈을 좋아한다. 나를 시집보내고 두 분이 쌈을 드실 때면 어김없이 내 생각에 목이 메었다고 했다. 나의 친정 부모님은 거의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면서도 쌈(싸움)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귀찮고 힘든 것을 참았고, 좋은 것은 서로 권하고 양보했다. 어릴 적 나는 다른 모든 부모들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면서 함께 살며 바라본 시부모님은 거의 날마다 쌈을 했다. 우리 부부는 친정 부모님처럼 정답지도 않았지만 보이게 쌈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끝도..

좋은 수필 2024.03.21

해우소(解憂所)에서 /이방주

해우소(解憂所)에서 /이방주 산에 가지 못하는 일요일이다. 이 나이에는 조금이라도 땀을 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운 우암산에라도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상당공원에서 내려 삼일공원에 올라가려니 진땀이 바작바작 났다. 동상은 넘어진 정춘수 목사의 좌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랫배가 쌀쌀 아파졌다. 어제저녁의 탐욕이 말썽을 부리는가 보다. 급히 공원 주차장 옆에 있는 간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타락의 오지奧地를 잘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내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자니 플라스틱 상판이 '우지직' 죽는 소리를 내었다. 아랫배에서 꿈틀대는 그놈이 그새 몸무게를 늘렸나 보다. 갑자기 아프던 배가 사르르 정상으로 돌아..

좋은 수필 2024.03.21

하얀 민들레/강여울

하얀 민들레 강여울 “옥상에서 지심을 뽑았더니 몸이 고되구나.” 퇴근해서 현관을 들어서자 어머님이 오늘 한 일을 이야기하고는 엉금엉금 방으로 기어가신다. 지심 뽑을 땅이라고 해봐야 예전에 김장 배추를 절이던 커다란 고무통 하나와 화분 몇 개일 뿐이다. 흙 밟을 일이 거의 없는 도시에 살다 보면 늘 흙이 고프다. 그래서 흙을 옥상 화분에 담아놓고 그가 부리는 마술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흙은 얼마전부터 고추 모종 아래 민들레 몇 포기를 살려내 하얀꽃을 피우고는 바라보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 지난해 봄, 먼 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갔었는데 도시에서 보기 힘든 하얀민들레 군락이 있어 씨앗 두어 대공을 뜯어 왔었다. 옥상 흙에 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흩어놓았는데 기특하게도 몇몇 씨앗을 품고는 싹을 틔우..

좋은 수필 2024.03.21

가재미가 돌아오는 시간/박금아

가재미가 돌아오는 시간/박금아 ​ ​ ​ ​ 바닷속보다 깊이 누웠다. 물살을 가르던 꼬리도 지느러미도 고조곤히 접었다. 도다리쑥국을 끓이려고 도다리를 사러 갔다가 대나무 채반에 담긴 하이얀 가재미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삼십 마리쯤 되려나. 그곳 사람들이‘미주구리’라고 부르는 물가재미였다. 가재미를 손질하던 여인이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새빅에 잡은 기다예. 만 원에 가져가이쏘오.” 뼛속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은 한때 목숨이었던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비싸다고 생각해서 망설이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구워서 먹으면 고소하다며 대답도 듣기 전에 옆 소쿠리에 담긴 것까지 담아주었다. “알배고 낳니라꼬 예비서 그렇지 꾸 무모 꼬시다예. ” 알을 품고 낳느라 살이 다 빠..

좋은 수필 2024.03.17

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 /정해경

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 정해경 택배 상자에 담겨 해를 넘기고 내가 그 여자와 마주한 건 햇빛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녀가 청소를 하려고 상자를 치우던 중 그제야 남아 있는 나와 몇몇 친구들을 기억해 냈어요. 까칠하게 돋은 수염처럼 군데군데 싹이 돋은 것과 말라비틀어진 채 한 뼘이나 되는 줄기를 뻗은 것, 어느 것 하나 볼품없었죠. 그래도 버릴 수가 없던지 대충 씻어 찜솥에 넣었는데 나는 거기서도 제외되었어요. 쪼글쪼글 말라 긴 줄기가 달린 것이 바로 나였거든요. 쓰레기 봉지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 여자가 다시 집어 들었어요. 그 순간의 선택이 나를 벼랑 끝에서 구했습니다. 여자는 조그만 수반에 찰랑하게 물을 받아 거기에 비스듬히 나를 눕혔어요. 그러고는 햇살 넉넉한 창가에 자리를 ..

좋은 수필 2024.03.17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고경자 기대는 잔잔한 빗금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얼굴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빗금보다 섬세한 무늬로 햇살의 크기만큼 잘게 부서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서성댄 증거입니다 왈칵 쏟아내는 울음이 두려워서 눈물을 모른 척 해봐도 번번이 실패라는 누룩이 증식되어 발효되기까지 습지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의 굴곡이 아닐까 하여 쉽게 돌아볼 수 없습니다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그림 앞에서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이행단계라는 또 다른 건널목이 있어 차단막이 내려진 기찻길 앞에 선 것 같은 초조함 때문일까요 예고 없이 찾아온 빈혈로 쓰러지는 상상을 하면서 때때로 꿈속에서도 이유 없이 쓰러지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 하나로 명명되어진 ..

좋은 시 2024.03.17

섬/김이랑

섬 / 김이랑 하루 쟁기질 마치고 돌아와 거울 앞에 앉는다. 반백 머리칼에 눈가에 주름 몇 줄, 사내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는 누구냐. 왜 여기 있는가. 외롭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으면 사내도 되물어온다. 둘은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다 피식 웃음 짓고 만다. 아침이면 햇살 받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 한데 모여서 일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다시 흩어져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면 망망 암흑 바다에 떠있는 별들, 별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으면 또 섬, 섬이기 싫어 바깥으로 나가지만 되돌아오면 섬이 되는 일상을 되풀이한다. 서로 외롭지 말자고 섬과 섬이 만난다. 섬과 섬은 섬을 낳고 섬은 섬이 되기 위한 걸음마를 연습한다. 섬을 떠난 섬은 삶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

좋은 수필 2024.03.16

식구/이경림

식구 제 몸이 의자인지도 모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의자들과 탁자인지도 모르고 그 가운데 넙적 엎드려 있는 탁자와 장롱인지도 모르고 속에 온갖 것 담고 투박하게 기대 있는 장롱과 침대인지도 모르는 침대와 TV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TV와 벽인지도 모르고 허공에 칸을 질러대는 벽들과, 그 벽 속의 물소리와 지붕인지도 모르고 그 위에 수굿이 덮혀 있는 지붕과 그 밑 조그만 화분에 발 오그리고 아슬히 피어나는 제 몸이 꽃인 줄 모르는 꽃들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저 들숨 날숨의 그 속에 캄캄하게 뜨고 지는 햇덩이와 새벽녘 저 혼자 후둑후둑 지는 제 몸이 별인지도 모르는 별들과 그것들 한아가리에 넣고 언젠가 콱 입 닫을 악어 한 마리! 이경림(1947~) 이 시는 “모르는” 것들로 빼곡하다. 시인은 인간의..

좋은 시 2024.03.15

바닥론 / 김나영

바닥론 / 김나영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 하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 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좋은 시 2024.03.14

산방일기 / 이상국

산방일기 / 이상국 ​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 어느..

좋은 시 2024.03.12

포구에서/황진숙

포구에서/황진숙 저문 해는 진즉 바다에 잠겼다. 등으로 치고받으며 이랑을 만드는 바닷물의 사위도 잠잠해졌다. 집어등 켜고 물살을 가로질렀을 어선들은 닻줄을 내리고 숨을 고르고 있다. 바닥에 널린 자잘한 어구와 낡은 그물에 고여 있는 허름한 하루가 느껍기만 하다. 붉은빛을 사르고 어둠이 내리자, 저 멀리 붙박이 등대에 불빛이 내걸린다. 길 잃은 숨결들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하루의 끝점에 내몰린 이들이 떠돌지 않도록 좌표가 되어 주는 등대가 묵묵하다. 뒤이어 방파제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살아난다. 물빛이 바뀐 해조음이 낮아지고 부산함이 잦아든 포구가 아늑해진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둔 수산시장으로 파고든다. 고즈넉한 포구와는 달리 왁자한 소리가 안겨 ..

발표작 2024.03.12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최지안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저녁이 되었다 ​ 최지안 ​ 저녁은 경계에 걸린다. 낮의 끝과 밤의 시작 사이. 낮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밤이라 하기에 어정쩡한 시간. 차를 마시기엔 늦고 술을 마시기엔 이르다. 무엇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까운 인생의 절반을 지난 시점 같다. ‘아직도’와 ‘벌써’에서 망설이는 애매한 시간. 미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고 만다. 인생이란 것이 모두 그러하듯. 저녁은 슬그머니 온다. 서쪽 산등성이에 걸렸는가 싶은데 어느새 그림자를 이끌고 그렇게 시치미 떼고 온다. 고양이 담 넘어 집 뒤로 사라지고 새들도 둥지 찾아 날아가면 그제야 저녁은 눈치 보며 깃든다. 도로는 차량이 넘치고 조용하던 거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슬그머니 시작된 저녁. 길이 막히고 거리는..

좋은 수필 2024.03.08

뒷골목/김응숙

뒷골목 김응숙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다. 밤이라면 그것은 체념의 시간이 흐르는 너절한 도랑이 되고 비까지 온다면 허무가 떠다니는 오염된 하수구가 된다. 늦가을 찬바람마저 불어대는 오늘, 화장 짙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비는 번들거리는 얼룩을 남기며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있다.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일까. 비안개에 희뿌연 빛을 분사하는 백열등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 빌딩 뒤편에 설치된 여러 구조물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거린다. 그 틈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납작 엎드려 있다. 곰팡이들이라도 퍼져 있는지 큼큼한 냄새마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의 저 끝, 어둠이 갈라진 직사각형의 빛 속에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흡사 멀리서 보는 전광판 화면 같다. 발밑의 웅덩..

좋은 수필 2024.03.08

태양초/김덕임

태양초/김덕임 주머니 속 금화가 잘랑거린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순천 시댁에 다녀왔다. 바삭한 고추 삼십여 근을 오부룩이 부었다. 작은 산더미만하다. 새 색시 다홍치마 같은 태깔이 손끝에 자르르 감겨온다. 고추 꼬투리를 떼어낸다. 벌써 두어 시간째다. 떼어낸 꼬투리는 흡사 생후 이레 만에 말라 떨어진 딸들의 탯줄이다. 코끝의 알싸한 냄새는 연신 재채기를 끌어올린다. 콧물이 눈물인지, 눈물이 콧물인지…. 고추 속에는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불룩이 담겨 오글거린다. 순천만 수평선에 낭자한 저녁노을도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고추는 해풍에 실려 온 달착지근한 새조개 냄새와 쫄깃한 쭈꾸미 맛도 담뿍 담고 있다. 고추밭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자락 속의 소쩍새, 멧새들의 울음소리도 고추더미 속에서 잔망스럽게 들린다...

좋은 수필 2024.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