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1

수필의 서정성/방민

수필의 서정성/방민 수필도 시처럼 서정을 담는다. 서정은 감정을 펼친다는 뜻이다. 인간은 사고하기도 하지만 감정도 품는다. 서정은 이중 감정을 주로 드러내어 표현한다는 의미다. 이 서정을 대표하는 문학 장르는 시를 으뜸으로 꼽는다. 시의 성격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서정으로, 시를 달리 서정시라 부를 정도로 시의 핵심적 속성이다. 이 서정성이 수필에도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담겨있다. 이를 수필의 서정성으로 이를 만하다. 수필의 서정성은 시의 서정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같거나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변별 측면이 있는가 알아보자. 시와 수필의 공통적 서정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다. 첫째로 시와 수필에서 드러나는 서정성은 개인의 개별적 정서이다. 창작 행위가 개인적 독자 활동이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독자..

수필 이론 2024.03.08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축 개업' 거울 / 고지숙 밤새 곰팡이가 담쟁이넝쿨처럼 자라 있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인가. 며칠 사이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 듯했다. 벽지가 찢어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더니 미끈거리는 검은 습기가 묻어났다. 물티슈로 닦아내고 신문지로 문질렀다. 축축하던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져내렸고 그 뒤로 시멘트가 조금 드러났다. 그런데도 곰팡이가 피었던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릿해지고 옅어졌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여느 때처럼 거울로 가렸다. 절망처럼 급속도로 피어나던 곰팡이를, 그 벽을. ​ 좁은 방에는 못이 딱 하나 박혀 있었다. 전에 살던 누군가가 박은 못이리라. 내가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못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못에 거울을 걸었다..

좋은 수필 2024.03.05

어둠의 저편 / 고지숙

어둠의 저편 / 고지숙 바람이 제법 불어 창문을 닫았다. 소란스럽게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드라마 속 남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모처럼 나 혼자 먹는 저녁.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간단한 볶음요리를 했다. 당근, 양파, 대파를 다듬고 버섯을 물에 불려두었다가 적당한 길이로 썰고 오징어는 살짝 데쳤다. 여러 재료를 섞어 양념장을 만드는 동안, 드라마 속 등장인물은 주인공 여자와 노부인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걸로 보아 갈등상황이 시작된 것 같았다. 프라이팬에 재료를 넣고 기름에 볶는 동안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야채 볶는 소리 때문에 대사는 잘..

좋은 수필 2024.03.05

달고 뜨거운 /고지숙

달고 뜨거운 /고지숙 눈송이가 떨어진다. 얇은 외피에 비해 낙하 속도가 빠르다. 손등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녹는다. 다음 그 다음의 눈송이가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손등보다 체온이 높은 곳에서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바로 녹는다. 차갑다는 느낌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훼손된 눈송이를 응시하며 본래 눈송이가 가지고 있었을 무게를 가늠해본다.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올려다보니 크고 탐스럽다. 한때는 세상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처럼 눈송이의 형태는 무구하고 선명하다. 팔을 벌리고 입을 열어 눈을 맞이한다. 차가운 것이 몸 여기저기 부딪히다 입속으로 들어온다. 혀를 적셔주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

좋은 수필 2024.03.05

불쏘시개/곽흥렬

불쏘시개/곽흥렬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있을까만, 벽난로 불붙이는 일 역시 생각만큼 그리 만만치가 않다. 거기에도 나름의 요령이 숨어 있는 까닭이다. 착화 순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적잖이 고역을 치러야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롭고 귀찮아서 몇 번 써보다 내버려 두어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먼저 로스톨 바닥에 신문지 네댓 장을 공처럼 공글려서 깐다. 그 위에다 삭정이나 잔가지들을 얹는다. 다시 그 위에다 굵은 가지를 얼기설기 채운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가는 장작 몇 개비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포갠다. 이렇게 해 놓으면 일단 불붙일 준비는 끝이 난다. 라이터를 그어 신문지에 갖다 댄다. 처음엔 종이의 화력으로 화르르 타오른다. 하..

좋은 수필 2024.03.03

파약破約/김용삼

파약破約/김용삼 터미널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사람들은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떡대는 싱싱함으로 하루를 연다. 삼투압을 하듯, 나는 그들이 선사하는 활기를 연신 안으로 들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2층의 푸드 코트, 이곳이 나의 일터다. 주방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내 몫을 끝내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인다. 쌀을 안치고, 소스를 끓이고, 반찬을 담고, 단손에 여러 일을 해치우려면 눈코 뜰 사이가 없다. 매일 같은 일도 처음처럼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 음식장사라, 그때도 여느 때처럼 분주했을 게다. “식사 되나요?” 화들짝 돌아보니 커다란 캐리어를 잡은 스물 남짓의 청년이었다. 시간이 일러 식사는 곤란하다는 말에 청년의 얼굴엔 난감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시간에는 터미널 어디에도 허기를 ..

좋은 수필 2024.03.03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1954년 ~ , 광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

좋은 시 2024.03.03

물 묵어라 - 전동균​

​ ​ 물 묵어라 - 전동균 ​ ​ ​ ​ 밤새 앓으며 잠을 못 잔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는다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아내는 지금 제 속의 여자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입술은 갈라지고 얼굴은 퉁퉁 붓고 갑자기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 그래도 당신에겐 첫사랑과 어머니가 함께 있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색도 않는다 (…) 물 묵어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물 잔을 건넬 뿐 ​ ​ ​ 갱년기 증세를 견디느라 잠 못 잔 사람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침 밥상은 약식이다. 아내를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고 안타까워할 뿐 남편은 표 내어 위로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고구마는 목이 멘다. '물 묵어라'는 무뚝뚝한 한 마디에 숱한 감정이 배어 있다. 첫사랑이었던 남편도 말을 안 할 뿐 사실은, 정글로 쫓겨난..

좋은 시 2024.03.01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 ​ ​ ​ ​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

좋은 시 2024.03.01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 ​ ​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어 기대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울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 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좋은 시 2024.03.01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 ​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이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좋은 시 2024.03.01

비의 문양 - 윤의섭

비의 문양 - 윤의섭 ​ ​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른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른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

좋은 시 2024.03.01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 ​ 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ㅡ 붙잡으려는ㅡ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자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ㅡ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ㅡ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 물줄기 지나간다 ​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 아ㅡ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 ​ ​ ​ ​ 계간 『서정시학』 2011년 여름호 발표

좋은 시 2024.03.01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 박새 떼 날아오르는 탱자나무 사이사이로 올라오는 양지 꽃잎 숨소리 엎질러진 샛길 따라가다 보면 ​ 하눌타리 서너 줄기 무너져가는 돌담 양어깨로 들어 올리다 지쳐 쓰러진 담장에 억지 걸음을 내디딘 양철판과 헌 문짝들, 함박눈 뒤집어쓴 대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감싸고 있다 자신을 품어 줄 땅을 향해 경배하고 있는 지붕과 기둥과 마루와 방문과 주인 노파, 시간은 집과 주인의 마음을 한 물결로 흐르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쪼아댔을까 눈매도 앞태도 뒤태도 옆태도 모두 닮았다 ​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린 샤쓰 하나, 오래된 바램처럼 나부끼고 봄볕에 몸을 맡긴 고양이 한 마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염불하듯 두 발 앞으로 모은다 살구 꽃잎들이 우르르 떼지어 몰려다..

좋은 시 2024.03.01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ㅡ 못골 19 ​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 ​ ​ ​ ​..

좋은 시 2024.03.01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 이문재 ​ ​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있다 눈부시다. 소금 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 ​ ​ ​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중에서 ​ ​ ​ ​ ​ 어른들은 왜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어린 시절,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답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어쩌면 간단합..

좋은 시 2024.03.01

멍석 - 정성록

멍석 - 정성록 봄의 전령사들이 남도의 이른 봄소식을 들려준다. 오백 년 된 황매화의 향기를 맡으며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모아본다. 청량한 물소리가 흐르는 지리산 한 자락을 살포시 끼고 앉은 경남 산청군 남사면 예담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른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될 만큼 고택들과 주변 경관이 조화롭다.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따라 골목을 돌아 깨끗한 양반가의 고택을 둘러본다. ​ 바람이 빈 집의 주인인 냥 우리를 맞이한다. 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집 같은 어느 고택에서 나도 몰래 발이 붙어버렸다. 빗장 걸린 안채를 비켜 바깥마당으로 나오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초가로 된 사랑채 헛간에 있는 멍석이었다. 먼지 쌓인 멍석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폴폴 날아 오르고 나를 고향집 헛간으로 데리고 ..

좋은 수필 2024.02.28

접는다는 것/권상진

접는다는 것 ​ 권상진 ​ ​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좋은 시 2024.02.28

먼지는 힘이 세다 외

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

좋은 시 2024.02.27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꼬리칸의 시간 / 최민자 -저쪽 끝이 314호실이에요. 안내인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처음 와보는 요양병원, 가슴이 우당탕, 방망이질했다. 고관절이 무너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된 노모가 이곳으로 옮겨온 게 일주일 남짓, 좁고 지저분한 복개천을 돌아 멀뚱하게 서있는 병원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가족 면회가 때맞추어 풀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시난고난 살아낸 한 생의 끄트머리를 이렇듯 심란한 종착지에서 지어야 하는 인생이라니. 복도 양쪽, 병실마다에 머리 허연 노인들이 폐기물처럼 내박쳐 있었다. 침대에 웅크려 돌아누운 사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그려있는 사람, 반쯤 넋이 나간 퀭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이나 주시하는 사람〮…. 대낮이었음에도 ..

좋은 수필 2024.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