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4

포장마차를 타다 /심선경

포장마차를 타다 심 선 경 분명 이름은 마차인데 포장마차엔 말馬이 없다. 그래서 이 마차는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다리가 잘려버린 말 대신, 의족처럼 둥그런 바퀴를 끼워 놓았지만, 그마저도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붕을 덮은 방수 천막은 네 귀를 잡아당겨 못질을 단단히 하고, 아예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무거운 약수통으로 눌러 꼬리를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마차에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마부는 친절히 맞이하고 또 배웅한다. 가끔은 “나 여소,” 하며 포장을 걷어 올려 승객의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마차로 유인할 때도 있다. 강철같이 두텁고 육중한 세상의 벽에 여러 번 부딪쳐 본 이들은 안다.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는 것..

좋은 수필 2024.02.05

무릎의 문양 - 김경주

무릎의 문양 - 김경주 ​ ​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

좋은 시 2024.02.04

시인의 직업은 발굴/신형철

시인의 직업은 발굴 언젠가 김경주의 첫 번째 시집에 대해 쓰면서 나는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더랬다. 참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시인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가 좌충우돌하는 시집이었다. 두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읽어보니 점입가경이다. 이제는 더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놀고 있구나. 시인은 그래도 된다. 시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놀 수 있는 세계가 시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이 시인의 여러 얼굴을 더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한편으로는 이제 두 번째 시집쯤 되고 보니 이 사내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한결 또렷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

평론 2024.02.04

허연, 면벽

허연, 면벽 ​ ​ ​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들의 주변부에서 내가 산다. ​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 가 아니다. ​ 누구는 세상 한가운데 산정(​山頂)에서 살고 누구는 세 상 한 귀퉁이에서 산다. 하여튼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건 두 렵고 신기한 일이다. 근데 그게 가끔 말썽이다. 난 또 한 사 람을 잃었다. 이젠 기까지 약해져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침마다 섞어 버린 이름들이며 술병들이며 뭐 그런 것들 이 남는다. ​ 지리멸렬해졌다. 말없이 바퀴나 굴리는 낙오자다 나는.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좋은 시 2024.02.04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손택수의 ‘방심’/ 시인 문태준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 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손택수, 「방심」 전문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버린 일 얼마나 오래 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 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

평론 2024.02.04

허공한줌/나희덕

허공한줌/나희덕 ​ 이런 얘기를 들었어. ​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어. ​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

좋은 시 2024.02.04

살구 / 정은아

살구 / 정은아 검뿌연 하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온 사방에 꽂혔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겨보지만, 무작위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설익어 단단한 것들은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이 앳된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떤다. 스치듯 살짝 맞아도, 무른 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상처는 짓무르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동안 마른장마의 연속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살구에게는 축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당분을 축적하고, 농부가 퍼 올려주는 지하수를 빨아 먹고는 몸뚱이를 불려 나갔다. 풋내나는 초록빛이 차츰 줄어들고 노란빛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이 멀지 않았다. 살구의 당도는 농익은 주황빛이 띨 때가 제일 높지만, 상품성은 노란빛을 띠고, 물컹하지 않을..

좋은 수필 2024.02.04

와이셔츠 / 정은아

와이셔츠 / 정은아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옷장을 열어 아내의 옷을 쓰다듬고, 입어보는 장면. 남겨진 이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도, 괴이하게도 보였다. 왜 저렇게도 잊지 못할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 칫솔, 스킨, 로션, 면도기, 속옷, 티셔츠, 남방, 바지, 벨트, 점퍼, 정장, 코트, 양말, 운동화....... 그의 물건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갈 삶은 아직 초입인데, 나와 아이만 길 위에 남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설명해야 하나. 남편이 사라진 날 이후로, ‘아빠는 출장 중’이어야 했다. 아이가 아..

좋은 수필 2024.02.04

전등 / 정은아

전등 / 정은아 빛과 어둠. 켜짐과 꺼짐. 생과 사.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딸깍. 꺼져버린 빛이 불현듯 켜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이미 빛을 잃은 생이, 다시 빛날 수 있을까.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릴 순 없다.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걸을 수 없다며 다시 앉았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투정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아이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기가 되었다고 놀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5살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 갔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되도록 걷지 말고, 뛰지도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업었다. ‘보고 있는 거야? 애 낳고 한 달도 안 된 산모가 보이긴 해?’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실내가 순식간에..

좋은 수필 2024.02.04

해지/정은아

해지 / 정은아 핸드폰을 해지하러 대리점에 갔다. 주인 잃은 핸드폰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해지 전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전원을 켰다. 다시 생명을 얻듯 불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왔다. 잘못 누른 걸까. 재빨리 소리를 줄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음악 파일이 재생 중이었다. 꿈속에선 보이나 봐. 꿈이니까 만나나 봐.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 꿈속에만 있는가 봐. - ‘부활’의 노래. ‘생각이 나’ 남편의 핸드폰은 다시 살아나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눈물샘은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대리점 안은 고객들로 소란스러웠고,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안으로 숨었다. 가려진 작은 공간에서 노래가 하..

좋은 수필 2024.02.04

손톱 / 허효남

손톱 / 허효남 손톱은 그리움이다. 가만히 있어도 스멀히 자라나서 잘라내도 또 자라나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쇠붙이를 들고 톡탁여도 웃자란 그리움들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길 잃은 마음들이 사방천지로 흩뿌려지며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깎을수록 더 단단히 돋아나는 그리움은 기약 없는 시간을 맹세한 채 영원토록 잘라내야 할 형벌을 내린다. 그리움이 지난 것을 불러 내 앞에 붙들어 세운다. 아이의 손톱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주말에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 준 것이라 했다. 돌 위에 여린 잎을 놓고 찧으며 내 손톱을 물들이던 시간들도 있었다. 백반가루를 넣어 곱게 풀린 꽃잎들을 손끝에 올려주던 분도 내 할머니였다. 아이의 할머니도, 내 할머니도 앙증맞은 손을 잡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꽃잎처럼 단아하고 향이..

좋은 수필 2024.02.04

군불을 지피며/정원정

군불을 지피며 정 원 정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

좋은 수필 2024.02.02

갈목비 / 전영임

갈목비 / 전영임 어두운 터널의 수렁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지나, 너울너울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살아온 인생길 가장 화려하고 호강스런 순간이었다. 동구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일곱 계단을 올라 두 평 남짓 당신의 체취가 배인 사랑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움츠려있던 방의 기운이 보무라지처럼 풀썩 일어나 소스락거렸다. 당신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녀린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너울가지가 없어 아무 말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들의 밭갈이며 힘든 일을 도와주시던 듬쑥한 분이었다. 풀에 할퀴고 밭일에 무디어진 손으로 농사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갈목비를 엮으셨다..

좋은 수필 2024.02.02

경계 / 전미경

경계 / 전미경 봉분에 달라붙은 잔디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 잔디를 입힌 탓에 둥지를 틀지 못할까 봐 가슴 졸였는데, 온전히 뿌리내려 자리 잡은 걸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인다. 군데군데 잡풀이 눈에 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뽑히는 걸 보니 잡풀은 제집이 아님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술과 포를 올리고 절을 한다. 당장이라도 헛헛한 웃음 지으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딸 왔나.' 하며 반긴다. 마른 풀이 바람에 들썩인다. 힘겹게 받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떨어뜨리기 위해 헤아린 흔적을 바람도 아는 눈치다. 자신의 시든 삶을 정리하다 살아온 결대로 남고 싶은 풀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봉분을 사이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길이 너무 멀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

좋은 수필 2024.02.02

말뚝 / 이은정

말뚝 / 이은정 ​ ​ 텃밭 반만 갈아 퇴비를 뿌려놓았다.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그물을 두를 계획이다. 목장갑을 끼고 적당한 위치를 찾아 말뚝을 박는다. 세운 말뚝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준다. 제가 놓일 자리를 찾으란 뜻이다. 흔들흔들. 점쟁이 굿하듯, 노인네 지팡이 흔들 듯, 흔들흔들 흔든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한다. 한쪽 끄트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쿵 소리 한 번에 말뚝의 키가 훌렁 줄어든다. 세 군데 말뚝을 박았다. 니은 모양으로 양쪽 끄트머리와 가운데 코너 부분이다. 튼튼하게 박힌 걸 확인한 후 초록색 그물망을 두른다. 한쪽 끝에 박은 말뚝에 그물망을 고정하고 코너를 돌아 다른 끝에 가서 고정한다. 제법 그럴싸한 그물 벽이 생겼다. 가운데..

좋은 수필 2024.01.30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좋은 시 2024.01.28

의자왕 / 신미균

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

좋은 시 2024.01.28

不惑의 구두 / 하재청

不惑의 구두 /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가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

좋은 시 2024.01.28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등의 방정식​ / 현경미

등의 방정식​ / 현경미 ​ ​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좋은 수필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