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6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등의 방정식​ / 현경미

등의 방정식​ / 현경미 ​ ​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좋은 수필 2024.01.28

막차 / 문경희

막차 / 문경희 출발 10분 전, 실내 조명등이 켜진다. 내내 굳건한 함구를 풀지 않던 슬라이딩 도어도 스르르 빗장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모든 것을 허용하겠다는 따뜻하고도 너그러운 호의에 감전되듯, 사람들은 하나둘 텅 빈 사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우람한 네 바퀴가 나를 인도해 줄지니. 한 시간 남짓, 언젠가부터 그에게 나를 맡기는 고요의 시간이 좋아졌다. 그를 무한 신뢰하며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하고, 졸다, 깨다, 혼곤하게 정신의 풀기를 눕혀도 본다. 붉은 띠가 선명한 내 집행 시외버스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동승하기 위해 나도 기다림을 추스르고 탑승구로 들어선다. 모바일 승차권을 다운받는다. 본의 아니게 최근 들어 자주 도시를 오가다 보니 내가 애호하는 일인용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스마트하..

좋은 수필 2024.01.25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좋은 시 2024.01.24

보리 굴비 / 박찬희

보리 굴비 / 박찬희 깊은 곳, 동안거에 들 날이 가까워지면 옆구리가 가려웠다 수년을 가로거침 없던 길 없는 길이 아른거리기만 하고 바싹 말라버린 감정이 압착된 채 눌어붙어 겉보리 색깔이다 ​ 꼬아 내린 새끼줄이 미명을 건져 올리는 때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억, 잊은 물질의 기법을 유추해 켜켜이 돋워 꿰면 아가미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 바람이 낙관을 찍고 갈 때마다 입술이 들썩거리고 항아리 깊은 속에서 오장육부를 비워내면 아가미를 통해 내통하는 바다와 육지 ​ 숨이 찬 시절이 건조되는 동안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흘러 빠져나가는 너울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께를 바람이 변주하면 뭉툭하던 허리를 조여 맨 상처가 껍데기에서 바삭거린다 ​ 잠이 깰 때 아무 느낌이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귓속말을 차곡차곡 채우면 봄..

좋은 시 2024.01.24

삶의 본때/황동규

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좋은 시 2024.01.23

복숭아씨/박혜자

복숭아씨/박혜자 과일가게 주인이 맛보라며 복숭아 한쪽을 준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단 냄새를 물씬 풍기던 복숭아는 살을 다 발라내자 씨만 남았다. 주인이 복숭아씨를 휴지통에 던지고는 복숭아 한 개를 또 깎는다. 복숭아씨가 맨 몸으로 휴지통에 웅크리고 있다. 평생 땅 한 뙈기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으로 땅이 생겼다.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산 아래의 천수답이었다. 천수답이 생긴 후로 아버지는 더욱 일에 매달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농작물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가는데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말라갔다. 복숭아 알이 주먹만큼 커지고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날 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터널 앞에서 내린다는 것을 그만 터널을 지나서 내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아버지가 ..

좋은 수필 2024.01.21

장작을 패며/오세영

장작을 패며 오세영 ​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 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 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좋은 시 2024.01.19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

평론 2024.01.19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평론 2024.01.19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평론 2024.01.19

최문자 시 모음

최문자 시 모음 31편 ​ 《1》 ​ 고백 ​ 최문자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 《2》 ​ 거짓말을 지나며 ​ 최문자 ​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

좋은 시 2024.01.17

문성해 시 모음

문성해 시 모음 20편 ​ 《1》 ​ 검색 공화국 ​ 문성해 ​ 도서실 컴퓨터실에 붙박이로 앉은 사람들 젊어서 천천히 찌그러지고 있는 사람이나 늙어 한꺼번에 찌그러진 사람이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지독한 모니터와의 사랑이다 제가 궁금하면 검색해 보세요 그 남자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쿠키를 오븐 없이 굽는 방법을 검색하며 쿠키도 프라이팬에 구울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실이 떠나가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모두들 천기를 누설 받는 결연한 표정들이기에 관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게 하는 법과 물속에서 물고기랑 오래 대화하는 법을 내리 검색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훔쳐본 옆 사람의 모니터에서 깨알 같은 ..

좋은 시 2024.01.17

이재무 시 모음

공중전화 ​ 이재무 ​ 아날로그의 고집이여, 자랑으로 붐비던 날들 아득한 전설이 되었구나 한창때 너는 잘나가는 몸으로 식욕 또한 왕성해서 뜨겁고 짜고 맵고 싱겁고 차가운 수천, 수많은 사연 다 삼키고도 뜨거웠지만 늙은 창부가 된 오늘 식어버린, 허기진 몸으로 누군가 인색하게 떨군 은화 몇 닢의 동냥 허겁지겁 삼키는구나 시대의 모든보이 시민의 교양이었지만 뒤처진 애물단지가 되어 생의 수건만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생각하면 창부 아닌 삶 어디 흔하랴 줄고 새는 영혼 부풀려 팔고 돌아오는 길 뚜쟁이처럼 서서 호객하는 너를 보는 일 편치 않다 너는 필요보다 크고 무겁고 느리다 네 고집은 불편하다 후불을 모르는 시대의 지지진아 그나마 식은 몸일망정 찾아와 주린 정 채우고 가는 무일푼 고객마저 외면하는 날 올 것인가 ..

좋은 시 2024.01.16

스며든다는 것 / 안도현

스며든다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좋은 시 2024.01.16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김시습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俯視李賀 부시이하 조선 최고라 했지. 優於海東 우어해동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騰名謾譽 등명만예 어찌 네게 걸맞을까?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爾言大侗 이언대동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宜爾置之 의이치지 저 개굴창이리라. 丘壑之中 구학지중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 (돌베개,2006) .......................................................................................................................................

평론 2024.01.16

정끝별 시

..한 걸음 더.. ​ 낙타를 무릎 끓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 사람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일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 ​ ​ ..세상의 등뼈..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께를 대주고 ​ 대준다는 것..

좋은 시 2024.01.15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좋은 시 2024.01.15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

좋은 시 2024.01.15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배짱 없는 베짱이 / 문경희 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결미는 나라마다 다르게 각색된단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개미가 과로사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시스템에 익숙한 쿠바의 경우, 베짱이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은 아름다운 노래로 귀를 즐겁게 해 주었노라고, 그러자 개미는 일밖에 몰랐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는 호의로 쾌히 식량을 나누었다나. 미국편은 좀 더 다이내믹하다. 자신의 밥은 자신이 버는 법이라며, 개미는 베짱이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낙심한 베짱이가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음반기획자가 이를 듣게 된다.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베짱이..

좋은 수필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