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 피귀자 나는 지금 눈물 없이 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겨드랑이가 가려워 몸이 뒤틀린다. 몸속을 달리는 혈관들의 반란도 잠재우기 힘들다. 주인은 나의 존재를 잊은 건지 밀폐된 박스에 나를 쳐 박은 채 몇 달째 방치하고 있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흙과 풀냄새를 맡고 싶다. 아니, 자갈밭에라도 맨발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파란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흔들리고 싶다. 어느 집 창고인지 부엌인지 알 수 없는 이곳이 너무나 답답하다. 어서 빨리 이 고통을 이기고 땅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내 신체의 일부를 '감자 싹'이라고 부른다.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리는 것이 사람인가. 여름의 초입부터 삶아먹고 지져먹고 볶아서 입맛..

좋은 수필 2024.01.09

비밀 있어요/김산옥

비밀 있어요/김산옥 나는 누군가의 왼쪽이 그리운 여자에요. 해서 그대가 언제나 내 오른쪽에 있어주길 바란답니다. 식사를 할 때, 함께 걸을 때,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탈 때도 언제나 그대가 내 오른쪽에 있어주기를 바라지요. 어쩌다 기회를 놓쳐서 그대 오른쪽에 있는 날에는 너무 슬프답니다. 네, 이런 날은 얼굴을 붉히며 그대 입만 쳐다봐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죠. 대부분 내가 알아서 그대 왼쪽으로 가지만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거든요. 그런 날은 그대에게 오해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더욱 마음이 쓰인답니다. 언제가 문인협회십포지엄에 다녀오던 날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어느 멋진 시인과 함께 앉게 되었죠. 난 그의 왼쪽이 그리운데 오른쪽에 앉는 불운을 맞았지 뭡니까. 버스 안이라 너무 시끄러..

카테고리 없음 2024.01.09

어린 날의 초상/문혜영

어린 날의 초상 문혜영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월남하였습니다. 피난 오면서 아버지를 잃고 또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우리 네 자매뿐이었습니다. 사선을 넘으면서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곳의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방 한 칸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우리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학교에서는 관사에서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관사지 방이 둘, 부엌이 둘 있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습니다. 그나마 방 하나는 숙직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방 하나만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이 눈에 선합니다. 방과 후면 ..

좋은 수필 2024.01.06

지난 11월에는... / 김훈

지난 11월에는... / 김훈 나는 자연사한 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숲 속의 그 많은 새들이 어디로 가서 죽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창 앞 모과나무 가지에서 우는 새도 내가 모르는 어디론지 가서 죽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은 11월에 날아온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지, 을숙도에서 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을숙도 갈대 숲에 새들의 시체는 없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전나무 숲속에도 새들의 시체는 없을 것이다. 새들은 올 길 갈 길에 하늘에서 죽어서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것인가. 새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날아오고 또 날아오지만, 새들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사한 벌레들의 주검을 본 적이 없다. 여름 풀밭의 그 많던 벌레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좋은 수필 2024.01.06

으짜꺼시냐 / 정지민

으짜꺼시냐 / 정지민 격월로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날은 일부러 치과원장인 정훈이의 옆자리에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정훈아, 어제 친구들이랑 채석강에 놀러갔다가 말이지... . 엿장수가 엇따, 엿 먹어라! 하면서 길을 막고 공짜 엿을 내미는 거야. 덜컥 받아먹다가 어금니 쪽 땜질한 금니빨이 그만 쓸려나왔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정황을 얘기한 후 내일 그의 치과병원에 들르겠노라 했다. 어릴 때부터 코부랭이에 욕쟁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는 마시던 술잔이 든 손을 훼훼 저으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야! 무슨 소리? 너희 동네엔 치과 없어?” 아는 사람 오면 귀찮기도 하거니와 오늘밤 술을 실컷 마실 것인즉 손 떨려 치료 못한다는 것이다. 토악질이 유독 심해 치료 받을 때 의..

좋은 수필 2024.01.06

잉아/이상수

잉아/이상수 날실을 걸자 베틀 위로 흰 강물이 흐른다. 수백 겹 가닥이 물결이 되어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잉앗대가 위로 들려지고 그 사이로 씨실을 넣고 바디를 조여 베를 짜기 시작한다. 덜그럭 탁, 덜그럭 탁, 어머니는 한 척의 돛단배처럼 밤늦도록 강물 위를 덜컹거리며 떠다닌다. 잉아는 베틀의 부품이다.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고정해 놓은 굵은 줄을 말한다. 실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날실을 촘촘하게 매어놓은 모양이 마치 국숫발을 장대에 널어놓은 것 같다. 스물하나에 어머니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났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학생이던 시동생 둘을 맡기고 입대해버렸다. 오롯이 가장이 된 당신은 병환으로 앓아누워 있던 시모를 비롯한 세 식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남..

좋은 수필 2024.01.05

몽당연필 / 최선자

몽당연필 / 최선자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 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 박 삼 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 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 ..

좋은 수필 2024.01.05

이유 / 송혜영

이유 / 송혜영 어찌 저리도 크고 원만하게, 온화한 빛으로 잘 늙었을까. 황혼의 호박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호박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진다.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종묘상 앞이나 장터 난전에 모종이 나타난다. 땅이 일 년 농사를 허한다는 신호다. 어서 밭에 가자고 성화를 하는 모종 중에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호박이다. 일단 울 밑에 심을 호박부터 챙겨놓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등속을 보태는 건 호박이 밭작물 중에서 으뜸이어서이다. 호박 모종은 잎이 세 장 정도 나와 있다. 사람으로 치면 갓 젖 떨어진 정도의 어린잎이지만 스스로 생존하기에 모자람이 없이 오롯하다. 용수철 같은 넝쿨은 당장 내 손끝이라도 잡고 올라올 기세다. 어린 저것이 뿌리를 내리고, 땅심을 받아 잎이 무성해지고,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호..

좋은 수필 2024.01.05

누빈다는 것​/조미정

누빈다는 것​/조미정 ​ ​ ​ 한지함 속에서 누비 한복 한 벌을 꺼낸다. 쪽빛 삼회장저고리와 감색 두 폭 치마가 펄럭거리며 강물처럼 펼쳐진다.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과 기도가 박여서일까. 비단 천을 만지작거리자 안팎으로 가지런하게 누벼진 바늘땀이 가슴으로 굽이친다. 누비는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한 땀 한 땀 홈질하여 짓는다. 눈 뜨자마자 시작해서 해거름까지 붙잡고 있어도 한 평 남짓 누빌까. 조급증이 일렁이지만 급한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는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뻐근하다. 그래도 누비는 낱장인 천들을 한 장으로 만드는 화합의 침선이다. 누비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몸의 치수대로 마름질한 후 품이 조금 더 넉넉하게 재단한다. 촘촘히 박은 땀이 주변의 천을 물고 들어..

좋은 수필 2024.01.05

민어회/안도현

민어회 안도현 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르겠으나, 나는 곧장 목포 유달산 밑으로 가서 영란횟집 계산대 앞에 민어 한 마리로 누워 있겠다 벗겨 손질한 껍질 옆에다 소금 종지를 두고 내장을 냄비에 끓여 미나리도 반드시 몇 가닥 얹겠다 혹여 전화하지 마라 올 테면 연분홍 살을 뜨는 칼처럼 오라 바다의 무릉도원에서 딴 복사꽃을 살의 갈피마다 켜켜이 끼워둘 것이니 때로 살다가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것들 때문에 뼈는 아리지 그래도 오로지 뼈만이 폭풍 속에 화석을 새겨넣지 그러므로 당신은 울지 마라 소주병처럼 속을 다 비워낸 뒤에야 바닷가 언덕에 서서 호이호이 울어라

좋은 시 2024.01.01

삼계탕/ 권오범

삼계탕/ 권오범 수컷 구실 한번 하지 못하도록 애당초 몽달귀로 낙인 찍혔다지만 천명이 턱없이 에누리당해 얼굴마저 저당잡혀 볼썽사납다 행여 머나먼 저승길 허기질세라 대추 밤 찰밥 미리 얻어 먹고 지옥 물에 목욕재계하고 나니 골수마저 녹아내려 온몸이 녹작지근하다 어린 것이 다리 꼬고 누워 인삼 하나 끌어안고 남세스럽게 누드쇼는 하지만 버젓한 한류스타이기에 여한은 없다 저승사자인 인간들이여 마지막 가는 길 부탁 하나 하자 젖가락으로 잔인하게 꼬집어도 좋으니 뼈 마디마디 깔끔하게 추려 해탈시켜다오.

좋은 시 2024.01.01

감꽃 1 / 양현근

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

좋은 시 2023.12.29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태어난 나는 서사성 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밤잠을 거른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쓴 글 높새바람에게 던져주고 남은 날숨을 구름옥상 위에 방치한다 까막까치가 날아와서 불순물 섞인 운문을 쪼아 먹으리 역사상 가장 힘들게 고고한 자태로 버텨야 하는 나는 내가 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연필심에 침을 바른다 -김영찬 시집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중 나는 더욱 소중하다. 이 세상 올 때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지 않았을 것이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귀한 존재로 살아가라 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귀함을 잘 모른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를 무시하거나 때로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모르는 세상, 밤잠을 이루..

좋은 시 2023.12.29

굴참나무 자서전/신영애

굴참나무 자서전 =신영애 기억을 지우니 바람이 분다 요양원 뒤뜰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통나무 의자들 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무뎌진 감정이 진물 흐르는 사연을 훔치고 있다 마음이 머물지 않아도 집이 될까 힘겹게 옮겨진 몸에는 세풍을 견딘 흔적이 옹이로 자리 잡았다 어스름한 산마루에 머무는 시선 노을이 잦아들자 산 그림자 길다 어느 서고에 한자리 차지하고 뿌리 깊은 수령을 전하고 싶었지만 골만 깊어진 몸뚱이는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재생을 멈춘 세포들은 사라지고 있다 다만 꿈결에 스치던 바람과 무성했던 온기와 산불과 병치레와 뿌리까지 흔들던 태풍을 마른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소멸을 위해 버티는 곳 아프지 않아도 아픔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풍장으로 사라질 날까지 끝내 그의 거처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시 2023.12.29

두부 이야기/정끝별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 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 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

좋은 시 2023.12.29

몸의 기억력/이주언

몸의 기억력/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 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 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 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 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 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 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 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 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시감상) 어느 때는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오랜 습관이나 몸에 익어버린 기억이나 손길, 할..

좋은 시 2023.12.29

도둑질/김현숙

도둑질 김현숙   저는 매일 도둑질을 합니다. 말 그대로 남의 것을 탐낸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 줄도 알고 그러면 안 되는 줄도 압니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욕심내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회성 말들입니다. 쓸 만한 게 많아서 주섬주섬 가져오다보니, 제 머릿속과 책상 위는 늘 포화상태입니다. 정리하지 않고 며칠 그대로 쌓아두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합니다.  때로는 그 일회성이라는 것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동네마트에 갔더니, 신선코너 담당인 박주임이 마이크를 잡고 이러는 겁니다. ‘자 세상살이 우리만큼 아는 애호박이요. 오늘은 특가로 나와 앉았네요’ 말씀 참 맛깔나게 하시지요. 애호박이 세상사는 맛을 안다는 얘기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박주임..

좋은 수필 2023.12.28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나의 시적인 엄마 / 김현숙 일주일에 한 번 엄마가 오시는 날이다. 처음엔 한 달에 두 번만 오겠다 하셨지만 요즘은 수요 장날에 맞춰 꼬박꼬박 다녀가신다. 시장 구경도 하시고, 반찬거리도 장만하시고, 딸내미한테 글 쓰는 것도 배우고, 엄마 말씀대로 안 올 이유가 없는 날이 되어버렸다. 지난 4월 처음 오셨을 때를 돌아보면, 우선 문 열고 들어오시며 '숙아' 하고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선생님이라 불러주시지도 않는다. 또 의자 안쪽까지 등허리를 깊게 묻을 만치 자리도 편하게 잡으셨다. 하지만 쪽파며, 연근이 당신 공부할 동안 골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시다. 잠시라도 냉장고에 넣어두자하면 꼭 이러신다. '이게 뭐라고 전기 써가며 공을 들이냐'고. 당신 발아래다 모셔놓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

좋은 수필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