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낙엽송/신달자

낙 엽 송 신 달 자 (1943∼)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동아일보/나민애의 詩가 깃든 삶』2023.11.25. - 수능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 애 재수한다’고 말하는 친구를 만났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그녀의 남은 힘은 그녀의 몫이 아니다. 그건 모두 ‘우리 애’에게 가 있을 것이다. 왜 모르겠는가. 아이도 힘들겠지만 엄마는 아이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부모는 참 이상한 존재다.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루 종일 자식 생각은 할 수 있다. 내 목구멍으로는 아무거나 넘겨도 상관없는..

좋은 시 2023.11.28

문숙 시 모음

나는 문숙 가나의 어느 부족에선 사람이 죽으면 관 모양이 생전의 직업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어부였던 사람은 배나 물고기 모양 구두장이였던 사람은 구두 모양의 관에 담긴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는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그려보지만 아니다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으니 시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삼십 년을 주부로 살았으니 밥솥이나 냄비 모양을 생각해보지만 아니다 전업주부라 하기엔 시와 통정한 시간이 너무 길다 국적 없는 집시처럼 바람에 이끌리며 산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내 전부를 던져본 적 없어 작가로서도 주부로서도 이념도 없고 신념도 없다 이 시대의 작가라면 이름이 올랐을 블랙리스트에도 나는 운 좋게 빠져있는 시인이다 오늘을 살며 진보도 못되고 보수도 못되는 나는 붉은 깃발이나 태극기 모양은 더..

좋은 시 2023.11.28

홍시/문숙

홍 시 문 숙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 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긴 시간 네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네 모든 감각을 딛고 먹먹해져야 하는 일이네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네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 - 시집〈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

좋은 시 2023.11.28

서효인의 「로맨스」 감상 / 나민애

서효인의 「로맨스」 감상 / 나민애 로맨스 서효인(1981~)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

좋은 시 2023.11.28

바닥 / 김기택

바닥 / 김기택 제대로 한 방 맞았다 바닥이 휘두른 펀치가 어찌나 세던지 눈두덩이 이 센티미터나 찢어지고 피가 터졌다 점점 높아지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내 몸을 받쳐 주던 의자가 발에 밟히는 게 불편했던지 제 몸을 살짝 뒤틀었는데 순간 중심을 잃은 다리는 의자에서 껑충 뛰어올랐고 머리는 의자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바닥이 솟구쳐 올라 왼쪽 눈과 뺨을 세차게 갈겼던 것이다 늘 발밑에만 있어서 바닥이었는데 늘 보아도 보이지 않아서 바닥이었는데 몸통이 고꾸라지는 바로 그 순간 바닥은 머리 위에 있었다 큰 절을 받듯 높은 곳에 앉아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바닥에 접속되는 순간 별들이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수많은 별이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바닥에 그토록 많은 별이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얼굴이 피를..

좋은 시 2023.11.28

이덕규의 「업어주는 사람」 감상 / 나민애

이덕규의 「업어주는 사람」 감상 / 나민애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1961~ )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

좋은 시 2023.11.28

헛 / 조인혜

헛 / 조인혜 언어는 관계 속에서 순환되고 해석된다. 단어 하나로 사람의 하루를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나락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눈동자 바로 앞에 뾰족한 무언가 세워져 있는 것처럼 온몸에 신경의 날을 세울 때도 있다. 때로는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언어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모양이 변하고 온도가 바뀐다. 심지어 권력이 생기고 위계가 정해지기도 한다. 봄볕처럼 따뜻하고 이불 속처럼 편안한 단어들이 있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잘될 거야' '좋아질 거야' 등이다. 미로같이 풀리지 않는 문제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닥칠 때 '괜찮아' 한마디를 들으면 불편했던 감정들이 순식간 녹아든다. 어깨 토닥거려주는 행동보다 말이 가지는 온기가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좋은 수필 2023.11.27

허물 / 정재순

허물 / 정재순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살핀다. 어머니가 자그맣고 앙상한 몸으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허리 한 번 필 틈 없이 평생을 밭에서 살아온 등은 한쪽으로 꾸부정하다. 몸가짐이 거북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보나 마나 또 우수수 떨어져 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허연 가루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앉았다 일어서면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것들은 이부자리에, 소파에 심지어 변기 위에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부부 침대에 걸터앉을 땐 참으려 해도 어느새 한숨이 새어나온다. 한동안 뵙지 못하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며칠 같이 지내면 심사가 뒤틀린다. 낙하한 것들은 곧장 쓸어 담아야 했다. 그냥 두면 이리저리 흩어져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등이 가렵단 소..

좋은 수필 2023.11.25

두레박/황영선

두레박 / 황영선 우물은 거대한 종처럼 울림이 깊은 소리를 가졌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어둠 저 편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종소리를 닮았다. 고여있는 듯하면서 흐름을 가진 지하 어딘가에 숨어 흐르는 물길. 그렇다. 고요한 정인의 가슴에 담긴 사랑의 깊이와 맛이 이와 같지 않을까? 무미 무취한 듯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생명수와 같은 우물! 그런 사랑의 우물을 갖고 싶다. 덧없는 갈증과 풋사랑의 허기를 달래던 젊은 날은 가고, 이제 나는 물 같은 사랑을 꿈꾸는 중년이 되었다. 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긴 여정이다. 잡으려고 하면 이미 저만큼 흘러가 버린 뒤이거나, 내 손이 닿지 않을 먼 거리에 가 있다. 내 안에도 어느새 동그란 물 무늬의 나이테가 숱하게 감겼다. 그러나 나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좋은 수필 2023.11.24

풍락초 / 조현숙

풍락초 / 조현숙 통 유리창 하나 가득 바다가 출렁거린다. 너울이 갯바위를 칠 때마다 하얗게 메밀꽃이 일어난다. 물머리를 세우며 덤벼드는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높직한 갯바위에서 한 여인이 풍락초를 건지고 있다. 3월의 바람이 드세기도 하다. 바다를 보겠다고 달려왔다가 갈퀴를 세우고 덤벼드는 소소리바람에 도망치듯 들어온 카페다. 뜨거운 바다의 내력이야 한잔 커피에 담아 마시면서 느긋하게 조망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저 여인을 보기 전까지는. 낭창낭창, 대나무 장대가 바다를 더듬는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여인이 미역 올을 건진다. 장대를 흔들어 갯바위 바닥 한 편에 미역을 떨구어 놓는다. 거친 바위에 따개비처럼 붙어 선 여인의 발아래로 바닷물결이 쉼 없이 굼실댄다. 깔밋하게 여며 입은 무채색의 차림새에, ..

좋은 수필 2023.11.20

어쩔, 파스/김근혜

어쩔, 파스/김근혜 거울 속에 낯선 중년 부인이 서 있다. 본 듯, 아는 듯, 마는 듯한 사람이다.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쪽 손엔 파스가 들려 있다. 그 꼴이 가관이다. 울퉁불퉁한 전라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여성 스모 선수가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모습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자신이 봐도 봐줄 만한 꼴이 아닌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벽이 돼야 하는 자신이 웃프다. ​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자주 아프다. 근육통이 새삼스럽지 않은 나이다. 아픈 부위에 파스를 붙인다. 잠시 통증이 진정된 듯 하나 부작용으로 피부 발진이 온다. 붙어있어도 떼어내도 가렵다. 강력한 접착제는 뗄 때가 더 고통스럽다. 일방적인 사랑처럼. 사랑이 너무 뜨거우면 불에 데듯이 파스도 뜨거운 것과 함께하면 화상을 입는다. ..

좋은 수필 2023.11.17

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 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 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 다 ​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

좋은 시 2023.11.15

활어/황사라

활어/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

좋은 시 2023.11.15

널밥/조이섭

파란 하늘에 빨간 댕기가 팔랑거리고 옥색 치마가 풀썩인다. 널뛰기는 정월이나 단오, 추석에 하는 전통 놀이이다.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서 신명나게 구르고 뛰는 한 판 놀이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세뱃돈 모금이 끝나면 하나둘 배꼽마당으로 모였다. 구슬치기도 하고 제기를 차다 보면 쿵덕 쿵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자들의 널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틈에 하던 놀이마저 팽개치고 달려가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처자들은 널을 뛰기 전에, 멍석을 둥글게 말아 만든 널받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골랐다. 이윽고 널빤지 위에 올라 눈 맞춤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굴러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널뛰는 소리가 떡방아 찧는 소리처럼 ..

좋은 수필 2023.11.13

국수/박경순

국수 ‘국수’ 하고 말하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사발 밥보다 많이 먹던 시절 아! 아버지 국수를 덜어주려면 그릇과 그릇을 붙여야 한다 그대에 나눠주듯 어깨를 바싹 붙여야 한다 내 어린 시절 한 끼 식사로 허기진 가슴 넉넉히 채워 주었던 국수 한 그룻 그리고 아 버 지 9월, 후포 밤바다에서 가을을 만나다 가을은 소리로 다가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그리움을 울컥 울컥 토해내는 후포바다는 여전히 여름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소나무 숲과 길을 잃은 검은 개 한 마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갈매기와 노을을 잊은 후포바다는 등기산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너머 고기를 잡으러 간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아버지는 대게 몇 마리 가슴에 품고 오실는지 녹등, 홍등 등대는 걱정스레 반짝..

좋은 시 2023.11.12

땀/정경해

땀 외 1편 정경해 손톱 세운 겨울바람 목을 휘감는 한신빌라 골목길 폐지 줍는 노인 등에 안개 자욱하다 저 굽은 능선에 그려지는 생의 지도枝道 밭은기침에 움푹움푹 길이 파이고 박스가 쌓일 때마다 새길이 자란다 무수한 시간을 누덕누덕 기운 오래된 등에 내일을 여는 하루가 다시 박인다 땀 줄기 깊어진 어깨에 가래처럼 달라붙은 납작한 삶이 모락모락 고개를 들고 질긴 숨줄, 한 땀 한 땀 하루를 깁는다 슬리퍼 욕실 슬리퍼 한 짝 화장실 문 닫을 때마다 빼꼼히 고개 내밀다가 번번이 한 소리 듣는다 목이 끼어 숨도 못 쉬면서 기어코 발꿈치를 붙든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냐고 윽박지르면 풀 죽어 구석에 엎드려 있다 깜깜한 화장실에 갇혀 오죽 바깥세상 그리웠을까 가벼운 몸을 들어 바로 눕히니 흠뻑 젖은 얼굴로 미안하다..

좋은 시 2023.11.12

멍에 / 이건청

멍에 / 이건청 개펄을 끌고 밀면서 왕십리쯤을, 대학 캠퍼스 인문관 쪽 가파른 계단을 오르곤 하였다 검은 염색 군복을 입은 그가 옆구리에 낀 책이 '국어학사'였던가, '현대시론'이었나, 아직 찬바람 속을 명주나비가 날아들곤 하였다. 4월이었던가, 목월 선생의 목련꽃도, 꽃 그늘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리곤 하였다 강의실 난간 쪽에서 바라보면 썰물의 바다, 끌고 밀며 가야할 개펄이 멈춰 있곤 하였다. 숨가쁜 개펄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힘든 개펄을 버리려고, 산등성이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개펄이 그냥 멍에로만 있는 게 아니라 까아맣게 널려진 딱정게들이 드나들며 꿈꾸는 집이며, 백합조개들이 뻘 속에서 진주를 키우는 우주라는 것을 평생을, 깊이 빠지는 개펄을 끌고 밀..

좋은 시 2023.11.12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좋은 시 2023.11.12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골목 늦은 밤 골목은 세계의 끝으로 가는 미지다 곡선의 완곡어법으로 사라짐의 결말을 서술하는 문장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모퉁이에서 그만 눈빛을 잃은 후 얼굴이 무심한 사람과 동행했던 그때 나는 몹시 위험했다 #불면 짙은 어둠은 청춘의 외연을 감싸고 있었지 들키고 싶은 나를 포장하느라 달의 껍질을 벗겨냈던 불면 별들이 감꽃같이 반짝이던 봄밤이었고 캄캄한 슬픔에서 칸 칸 피어났던 허기진 문장들로 막무가내 시인을 열망했던 그때 나는 끝도 없이 위험했다 #비 우산 속에서 발끝만 보고 걷는 버릇이 있지 발끝에 날름거리는 물의 혀를 좇는 내 눈동자는 어두워 선과 악이 섞여 흐르는 물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지 불편한 이름들이 물에 번식하는 축축한 공간 그때 서랍 속에 있어야 할..

좋은 시 2023.11.11

조금만(灣)/정상미

조금만(灣)/정상미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옆구리 깊이 파여 먼 곳을 바라보면//돌아온 파도의 말이 귓전에 쏟아집니다//퉁퉁 부은 발목들이 찾아드는 늦저녁//슬리퍼도 운동화도 물소리에 녹아듭니다//차르르 지워진 발자국, 만 가득 들이칩니다//해초 냄새 덜 밴 기다림을 매만질 때//짠물을 맞아 봤거나 흘려본 사람들은//발돋움 숨어 자라는 조금만의 근육입니다 「시와문화」(2021, 여름호) 정상미 시인은 2021년 등단했다. 등단작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담백하고 정갈한 언어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금만(灣)’은 제목이 특이하다. 시작도 새롭다. 아쉬움이 담긴 말엔 물소리가 납니다, 라는 첫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퍽이나 감각적이다.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신인으로서 어떤 ..

평론 2023.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