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바다는 가볍게 구워져 입안에서 부서져요 도토리묵 위에서 흩어지기도 하죠 한때 갯바위가 되고 싶었던 나는 파도의 음률을 사랑했어요 돌에 뿌리내리고 자란 가느다란 몸을 선호했지요 촘촘하게 펼쳐 놓은 하루를 말려 수평선을 당겨오면 시간의 껍질처럼 포개진 초록 잎사귀들 곡선밖에 모르는 춤으로 출렁이다가 온몸으로 바다를 받아적어요 듬성듬성한 연초록 사이 따개비 놀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소리를 버리고 슬픔이란 슬픔 죄다 흡입해서 갯내를 뿌려요 매운 연애의 비렁길을 돌아 심해에 묻어둔 스물세 살의 무거운 말들이 달려 나와요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기억들 , 얇은 바다를 깔고 밥과 감정을 넣어 돌돌 말아요 당신도 결국엔 납작해졌고 지금은 습기를 버린 얇은 이별의 바다 한 장 길고 ..

좋은 시 2023.11.11

가족 / 이길옥

가족 / 이길옥 아랫목에 앉아 발을 뻗으면 한 뼘 자투리가 남는 윗목까지의 거리 그 비좁은 오두막에도 봄볕이 기웃거립니다. 한 번도 떳떳하게 허리 펴보지 못하고 한 번도 자신 있게 앞서보지 못하신 아버지 고된 피곤을 어머니 치마폭에 털어놓고 목에 걸리는 한숨으로 방안을 채웁니다. 방을 채운 한숨이 봄볕에 버무려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자식들은 불평을 깔고 앉아 곱고 탐스런 꽃으로 벌 나비를 불러 모읍니다. 더 작다고 샘내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더 적다고 강짜 놓거나 기죽지 않습니다. 살 비비고 숨결 합치면서 기대어 삽니다. 아버지의 지친 몸을 받쳐주고 어머니의 아린 속에서 아픔을 건져냅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이엉을 이고 힘 겨워하는 토담집 낡은 문턱을 봄볕이 걸터앉아 방안의 칙칙한 어둠을 ..

좋은 시 2023.11.10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 모든 수직이 수평으로 눕는 바닥은 세상에 널려 있지만 진정으로 바닥을 칠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닥을 슬픔으로 칠 때 통곡은 통곡다워지고 웃음은 뛸 듯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길바닥이나 지하도 바닥 같은 생의 밑바닥 깔고 앉아 뭉그적거려 본 뒤에야 바닥을 치는 일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바닥 치고 일어서면 거기서부터 다시 길인 것도 알게 된다 물에 빠져 익사직전 캄캄한 숨막힘의 순간, 발바닥에 닿는 강바닥의 촉감에는 바닥을 친다는 것이 바닥을 찬다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솟구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려지거나 버림 받은 것들이 마지막으로 이르는 곳이 바닥이지만 바닥이 없다면 호수는 하늘을 담지 못하고 우물은 목마른 이의 갈증 풀어..

좋은 시 2023.11.08

섬 / 김윤선

섬 / 김윤선 식당은 널찍하고 천장이 높아서 쾌적했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률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시어머닌 휠체어에 앉은 채, 나는 그 곁에 자리를 잡았다. 지독히도 조용했다. '수다 금지'라고 했는지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함이 지나쳐 묵직하고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어색하고 긴장됐다. 처음엔 낯선 동양인을 관찰하느라 다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식탁마다 음식이 놓여도 어느 한 사람 선뜻 수저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퀭한 눈동자로 멀거니 딴전만 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표정 없는 얼굴들,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지만 설사 눈을 마주쳐도 반응이 없었다. 종이인형들 같았다. 어떤 맛이 당신 구미를 당긴 것일까, 넙죽넙죽 꽤나 잘 받..

좋은 수필 2023.11.05

멀구슬나무/이명길

멀구슬나무/이명길 늦가을 호수는 푼푼하다. 물오리들의 행렬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둥치만 남은 물 버들은 잠잠히 하늘을 읽는다. 물속을 거꾸로 인 채 말라버린 연 대궁은 삶을 회상하듯 묵묵하다. 호수가 생의 지론이라도 강의 중인지 물이랑 사이로 바람을 일깨운다. 오랜만에 친구와 근교의 호수공원을 둘러본다. 활짝 열린 하늘은 새털구름마저 지웠다. 낱낱이 떨어지는 햇볕을 이고,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호수 에움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발길을 옮기니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간간이 하늬바람이 스쳐갈 때면 신록의 수다가 들리는 듯하다.. 언덕 위로 특별한 나무가 있어 눈길이 간다. 멀구슬나무 줄기에 왕벚나무가 업혀 있다. 뻐꾸기나무라 한다.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남의 둥지에..

좋은 수필 2023.11.05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어자문魚子紋 / 김보성 막사발이 무수한 알을 품었다. 둥글게 살아온 생도 궁핍한 뒷골목의 삶도 따스하게 껴안는다. 뜨거움을 삼켜 향기로 스미면 투명 알이 꿈틀거린다. 껍데기는 말랑해지고 복아는 부푼다. 크고 작은 알, 뭉그러지고 당실하고 길쭉한 알들이 부화해 제자리를 찾는다. 흙빛 양수 속에서 볕내가 난다. ​ 막사발 안과 밖에 실금이 가 있다. 빙렬氷裂이다. 흙이 가마 안에서 화마의 시련을 이겨내고 얻은 표식이고 유약이 화신에게 하사받은 문신이다. 모두 불이 잉태하고 낳은 생의 지도다. 사발에 작은 물고기 알 모양으로 금이 갔으니 어자문魚子紋이라 칭한다. ​ 반달을 닮은 막사발을 만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빚고 고유의 색채를 지닌 그릇은 편안하고 소담하다. 달 안에 빛이 담기면 금 간 상처들이 서로를 ..

좋은 수필 2023.11.05

바게트/황진숙

바게트/황진숙   터질 대로 터져라. 쿠프가 벌어지고 속살이 차오른다. 칼금을 그은 껍질 사이로 속결이 뚫고 나올 기세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맘껏 팽창한다. 노릇하게 제 색을 갖추자 오븐 밖으로 나온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바삭거리는 소리가 생동한다. 저다움을 구현하는 소리가 거침없다.반으로 잘라 베어 문다. 한입에 느껴지는 맛이 아니다. 바삭한 껍질과 폭신한 속결은 씹어야 배어든다. 씹을수록 바삭한 껍질의 ‘바게트다움’이 전해져 온다.바게트는 세상 한가운데서 저만의 호흡을 이어간다. 여타 반죽처럼 치대는 레시피를 따르지 않는다. 억지로 주무르지도 않는다. 반죽에 힘을 가하지 않고 오랜 시간 발효한다. 반죽틀에 갇힌 정형을 거부하며 스스로 모양을 찾아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깊은 맛을 끌어낸다.이보..

발표작 2023.10.29

처마/김응숙

처마/김응숙 몸피 얇은 것들이 찾아들었다. 하루살이며 나방이었는데, 진즉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거미줄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처마 깊숙이에 먼지 같은 알을 까고 새끼를 쳤다. 비가 오는 날이면 민달팽이나 지렁이가 덜 젖은 땅을 찾아 기어 나왔다. 그들은 처마 밑 벽에 몸을 붙이고 비를 그었다. ​ 그날도 가을비가 왔다. 슬레이트 지붕이 다닥다닥 닿아있는 언덕빼기 동네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신작로로 들창이 난 길갓집이었다. 그 처마 밑으로 바싹 마른 아이들이 찾아 들었다. 예닐곱 살, 열두 살로 보이는 형제였다. 황급히 뛰어나왔는지 작은 아이는 맨발이었다. ​ 동네 중턱에서 고함과 비명이 따라왔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술만 마시면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었다. 우산을 쓴 아버지가 싸움을..

좋은 수필 2023.10.29

눈빛 / 김혜주

눈빛 / 김혜주 ​ 텅 비어 있는 눈빛은 슬펐다. 아무도 눈 맞춰 주지 않는 허공을 서성대고 있는 시선은 그래서 더 애잔했다. 그녀의 눈빛이 그랬다. 쌍꺼풀이 진 큰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의 그 막막한 눈빛. 꽉 닫힌 문 앞에 서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문고리의 흔적을 장님마냥 더듬고 있는 눈빛. 그런 그녀를 만난 것은 병실이었다. 그녀는 하얀 시트 위에 석고상처럼 굳은 육신을 뉘고 있었다. 몇 날을 두통에 시달리다 동네 병원을 찾았다.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자 의사는 더 정확한 검진을 위해 큰 병원에 가기를 권했다. 감기가 오래가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데 왼손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병원을 찾아갔다. 검사 결과는 가벼운 뇌출..

좋은 수필 2023.10.21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치며 걸을 때마다 창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던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 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좋은 시 2023.10.20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 ​ ​ 재봉틀이 오동나무 탁자 위에 앉아 갸르릉거린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쇠붙이임에도 어쩌면 저리도 섬세한 몸짓일까.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손길에 형형색색의 실들이 퐁당퐁당 땀을 낳는다. 홈질, 박음질, 새발뜨기 등 밤새도록 박은 바느질 종류가 많기도 하다. 재봉틀은 삼거리 중고 가게에서 우연히 눈을 마주친 오래된 골동품이다. 철제다리를 떼어내고 좌식으로 개조한 구닥다리다 보니 눈에 잘 띄는 곳에 버젓이 내놓기는 뭣하다. 그래도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이어 붙이는 데에 재봉틀만 한 것이 있을까. 힘주어 발판을 구르면 침목 위의 기차처럼 시접을 따라 달린다. 윗실과 밑실이 얽혀 한 개의 바느질 땀을 만들어낸다. 노루발이 다 박은 천을 뒤로 밀어내면..

좋은 수필 2023.10.19

풀들에게 경의 표한다 / 김애자

풀들에게 경의 표한다 / 김애자 마전지애(麻田之艾)란 말이 있다. 마밭에 쑥은 마처럼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인간성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와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제멋대로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야 할 쑥도 마밭에서는 마와 같이 오로지 햇빛만을 향해 ‘진지강화’형으로 곧게 자란다. 논에 나는 피란 식물도 벼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지만 이삭이 팰때엔 본색을 드러내는 의태식물이다. 식물이 성장할 때 두 가지 유형으로 자란다. 위로 키를 높이며 자라는 ‘진지강화형’과 옆으로 줄기를 뻗어가며 자라는 것을‘ 진지확대형’이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식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벼, 보리, 밀이나 조와 옥수수 등은 ..

좋은 수필 2023.10.19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박철영

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평론 2023.10.19

멍석/조미정

멍석 ​ ​ ​ 멍석 한 장이 시렁 위에 얹어져 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곰삭은 세월이 떨어져 나와 햇살이 뿌연 헛간 속을 둥둥 떠다닌다. 한 생애의 빼곡한 사연이 둘둘 말려있는 듯하다. 그냥 버리기 망설여진다. 오며가며 매콤한 눈길을 던지다가 마당에 꺼내 펼쳐놓는다.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어 설렁하더니 낡은 멍석 한 장 깔았다고 집 안 가득 온기가 들어찬다. 멍석은 새끼로 날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촘촘히 끼워 넣은 볏짚을 위아래로 얽어매어 만든다. 전날 밤에 물에 푹 불려 야들야들해진 볏짚으로 새끼부터 꼰다. 멍석의 날줄이 되는 부분이다. 설렁설렁 손바닥을 비비면 될 것 같아도 막상 새끼를 꼬아보면 만만치가 않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풀어지거나 골이 숭숭 팬다. 그럴 때마다 재빨리 몇 가닥의 볏짚을 ..

좋은 수필 2023.10.18

바지傳/조미정

바지傳/조미정 ​ ​ ​ ​ 바지는 직립보행의 종족이다. 몸통이 두 갈래로 갈라져 평생 걷고 달려야 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씨줄과 날줄로 얽은 혈관 속에는 질주 유전자가 흘러 한시도 제자리에 붙박여 있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쉼 없이 걷느라 가랑이는 낙타처럼 쉴 때조차 먼 곳을 바라본다. 불도저 같던 남편이 어쩐 일일까? 멀리 출장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아침부터 걷기를 주저한다. 지금쯤 대문을 성큼 나섰어야 함에도 서두르기는커녕 혼잣말까지 구시렁거린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바지 기장이 짧아졌다는 넋두리다. 그럴 리 없다며 부엌에서 일하다가 말고 쿵쿵 달려갔다. 바지는 진짜로 반 뼘 가까이 키가 줄어들어 발목 위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멀쩡히 입고 다녔던 단..

좋은 수필 2023.10.18

감나무 현관/조미정

감나무 현관/조미정 ​ ​ ​ 열댓 그루의 감나무들이 섬돌 앞에 늘어섰다. 어디 한 군데 매끈한 곳 없이 마디마디 가지가 뒤틀리고, 수피마저 물고기 비늘처럼 갈라 터진 노거수들의 사열식. 신석기 토기 같은 햇볕이 얼금얼금 빗겨 들며 대문도 없는 판잣집 마당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산골의 절반이 활엽수로 덮였어도 감나무 현관은 도드라진다. 나무들마다 이파리에 물든 정도가 전부 달라서이다. 마당 깊숙한 쪽은 도톰한 잎들이 그늘을 쓸어 담고 있다. 푸릇한 감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아직도 한창인 청춘으로 보인다. 가운데는 단풍 대궐이다. 잎과 열매가 함께 불그죽죽 물들어 무르익은 중년을 대변한다. 길가 쪽은 벌써 져버린 인생 같다. 하루바삐 떠나가느라 마른 가지에 낙엽 몇 장만이 바스락거린다. 한낱 한시에..

좋은 수필 2023.10.18

다랑이 밭의 서사/장미숙

다랑이 밭의 서사/장미숙 택배가 도착했다. 시골에서 보내온 상자에는 된장과 고추장, 매실액과 들깻가루가 들어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전화를 드렸더니 엄마가 불쑥 말씀하신다. “들깻가루는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인께 애껴 먹어라. 지난해 수확한 들깬디 인자는 더 못 할 것이여.” 마지막이라는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인가. 당신 스스로 마지막을 선언한 건 이제 더는 몸이 아닌 의지로도 밭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오래전부터 몸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의지에 기대 힘겹게 노동을 이어온 엄마의 삶에서 영원히 밭이 떠나버린 걸 알았다. 가슴 속에 요지부동 들어앉은 오래된 우물처럼 다랑이 밭은 ‘고향’이나 ‘엄마’ 하면 떠오르는 밑그림이었다. 모든 먹을거리가 그곳에서 ..

좋은 수필 2023.10.16

미로(迷路)/정재순

미로(迷路)/정재순 환희 같은 은빛햇살이 찰랑거렸다. 서늘한 바람을 한가하게 가르며 날아다니는 철새들의 정경은 그림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흙길에서 나무를 만나고 늪을 만나고 갈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도 눈짓을 나누었다. 숲처럼 으슥한 곳에서는 웅덩이도 만났다. 거울처럼 말간 웅덩이 속에는 나무들이 거꾸로 서 있었다. 웅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한 갈래로 이리저리 얽힌 빈 가지들이 미로 같았다. 잠시 동화책 속에 앉아있는 착각이 들었다. 늪을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쯤 걸린다고 했으니 산책을 마칠 쯤에는 해가 질 무렵이다. 남편과 나는 우포늪의 적나라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늪을 감싸 안은 길에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종종거리..

좋은 수필 2023.10.15

늙은 지폐 / 이성환

늙은 지폐 / 이성환 빳빳한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남루하고 꾀죄죄한 행색만 남았다. 표면은 누렇게 땟국물이 절었다. 주름살투성이에다 악취까지 풍긴다. 몸피는 군데군데 해져 초췌한 몰골이지만, 그나마 오른쪽 초상화 얼굴 윤곽은 변함없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자의 처연함이 노골적이다. 한 줌 재가 될 화폐들이 금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은행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지폐 다발을 풀어 훼손된 화폐를 분류하고 세고 묶었다. 무더기로 쌓인 지폐 앞에 전 직원이 달라붙었다. 재사용할 돈과 수명이 다 된 지전을 구분해야 하는 일. 책상 위는 물론 바닥에 종이도 아닌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돈을 셀 때마다 뽀얀 먼지가 날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빨리 일을 마치고 퇴근하기 위..

좋은 수필 2023.10.15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 넣은 굴렁쇠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치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좋은 시 2023.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