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소라껍데기/장미숙

소라껍데기/장미숙 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노르스름한 색깔에 윤기가 돌고 냄새만으로도 감칠맛이 느껴졌다. 한 숟가락 크게 떴으나 몹시 뜨거웠다. 숟가락을 입술 가까이 대고 호호 불었다. 냄새는 날숨에 밀려갔다가 급히 되돌아왔다. 들숨으로 몰려든 냄새는 후각을 자극했다. 바다의 쌉싸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낭만과 청량함을 품고 있진 않았다. 바람결에 실려 온 바다의 까칠한 겉살이나 햇살과 몸을 섞는 후텁지근하고 들큼한 것도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의 뼈와 오랜 시간에서 비어져 나온 진하고 곡진한 냄새였다. 바다의 속살이 입안에서 씹혔다. 눈물 맛이 났다. 아니, 고독한 맛이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뭉쳐진, 응고된 맛은 사진 속에서 보았던 바다 여인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바닷물에 잠긴..

좋은 수필 2023.10.08

억새의 이미지/목성균

억새의 이미지 목성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 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 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모..

좋은 수필 2023.10.01

계단 외 9편 / 박일만

계단 외 9편 / 박일만 이 발밑에 단단한 짐승은 무엇인가 꼿꼿한 등뼈를 자랑하며 앞발을 치켜들고 부동자세의 근본을 마스터한 짐승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출세에 오르고 누군가는 이곳을 거쳐 퇴장도 했을 땅속에 아랫도리 깊이 박고 포효하는 짐승 수많은 발들이 육중하게 오가도 끄떡 않는 선천성, 힘과 근육이 적나라한 태생이다 난간을 레일삼아 층층이 달려가는 고속열차다 시간도 여기서는 힘을 보태며 생의 속도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멈춤을 모르는, 질주에 익숙한 근성 한때 나에게도 저런 유전자가 있었던가 이곳에 기대어 상승의 욕망을 키운 적 있었던가 등뼈를 타고 오르내리는 식솔들의 눈총을 맞으며 숨차게 페달을 밟기도 했겠지 건물 한 곳을 덥석 물고 출세를 향해 돌진하는 짐승 어설픈 처세에나 골몰하며 살아 온 나,..

좋은 시 2023.09.26

청보리밭 외 2편/사윤수

청보리밭 외 2편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짖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내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초록 비단 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바람..

좋은 시 2023.09.24

곰탕집 불독/백정혜

곰탕집 불독 백정혜 짐승을 두고도 면식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불독을 봤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줄잡아도 오 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던 남의 집 개를 첫 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무엇으로도 나를 알아볼 리 없는 짐승이었지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건 반가움 때문이었다. 한길 갓집 문지방에 걸쳐 누운 개는 섭생인 양 바깥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지만 경계의 빛이라곤 아예 없었다. 다가앉은 낯선 여자를 그저 멀뚱히 쳐다만 봤다. 잔등이며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입안에서 빙빙 도는 말을 계속 응얼거렸다. 반십 년 소식 모르다가 만난 사람이었다면 나눌 수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절친한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개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변모를 헤아리고 재빨리 상대..

좋은 수필 2023.09.23

살구/이은규

살구 이은규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은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이제 한 사람은 없고 긴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한 사람만 남았다 살구나무는 잘 있지요 안 들리는 안부는 의문문과 평서문 사이에 있고 살구꽃말은 수줍은 또는 의혹 (하략) ―이은규(1978∼) 낮 기온이 높아지고 해가 뜨겁다. 우리에게는 그늘이 필요하다. 삶의 난도는 높고 성실해도 쉽지 않다. 내내 달려온 다리와 마음에도 그늘이 필요하다. 기도, 명상, 휴식, 여행. 뭐가 되어도 좋다...

좋은 시 2023.09.23

밥 / 사윤수

밥 / 사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神)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일 분이고, 도무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지고한 삶의 실천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 자체가 구원인 사람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풍전등화의 지경이 되었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그만 우리 집 살림을 거덜 내고 말았다. 깡그리 적빈이 된 것이다. 환란을 피해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읍으로 떠났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 ‘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우리는 서로..

좋은 수필 2023.09.23

방어(魴魚)/사윤수

방어(魴魚) 사윤수 머리에 뼈만 달린 주검이다 피 한 방울 흘린 자국 없이 살점은 이미 한 점 한 점 잘 도려내졌으니 자신의 죽음을 방어하지 못한 방어, 형식은 죽었으나 내용은 죽지 않았다는 듯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끔 입을 뻐끔거린다 밀물로 밀려왔다가 썰물로 쓸려가는 쇠잔한 숨 입 속의 어둠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기억은 주검 안에 아직 살아서 모슬포 푸른 바다를 건너는가 저 살점들을 다시 뼈에 봉합하면 방어는 살아서 수평선 끝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죽은 줄도 모르고 너는 또 파르르르 지느러미를 떤다 물고기 한 마리만 떠나도 바다는 허전한 법, 파도치는 무채와 오색 데커레이션 위에 가지런히 누운 방어회 한 틀 꽃상여 같다 곡두는 없으나 먹기조차 아까운 순교다

좋은 시 2023.09.23

저녁이 머물다/박성현

저녁이 머물다 박성현 ​ ​ 바람이 불었네 미세먼지가 씻겨 간 오후 외투에 툭, 떨어진 햇살 한줌 물컹했네 잠시 병(病)을 내려놓고 걸어 다녔네 시청과 시립미술관이 까닭 없이 멀었네 정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해 기우는 서촌에서 부스럼 같은 구름을 보았네 물고기는 허공이 집이라 바닥이 닿지 않는데 나는 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 가파르게 바람이 불어왔네 내 몸으로 기우는 저녁이 쓸쓸했네 쓸쓸해서 오래 머물렀네

좋은 시 2023.09.23

빗살무늬토기/허이영

빗살무늬토기 / 허이영 며칠 몸살을 앓고 나니 입맛이 까칠하다. 입맛 없는 데는 병아리 궁둥이만 따라다녀도 낫다 하여 명절에 시골에서 가져온 주먹만 한 동치미 무를 한 개 꺼냈다. 절반 뚝 잘라 나박나박 썰어 말간 유리그릇에 담고 칼칼한 동치미 국물을 한 국자 떠 담았더니 갑자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며 식욕이 돌았다. 깔깔한 입안에 동치미 국물 한 수저를 떠 넣었으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맛이 아니다. 이상스레 항아리를 떠나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 겨우내 층층이 쌓인 두꺼운 얼음 아래 삭여낸 슴슴한 깊은 맛이 플라스틱 통에 옮겨 담으면 본래의 맛이 감해진다. 어디 동치미 맛뿐이랴. 질박한 옹기 항아리는 돌담 아래 있어도 정겹고, 아파트 베란다 구성진 곳으로 밀려나 있어도 초라하지 않다. 이 땅 어느 ..

좋은 수필 2023.09.22

빈집 속의 빈집/ 김신용

빈집 속의 빈집/ 김신용 땅끝을 지나,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땅끝에 매달려 저기, 수척한 바다처럼 누워있는 사람, 그 바다에 나는 얼마나 많은 섬들을 띄워놓았던가 말의 섬들, 햇살 속에 온갖 어족의 비늘로도 반짝이던 그 다도해, 그러나 그 섬들은 이제 마당가에 뒹구는 빈 장독들처럼 불룩해진 배로 상상임신의 헛구역질만 하고 있음을 보네, 말의 뼈를 뽑아 삭아버린 서까래 하나 얹지 못한 덜컹이는 바람벽의 못 하나 되지 못한 빗방울 스미는 저 녹슨 함석지붕 하나 떠받치지 못한 말의 무수한 발자국만 남긴 몸, 이제 이 땅의 끝까지 지나왔지만 저기, 赤湖에 잠겨 잡풀 우거진 빈집으로 누워있는 사람, 그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좋은 시 2023.09.18

희아리/정여송

희아리 정여송 물이 창공으로 흐른다.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계곡물이, 강물이, 바닷물이 해를 향해 떠간다. 멍석 위에 널려있는 고추의 몸속에 머물던 빨간 수액도 하늘로 오른다. 마음도 따라 날아간다. 토실토실 잘 영근 빨간 고추의 두텁던 살집이 쏙 빠졌다. 씨앗이 비치도록 얇아졌다.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핏줄을 감춘 맑고 투명한 것이 참으로 애틋하다. 흔들자 맑은 소리가 난다. 도나캐나 다 내어주고 비워내어 초연해진 것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무구한 깊이가 짚어진다. 차라리 비어 있어서 전율케 하는 해맑음이다. 어머님은 고추가 잘 마르도록 이리저리 뒤적인다. 자식에게 쏟아 붓던 정성을 모아 손질한다. 무언가를 가려낸다. 빨간 색깔을 잃고 하얗게 얼룩져 변해버린 흉한 고추이다. 희아리. 고추의 본은 커녕 ..

좋은 수필 2023.09.17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팽팽하게 부풀었다. 아침나절에 섞어 둔 떡 반죽이 몸무게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릇을 감싼 비닐에 이슬이 맺혔고 주걱으로 공기를 빼 주는 와중에도 살아 꿈틀거린다. 막걸리 안에 들어있던 효모가 밀을 만나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정을 나눴으면 식솔이 저리 늘었을까? 아기 엉덩이 같이 부푼 반죽을 못자리 갈아엎듯 뒤집으니 공기층이 거미줄처럼 엉켰다. 뒤집어 품었던 공기가 빠져나가자 부푼 반죽이 힘없이 주저앉는다. 주걱으로 진정시킨 반죽이 뒤척이며 내는 몸내가 가히 폭발적이다. 시큼한 과일 향 같기도 하고 농익은 곡주 냄새 같기도 하다. 부풀다 주저앉은 반죽을 다독여 이차 발효를 시켜놓고 배나무 가지를 치고 꽃도 실한 것만 남기고 모두 따 준다. 서원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기 가득하..

좋은 수필 2023.09.17

부용화 / 설성제

부용화 / 설성제 부용은 연꽃 중의 하나다. 물에서 자태를 뽐내는 수련이, 진흙에서 향기를 뿜어내는 연꽃이 아닌, 나무에서 피는 연(蓮)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 피는 꽃이기에 누군가 곁을 맴돌기란 힘들 것이라 보호막이용 가시 같은 건 애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바라기처럼 되바라지게 태양을 직면하지도 않는다. 사루비아, 맨드라미, 배롱꽃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이유를 정작 모른다는 듯 부용은 희거나 연분홍의 저 다소곳한 빛깔로 작렬하는 불볕 아래 섰다. 강렬함으로 양립하기보다 순순함으로 존립하기를 선택했으니 내리쬐는 땡볕을 하소연하지 않는다. 타들어가는 속내를 붉디붉은 얼굴로 항명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묵언수행으로 주어진 계절을 건넌다. 여름 정오 무렵 대공원을 걷다가 무궁화인가 싶으..

좋은 수필 2023.09.17

명태/ 우남정

명태/ 우남정 불길을 줄이며 생각해 본다 온 힘을 다하여 끓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들은 어떻게 대관령 덕장까지 흘러왔을까 휑한 옆구리를 여밀 틈도 없이 명태는 흰 눈을 뒤집어쓰고 얼었다 녹았다 녹았다 얼었다 샛바람에 속없이 말라갔을까 뻣뻣해진 몸 흠씬 두들겨 맞으며 거죽 벗겨진 살집 으스러지며 참기름에 달달 볶이며 우러나고 또 우러나야 할까 육수가 유리 뚜껑을 치받고 뚝뚝 떨어질 때까지 시원한 것과 뜨거운 것이 분간이 안 갈 때까지 끓고 또 끓어야 할까 뼛속까지 들락거리며 울고 있는 기포들처럼 자작자작 잦아들며 뭉그러져야 할까 헛헛한 속 다독이는 뜨끈한 국 한 사발의 힘이여 북엇국을 끓이다 돌아다본다 유유히 헤엄쳐 회향하는 명태 한 마리 - 언젠가 한번 스토리에 썼던 말이 생각난다. 찌개를 끓이며... ..

좋은 시 2023.09.15

우화/라옥순

우화/라옥순 "곱게 화장도 해드렸습니다." 유리문이 열리며 들은 첫마디였다. 체온 없는 공기가 덮쳐온다. 고운 화장이라니,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공감을 얻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접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세수라면 몰라도 화장이라는 말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삭제되어야 할 문장이다. 텅 빈 화면에서 멈춘 커서처럼 방황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엉킨다. 한생을 글로 엮거나 입담으로 풀어낼 때 말미가 전체를 아우르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해드렸습니다.'에 붙들린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제대로 된 화장대는 차치하고 화장수 한 병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부르튼 곳에 바르는 연고뿐이다. 갈라진 발뒤꿈치에 걸려 올이 뜯긴다고 결 고운 이불을 덮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롱 속 명주..

좋은 수필 2023.09.15

무말랭이에 무친 외할머니 이야기 - 이재윤

무말랭이에 무친 외할머니 이야기 - 이재윤 외할머니의 무말랭이는 빨간색이 아니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새빨간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게 썰어 몇 번을 말렸다 불렸다를 반복한 무는 새끼손톱 길이에 아주 얇았다. 흡사 한 뭉치의 구더기 같아 보였다. 간장과 참기름으로 양념한 무말랭이는 허여멀건한 옅은 갈색이었다. 이 이북식 무말랭이를 숟가락으로 한가득 떠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면 씹는 맛이 독특했다. 꼬들 거리면서도 눅눅하고 물렁하면서도 아삭했다. 무 특유의 짭조름하고 알싸한 맛이 몇 배로 압축돼 강한 맛이었으나 이내 고소한 참기름과 간장이 스며 코까지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나는 외할머니네서 무말랭이를 먹을 때면 반찬이 아니라 밥처럼 먹었다. 외할머니는 무말랭이 맛을 안다며 나를 예쁘다 했다..

좋은 수필 2023.09.14

먹갈치 / 조수일

먹갈치 / 조수일 야행성이었다 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 대낮엔 모래 틈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 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 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 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붙었다 어둠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 북항의 밤은 늘 멀리서 찬란하였다 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 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 자신의 바다에서 단 한번도 刀漁가 되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 갈라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 마지막 실존이었던 銀粉마저 다 털려 유영의 꿈을 접었던 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게워내느라 갑판 위가 흥건했다 짠물을 다 마시고도 채우지 못한 허기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좇는 허영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깊이를 가늠..

좋은 시 2023.09.12

졸 / 박양근

졸 / 박양근 없는 듯 있는 것. 변변한 행세를 못하여도 제 몫을 지켜내려는 마음 하나로 판 위에 놓여 있다. 손에 닿은 감촉은 무명전사의 표지보다 가볍지만 홑 글자 이름은 암각화처럼 뚜렷이 박혔다. 졸卒. 전장은 천하를 거머쥐려는 두 패가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국운이 가려지고 군신의 생사가 좌우된다. 당연히 왕은 물론 사士와 졸卒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주어진다. 녹을 배분하듯 크기와 자리도 매김된다. 그렇지만 장기판은 전장과 다르다. 말패에는 상하와 귀천이 없다. 어느 하나라도 잡혀버리면 판세가 기울어지기 쉽다. 미천한 졸이 나름의 아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인 조직사회이라면 당연히 상석과 말석이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앞과 중앙을 차지하게 된다. 행세를 ..

좋은 수필 2023.09.09

목공소에서/마경덕

목공소에서 / 마경덕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선. 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좋은 시 2023.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