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헛기침 /김 만 년

헛기침 /김 만 년 밤이 이슥해지자 상을 차리고 제향을 사른다. 아버지 생전에 하신대로 열을 맞추어 음식을 진설하고 정성을 들여 잔을 올린다. 늘 아버지 옆 자리에서 지켜만 보다가 오늘은 내가 제주祭主가 되어 처음으로 아버지를 뵙는 것이다. 종헌終獻이 끝나고 긴 부복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 생전의 나날들이 아리게 스쳐간다. 묵배 끝에 일어설 무렵 아이들이 뒤에서 '킥킥' 웃는다. 이유인즉 내가 할아버지 헛기침 흉내를 내더라는 것이다. 어색하다며 아내도 아이들을 거든다. 그런가 싶기도 해 뒷머리를 긁적인다. 지금은 멀어져간 풍습이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집안에 대제大祭라는 것이 있었다. 조부님과 아랫대 24종반 제종당숙들, 그리고 조카항렬까지 한자리에 모이면 종갓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돼지를 잡..

좋은 수필 2023.08.19

김륭 시

김륭 시 심야深夜 /김륭 달 없이 오는 밤의 젖꼭지를 꺼내던 시골집 앵두나무는 얼마나 발을 헛디뎠을까 동구 밖에 주저앉은 바람을 불러다 눈두덩 꿰매던 어머니 먹감나무 위에 걸어둔 까마귀 얼굴로 밥상 뒤집어 하늘에 시비할 궁리가 남았는지 출몰이 잦아진 거미들이 옭아맨 눈물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맡이 어금니처럼 평평해지는 시간, 다세대주택 옥상에 널어둔 사각팬티가 안정을 찾아가듯 늙어간다는 게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죄스러워지거나 말거나 구불구불 길을 나서는 화사花蛇의 시간 한 여자의 지아비로 살기엔 너무 늦어버린 몸의 가장 가파른 곳에 도사리고 앉아 밥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지 꽃과 살을 섞고 싶을 때가 있지 가뭄 든 논둑의 뱀딸기처럼 등 돌려 우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듯 사는 게 고마워지거나 말거나 ..

좋은 시 2023.08.18

댓돌/황진숙

댓돌/황진숙 댓돌에 든다. 볕살이 데워 놓아서일까. 비루한 시간이 머무르는데도 따스하다. 데데한 등줄기를 쓸어주기는커녕 흙먼지를 걸친 신들의 발길로 어지러울 텐데 정갈하기만 하다. 올라서서 내다본다. 제법 높은 마루 밑에 자리 잡은 터라 고택의 풍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허공을 향해 부풀어 오르는 매화 꽃망울, 허세 부릴 줄 모르는 아담한 굴뚝, 한길 너머에 자리 잡은 또 다른 고택까지 부려놓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내로라하는 절경이 이리 질박할까. 밀림 속 문명이 닿지 못하는 고졸한 멋에 절로 숨을 고른다. 바닥만 있는 게 아니라고 가장 남루한 밑바닥이 묵언으로 전한다. 사랑채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는다. 주인장이 카페로 개방한 탓에 수시로 길손이 드나들었을 터이다. 대대손손 가(家..

발표작 2023.08.11

경북일보에 실린 수상소감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9327 [수상소감] 황진숙 "파일 안에 잠든 무명의 글들 흔들어 깨우며 정진할 것" - 경북일보 - 굿데이 ◇ 대상(흑구문학상) 댓돌댓돌에 든다. 볕살이 데워 놓아서일까. 비루한 시간이 머무르는데도 따스하다. 데데한 등줄기를 쓸어주기는커녕 흙먼지를 걸친 신들의 발길로 어지러울 텐데 정갈하기 www.kyongbuk.co.kr 흑구문학상 대상 '댓돌' 황진숙 ◇ 대상(흑구문학상) 댓돌 댓돌에 든다. 볕살이 데워 놓아서일까. 비루한 시간이 머무르는데도 따스하다. 데데한 등줄기를 쓸어주기는커녕 흙먼지를 걸친 신들의 발길로 어지러울 텐데 정갈하기만 하다. 올라서서 내다본다. 제법 높은 마루 밑에 자리 잡은 터라..

발표작 평론 2023.08.11

단풍깻잎 / 유점남

단풍깻잎 / 유점남 시장 한 귀퉁이에서 '노지 깻잎'이라고 쓴 쪽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뜻밖에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 것 같아 덥석 집어 들었다. 가을 일을 끝낸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거칠거칠한 감촉에서 진한 깻잎 향이 났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싸한 향기가 나를 부른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 이맘때면 어머니는 노르스름하게 단풍 든 깻잎을 소쿠리에 가득 따오셨다. 더는 내어줄 영양분이 없는 이파리를 서둘러 거두어도 이제 남은 것들은 스스로 알맹이가 되어 영글어 갈 것이었다. 윤기가 빠져나간 얼룩진 이파리는 하나같이 멍들고 찢어져 상처 난 것들뿐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에 맞서던 이파리엔 깨알 같은 점들이 모여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엔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꺾이지 않은 꼿..

좋은 수필 2023.08.10

술병/유강희

술병 / 유강희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아버지의 술심부름으로 나는 대두병을 들고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 점방으로 술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는 술을 사러 간다고 하지 않고 받으러 간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항상 술 앞에서 옷섶을 여미게 한다. 나는 한여름 시내를 건너고 들을 지나 대병이라고도 부르는 이 대두병에 막걸리를 받아서 훅훅 내리쬐는 땡볕 아래 어질어질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건너기 전 팽나무 밑에서 나는 그만 커다란 불경(?)을 저지르고 만다. 누가 볼세라 나무를 등지고 얼른 한 모금, 또 한 모금 숨죽여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병의 눈금을 조마조마 보아가면서 말이다. 땀은 찔찔 흐르고 목이 탄데다 호기심까지 칭칭 날 옥죄어 끝내 아버지 술을 탐하게 한 것이다...

좋은 수필 2023.08.10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모퉁이 수선집 / 박일만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

좋은 시 2023.08.09

모항 / 박일만

모항 / 박일만 잇몸을 활짝 열고 반기는 방파제 안쪽, 문득 그 여린 살 속으로 나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밀어 넣고 싶은 거 있지. 오장육부를 꺼내 짭조름한 해풍에 내다 말려서 빛바랜 세간 밑천 삼고, 내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이야 큰 삶은 원치 않아. 남은 생 부려놓고 실팍하게 기댈 언덕과 바다로 창을 낸 쪽방 하나면 족해. 은사철 꽃잎 같은 여자 있으면 더더욱 민망하게 좋지. 바다를 껴안고 뼈 삭히는 폐선 하나, 세월 낚는 참선에 득도하겠네. 건재한 어깨 근육을 말리는 무쇠 닻들, 녹슨 몸에서도 무지개 필거라며 뻘건 휴식에 여념없네 아직도 철들지 못한 내 쓸쓸함을 채워주는 30번 국도가 잠시 뒤튼 몸을 고르는 거기 변산 모항바다,

좋은 시 2023.08.09

신문지의 노래/허민

신문지의 노래 ​ 허민 ​ ​ 나를 스쳐간 독자여 지나온 생을 되돌아보는 밤이다 구멍 난 가슴 한쪽 스스로를 위한 작은 부고 기사 하나 실어보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 밤이다 낡은 집 바닥에 젖은 채 누워 한껏 페인트나 풀을 뒤집어쓰거나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 따위 덮고 있을 줄 몰랐던 쓸쓸한 밤이다 노숙인의 유품이 되어 그의 마지막 겨울을 나의 마지막으로 덮게 될 줄 몰랐지만 마지막까지 나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의 외로움을 가려주었으니 조금은 괜찮았던 밤이다 생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으니 내가 한 그루 푸르고 싱싱한 나무였을 적 한 여인이 내게 등을 기댄 채 텅 빈 하늘만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괜찮다, 나쁘지만은 않았지 생각한 밤이다 그녀를 위한 한 권의..

좋은 시 2023.08.02

보리 / 한흑구(韓黑鷗)

보리 / 한흑구(韓黑鷗) ​ ​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걷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응결된 흙덩이들은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심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에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리 속에 간직하..

좋은 수필 2023.07.31

머플러/문정희

춥고 고독한 사람이 어깨에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옷의 기원은 오늘날 우리가 머플러 또는 스카프라고 부르는 이 헝겊을 두르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였던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한 사각의 천을 두른 것이지만 그것 하나로 체온은 따스하게 유지되고 존재는 더욱 돋보이는 것이 머플러이다. 내가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나의 뚱뚱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한 20대 후반, 당황하다 못해 내린 처방이 강열한 무늬의 면 혹은 실크 스카프를 목에다 둘러줌으로서 시선을 위로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머플러는 패션을 넘어서, 내 이미지의 한 부분이 되었다. 최근에 뉴욕현대미술관(MoMA) 샵에서 산 목걸이처럼 가느다란 것에서부터 담..

좋은 수필 2023.07.30

시래기/도종환

시래기/도종환 ​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일들이다 ​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우해 ​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 겨울 마파람이 부는 ..

좋은 시 2023.07.30

그 男子의 손 / 정낙추

그 男子의 손 / 정낙추 ​ 그 남자의 손은 ​ 무쇠솥 뚜껑보다 크고 투박합니다 ​ 소나무 옹이보다 억센 손마디로 ​ 여린 싹도 키우고 고운 꽃도 피우게 하는 ​ 요술쟁이 손 ​ 그 손박닥엔 딱딱한 못이 박혀 있습니다 ​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 지나도 ​ 풀리지 않을 단단한 못 속에는 ​ 서러운 세월을 안으로 삭힌 ​ 땀과 눈물이 고여 있는 걸 아시는지요 ​ ​ ​ 그 남자의 손에서는 ​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 ​ ​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 생색 한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 ​ ​ 그 손이 요즘 들어 ​ ..

좋은 시 2023.07.30

수선공의 손 / 맹문재

수선공의 손 / 맹문재 ​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우리 마을 구둣방 수선공은 길과 구석에 쌓인 쓰레기 같은 표정이었다 ​ 그러나 나의 구두를 받자마자 오랜 병마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이내 이리저리 뒤집으며 실을 뽑고 찬찬히 가위질을 해댔다 ​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듯 망치로 톡톡 두들기고 볼을 감싸기도 했다 나의 구두는 어느새 수선공의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끄무레한 세밑 하늘이 어둡지 않았고 라디오를 타는 외환 위기 뉴스가 불안하지 않았고 수없이 다가오는 겨울바람도 시리지 않았다 잘 가라는 듯 수선공은 한번 더 구두를 매만지고 내게 건넸다 감쪽같이 변신한 의치(義齒)와 다르게 기운 자국을 당당히 가진 구두 수선공의 손은 어느새 구둣방의 문틈으로 먼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 맹문재,​『책이 무거운 이유』..

좋은 시 2023.07.30

안부/김시천

안부/김시천, 1956~2018) ​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

좋은 시 2023.07.30

찔 레 / 문정희

찔 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새우와의 만남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 놓았다 선뜻 그에게 탈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가 하늘 한 가..

좋은 시 2023.07.30

유종인 시 모음

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 호수공원 철조망 너머로 수수밭 행렬이 지나간다 맨발에, 맨종아리들이다 제자리서 오래 흔들린 저들, 흔들려, 가둘 수 없는 수수 머리다 ​ 머리에 붉은 양파 망(網)을 쒸운 가을, 수수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시장한 새들의 눈초리, 참극이 모여든다 ​ 홍건적처럼 붉은 양파 망 뒤집어쓴 수수 행렬을 나는 방관하였다 나는 나를 수수방관하여 홑겹의 세상에 묵은 곁을 두었다 ​ 하, 허공의 단두대까지 자라 올라간 수수 머리 홍건족들이여, 흙먼지 이는 그 허망까지 말 달려갈 황야라도 좋았다 ​ 말을 놓치고서야 말이 매였던 자리가 침묵의 그루터기다 ​ 말을 매어야 할 자리에 발이 묶여 내륙 저편은 아득하고 수수 머리만 자꾸 주억거린다 말을 다 하지 못한 피가 수수 발목에 한 모금씩 젖어 ..

좋은 시 2023.07.29

을야乙夜 / 송귀연

을야乙夜 / 송귀연 타그락 타그라 터얼컥! 가마니 짜는 소리에 잠을 깬다. 걸대엔 세로 방향으로 새끼줄이 촘촘히 끼워져 있다. 어머니가 바늘대에 짚 두매를 맞장구치자 아버지가 바디를 힘껏 내리친다. 씨줄을 교차하며 짚 넣기를 반복하니 가마니가 뚝딱 완성된다. 머리맡의 등잔불이 꺼질 듯 흔들리고 마구간에선 누렁이가 콧김 내뿜는 기척이 난다. 옛날 어른들은 종일 고단한 일을 하면서 밤엔 시간을 쪼개어 가내부업을 했다. 할머니는 물레를 저어 실을 잣고 베를 짰으며, 아버지,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았다. 방안엔 늘 먼지와 지푸라기가 풀풀 날렸다. 어린 우리는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한잠 푹 자고 나면 대체로 열시정도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그제야 부스럭거리며 하던 일을 접고 자리에 들었다. 아버..

좋은 수필 2023.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