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전체 글 1898

수필의 철학성과 문학성/안성수

수필의 철학성과 문학성 1. 눈물 지난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강의 중에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손수건으로 닦아내도 눈물은 쉬 멈추질 않았습니다. 나는 강의를 중단한 채 고개를 숙이고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써보았지만 허사였지요. 강의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창피한 생각은 두 번째였습니다. 우선, 눈물을 막는 것이 급했으니까요. 선생이 강의를 하다말고 울먹이기 시작하니 강의실 이곳저곳에서 눈물을 닦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러는 참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속수무책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날 수업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눈물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젠 ..

수필 이론 2023.07.09

수필 플롯과 미의식 / 안성수

수필 플롯과 미의식 / 안성수 수필 텍스트 속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하나는 소재 자체로서의 이야기(스토리)이며, 다른 하나는 그 소재의 배열순서를 예술적으로 변형하여 재조직한 문학적 이야기(플롯)이다. 이때, 스토리는 작가가 경험에서 가져온 생生 소재에 불과한데 비해, 플롯은 그것을 통찰과 재인 과정을 거쳐 발효 숙성시킨 숙熟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가 플롯의 재료라면, 플롯은 그 스토리를 예술적으로 체험하는 배열의 질서이다. E. M. 포스터는 『소설의 양상』에서, "스토리는 시간이 연속에 따라 배열된 사건들의 서술"로, 플롯은 "인과성에 중점을 둔 사건들의 서술"로 구별한다. 이러한 스토리의 개념과 논리는 수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만, 플롯에서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는다. ..

수필 이론 2023.07.09

조선매화/김화성

조선매화 햐아, 숨이 막혔다. 춘분을 앞두고, 올해도 어김없이 구례화엄사 각황전 옆 수백년 늙은 홍매가 몸을 풀었다. 너무 붉어 검은빛마저 감도는 흑매(黑梅)’. 붉고 깜찍한 홑꽃들이 검은 줄기에 ‘꽃등불’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었다. 발갛게 우꾼우꾼 달아오른 숯불. 마치 두루미가 외발로 서 있는 듯, 허리를 살짝 비틀고 무심하게 먼 하늘을 돌아보고 있었다. 꽃마다 앙증맞은 다섯 장의 선홍 꽃잎. 영락없이 뿌루퉁하게 입을 내민 철부지 막내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홍매의 ‘검은빛’을 잡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고 헤덤볐다. 순천선암사 늙은 매화들도 우르르 꽃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육백 살이 넘는 무우전 담장곁 홍매와 원통전 뒤편의 백매(이상 천연기념물 제488호) 주위를 쉽게 떠나지 못했다. 뒤틀린 가지..

소소한 이야기 2023.07.09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박철영

사람의 깊이 20집 이상인 시집 해설 순백해진 말들의 상상속 우화羽化 -이상인 시집《툭, 건드려 주었다》 시인, 문학 평론가 박철영 어둑해질 무렵 인 밭둑길을 퍼덕이며 달아나는 암탉 한 마리 배고픈 어른들이 새까맣게 뒤쫒아 가고 있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 전문 대체적으로 네 번째 시집 이전까지의 이상인 시인은 은은한 서정에 근접한 시적 세계를 성찰하고 사유한다. 두 번째 시집 《연둣빛 치어들》에서도 시골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을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의 “범 바위골에서 새벽밥 먹고 달려온/호재의 책가방 속에서/노랑턱멧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국어책을 꺼내자/푸드득 교실 뒷문으로 빠져 날아간다.//호재의 가방 속에는 늘 날고 싶은/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며 아이의 희망을 염원하고 있..

평론 2023.07.08

두부를 말하다/피귀자

두부를 말하다 피귀자  순종적인 나는 뼈가 없어 칼도 두렵지 않죠 상처를 잊는 법을 알고 있어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죠 자존심의 각에 따라 모서리가 생겨나도심장만큼은 물컹하죠 바깥에서 바라본 중심은 아득하지만굳이 나를 고집하려 하지 않아서들러리와 어울려 맛을 내죠 바스러진 꽃 스미고 뭉쳐 몽글몽글해진 하얀 살갗비로소 당신 살과 피가 되고 싶죠 뜨겁게 쥐어 짜인 기억마저 노래하는 칼날에 잘려지죠 토막처지는 내 삶의 어설픈 구간은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린 당신의 방식이죠

좋은 시 2023.07.08

그 여자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박제영

그 여자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 박제영 ​ 태안에서 당진을 잇는 한적한 지방도를 지나던 승용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려서는 갓길 좌판에서 수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와 흥정을 시작했는데, 할머니 이 수박 얼마예요 올해 날이 궂어서유 아니 이 수박 얼마냐고요 긍께 품이 많이 들어서유 그러니까 얼마 드리면 되냐고요 대충 줘유 서울 사람이 잘 알겄쥬 촌것이 알간디유 만 원 드리면 될까요 냅둬유 소나 갖다 멕이게 서울서도 만 원이면 살 수 있는데요 그럼 서울서 사지 여까지 왜 왔슈 그러지 마시고 좀 깎아주면 안 돼요 서울깍쟁이 서울깍쟁이 하더만 진짜구만유 그럼 이만 원에 세 개는 어때요 싸게라도 많이 파는 게 좋잖아요 냅둬유 썩어지면 거름이나 주지유 머 그 여자, 결국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 내 엿 내..

좋은 시 2023.07.07

읽지 않은 편지/장현심

읽지 않은 편지 장현심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종영됐다. 특수전사령부 소속 군인들과 의료봉사단 의사들이 재난 지역의 극한상황 속에서 본분을 지키며 사랑하고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름대로 내 젊은 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당시 여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도 수동적이었다. 상대가, 마음의 키워드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해도 대답을 피하거나 감정을 눙치는 것이 예사였다. 나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사람들은 주인공 '유시진 대위'와 '의사 강모연'이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연애 세포를 깨운다고 아우성쳤지만 나는 조연 커플인 '서대영 상사' 와 '윤명주 중위'의 연애에 안달이 났다. '쓰리스타' 장군 아..

좋은 수필 2023.07.03

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은하수 같은 수필 쓰는 날을 기다리며 / 박시윤 늦가을, 밤하늘을 본다. 듬성듬성 떠있는 별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지나간다. 별은 빛났으며 언어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별은 보는 자의 몫이었고, 언어는 쓰는 자의 몫이리라. 하늘에는 은하수가 존재하고 내가 사는 지구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미미하게 살아가는 나의 내면에는 언어의 세계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존재한다. 하늘의 은하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현실의 하늘에는 견우와 직녀별을 품고 있는 은하의 강이 말라 버린 것인지 빈 공간만 널찍이 펼쳐져 있다.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함 속에 나는 은하수를 찾고자 밤마다 하늘을 우러르며 혼자 서성인다. 도회지의 회색빛 하늘에서 보이는 별이야 몇 안 되겠지만 가깝게는 북두칠성의..

좋은 수필 2023.07.02

밤 꽃/박제영

밤 꽃/박제영 - 유월에 산에 오르다보면 비린내 같기도 한데 뭐라 말하기 참 거시기한, 참 묘한(?) 향기가 코를 찡긋거리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돌려 말하면 오히려 헷갈릴 수 있겠네요. 온 산을 진동하는 정액 냄새로 정정하지요. 중학생 때, 처음 몽정을 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엄마 몰래 빤쓰(?)를 빨면서 처음 맡아보았던 그 정액 냄새. 산을 오르는데 난데없는 정액 냄새라니! 그 냄새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민망하기도 할 듯한데요. 그 망측한 냄새를 풍기는 범인은 바로 밤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조금은 야한 꽃, 동서고금 시인 묵객들이 야화(夜花)라고 부르곤 했던, 그러나 실은 밤나무꽃인,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밤나무와 밤 그리고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평론 2023.07.01

최광임 시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최 광 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

좋은 시 2023.07.01

겨울강 / 정철웅

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

좋은 시 2023.06.30

가을 왕조/김영미

가을 왕조 ​ ​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왕조 일가가 단풍놀이에 나섰다 ​ 산중턱 위 구부정한 해님이 읍揖하며 산과 들에 살과 즙 산채로 대령이요 큰 소리로 고告한다 ​ 사방을 둘러보신 대비마마 열 두 왕손을 무릎에 앉힌 듯 너럭바위 미소를 지으신다 수청을 들라-앗! 대전마마 단풍을 호령하시고 질투에 몸이 달은 후궁 조 씨 숙의 안 씨 귀인 정 씨 몸종 삼월이 구월이 시월이 오색당의를 불태우며 산을 오른다 ​ 아는지 모르는지 구중궁궐 중전 한 씨 서책을 덮고 후원을 거니신다 낙엽 지는 소리에 돌아보신다 ​ 대전 뒤뜰에는 팔월 그믐 하룻밤 성은이 몸져눕고 빈 가지마다 목매단 무수리들 우수수 떨어지고 ​ ​ ​ ​ 밀양 표충사를 거쳐 천황산에 오를 때이다. 쉬어가느라 8부 능선 너럭바위에 앉아 지금껏 힘들게 오..

좋은 시 2023.06.29

자반고등어 / 조현숙

자반고등어 / 조현숙 ​ 갈바람에 가랑잎들이 나무를 떠난다. 그 자리에 발덧 난 햇살이 내려앉는다. 늘비한 국수 난전에서 끓어오르는 육수 냄새가 시장통에 목을 매고 사는 삶들을 둥실한 온기로 채우고 있다. 여기쯤일까? 아들 혼사 때 입을 한복을 맞추러 나선 길에는 가을을 먹는 사람들, 가을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다. 무릎에 염증을 달고 사는 남편이 시장 어귀 가로수 아래서 숨을 고른다. 힘차게 헤엄치던 푸른 바다의 시절을 저만치 밀어 놓고 누런 잎사귀들, 후두두 떨어지는 길에 우리 같이 서 있다. 노량으로 걸었어도 이만큼 오느라 가쁜 숨을 내쉬는 발밑에서 낙엽들이 부스럭 몸을 일으킨다. 작은 새 떼들이 가랑잎 파들거리며 떠는 나뭇가지 안에서 소란스럽다. 나란히 걷던 남편이 나를 앞세운다. 와그작..

좋은 수필 2023.06.29

종자의 시간 / 조현숙

종자의 시간 / 조현숙 ​ 햇살이 하루를 깁고 있다. 분주한 도시에 너볏하게 들앉은 채종답採種畓은 묵묵히 써 내려간 붓을 거두고 빈 몸체이다. 논바닥을 훑던 까치들이 쌍쌍이 허공에서 만났다가 떨어지고 다시 만난다. 퍼덕거리는 날개로 성급하게 봄을 부른다. 바람의 허밍에 햇살이 낮게 출렁인다. 질주하는 속도도, 번잡하게 엉키는 조음도 이곳에선 휴지와 묵언으로 스며든다. 때를 쫓아가는 것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동질의 빛과 시간 속에 있지만 같이 흐르지 않는다. 화려한 문장이 아니다. 볍씨의 시간은 더디고 질박해도 시절이 되면 기어이 제 빛깔의 문장을 보여준다. 늘 마음이 조급했다. 뭔가에 화가 나고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절박해도 열심만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결과에 지쳤다. 꽉 막혀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

좋은 수필 2023.06.29

트럭/하린

트럭 하린 트럭, 하고 공기를 토하면 거대한 밤이 질주해 온다 살다 보면 폭력적인 기계를 몰고 고속도로를 점령하고 싶은 밤은, 꼭 온다 너는 비행소년에서 비행청년으로 자라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엔진으로 장착한다 방향지시등이 고장 난 삶에서 넌 애인에게 예민한 급소를 들킨다 건기 내내 굶주린 사자처럼 넌 너무 오래된 이빨을 숨겼다 천천히 혈관을 따라 불법 제조한 분노가 주입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혁명이 끓어오른다 식상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시야를 흐린다 애야, 넌 너무 착하단다 이제 그만 일하러 가야지 어머니가 걸어갈 때마다 등 뒤에선 사리事理가 뚝뚝 떨어진다 B급 기름 같은 아버지와 길들여지지 않는 애인과 마이너스 통장을 보고도 그런 악몽을 견디다니 어머니는 트럭보다 무서운 기계다 아, 씹어 먹고 ..

좋은 시 2023.06.28

막돌탑 / 박양근

막돌탑 / 박양근 부산의 중심지에 자리한 금련산에 작달막한 봉우리들이 솟았다. 여름 뙤약볕의 열기를 받은 돌산이 구경거리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생겨난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세 번의 여름이 지나면서 투박한 돌탑이 막 손에 의하여 올려진 것이다. 어느 해 여름철이었다. 그해는 유달리 가뭄이 심했다. 덩달아 비도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산길에서 하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경박하리만큼 가벼운 먼지가 길 주변의 잎에 보얗게 쌓여 마치 능수버들 꽃들이 쌓인 듯했다. 그 여름은 모든 것이 유달리 가볍게 움직이는 계절이었다. 그 길에는 평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햇살을 가릴 나무도 없고 길은 울퉁불퉁해서 발걸음이 편치 않은 길이다. 비탈 밑에는 가로수가 넌출대는 산복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웬..

좋은 수필 2023.06.27

햇귀/박필우

햇귀 누구나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찬 언덕에 지푸라기 깔고 누워 하늘을 양껏 봅니다. 저 홀로 하늘을 향해 우뚝 버티고 선 미루나무가 고독합니다. 십여 년 넘게 다닌 직장을 달랑 A4용지 한 장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배낭 하나, 오랫동안 비워둔 내 마음의 빚 스케치북까지 챙겨 가는 뒷길에 정류장까지 딸아이 손잡고 슬픈 눈으로 따라나서는 집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알 듯 모를 듯 웃어 준다는 게 그만 슬픈 여운만 남기고 맙니다. 어디 갈 거냐고 묻는 아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습니다. 문득 고향 마을이 떠올랐지만, 부모님은 물론 홀로 남은 형수마저 떠나버린 고향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난 어디로 가야 할까?’ 터미널서 한참을 망설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해가 궁금합니다. 그래! ..

좋은 수필 2023.06.27

엄지발톱 / 박경혜

엄지발톱 / 박경혜 네일아트 집 앞에서 걸음이 멎는다. 화려한 손톱들이 여인의 빈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화려함에 감탄하곤 했다. 마음이 울적한 날, 호기심 반 허전한 마음 반으로 손톱에 이어 발톱까지 내밀고 앉아있다. 발톱이 예쁘시네요. 늘 밉다고 생각하던 발톱인데 인사삼아 하는 소리일지라도 싫지는 않다. 곱게 화장하는 엄지발톱을 바라보는데 문득 기억 하나가 살아난다. 내 발톱을 만지작거리던 다섯 살 아이가 엄마는 몇 살 때 발톱이 빠지냐고 묻는다. 무슨 소린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외할머니, 아빠 발톱 빠졌잖아. 외할머니는 몇 살 때 발톱 빠졌어?” 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도록 웃고 나서야 엄마는 발톱 안 빠진다고, 외할머니는 다쳐서 그렇다고 말해준다. 아휴, 다행이다 안심..

좋은 수필 2023.06.26

꽃살문 / 주인석

꽃살문 / 주인석 꽃이라고 해서 다 물만 먹고 피는 것은 아니다. 향이 특별히 좋거나 자태가 고운 꽃은 사람의 손에 보호를 받으며 물을 먹고 꽃을 피운다. 과잉보호 탓인지 그런 꽃은 곱게 피지만 길지 않은 시간에 떨어진다. 그러나 물 한 방울 먹지 않고도 천년을 하루 같이 피어 있는 꽃이 있다. 아무런 연유 없이 내가 절집을 찾을 때는 꽃살문을 보기 위함이다. 꽃의 성질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꽃이라며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것에서 나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가로 세로 대각선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태와 문틀을 벗어나지 않는 꽃살의 지조가 내 마음을 잡고도 남음이 있다. 꽃살문의 꽃은 오직 붓과 칼로만 피어난다. 얼마나 목말랐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애잔한 마음이 든다. 꽃잎에 나이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

좋은 수필 2023.06.26